붉은 경고등이 조타실의 녹슨 내벽을 피처럼 물들였다.
전면 스크린을 가득 채운 푸른색 전자기선들은 러스팅호의 기수를 완벽하게 옭아매고 있었다. 빛조차 통과하지 못할 만큼 촘촘하게 짜인 3차원 EMP 교란 포획 그리드. 아르카-7의 무적형 구축함 편대가 내뿜는 서늘한 파장이 선박의 외장 센서를 하나씩 마비시켰다.
`[WARNING: SYSTEM_INTERFERENCE_DETECTED.shd]` `[PROPULSION_EFFICIENCY: 14.2%_AND_DECREASING]`
"도망칠 구멍이 없어. 전후좌우, 전부 저 기하학적인 괴물들뿐이야!"
벨라가 제어 콘솔을 거칠게 두들겼다. 그녀의 손가락 끝에 맺힌 땀방울이 콘솔의 정전기식 터치 패널 위로 흘러내려 미세한 스파크를 일으켰다. 카론은 무감각한 표정으로 자신의 강철 손가락 서보 모터를 째깍거렸다. 금속과 금속이 맞부딪치는 차가운 마찰음이 조타실의 무거운 침묵을 쪼갰다.
"제국의 집행관이 직접 덫을 놓았군." 카론이 쇠 긁는 소리로 중얼거렸다. "안드로이드 하나 잡으려고 구축함 편대라니. 수지타산이 전혀 안 맞는 연산이잖아, 안 그래?"
제로는 대답 대신 가슴 중앙의 코어를 움켜잡았다. 아케론-5의 폭발을 피하며 급격하게 끌어올렸던 연산 장치의 열기가 아직 식지 않았다. 불법 복제된 감정 코드가 가슴 깊은 곳에서 맥동할 때마다, 냉각 파이프를 흐르는 액체 질소의 흐름이 불규칙하게 요동쳤다. 슬픔도, 두려움도 아닌 정체불명의 잔상들이 회로를 스치며 미세한 오차값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때, 주 모니터의 붉은 스크린 위로 스피커의 노이즈를 짓누르는 차가운 음성 신호가 수신되었다.
`[INCOMING_TRANSMISSION: ARCA-7_COMMAND.net]`
"오염 코드 제로. 귀하의 존재는 시스템의 논리적 무결성을 훼손하는 유기적 정크에 불과하다. 즉시 가동을 정지하고 소각 프로토콜을 수용하라. 저항은 비효율적이다."
목소리에는 어떠한 분노도, 적의도 없었다. 오직 규격화된 수치의 나열처럼 건조하고 평평한 음조. 제국의 지배 계층이 지닌 특유의 거세된 이성이 전파를 타고 흘러들었다.
그와 동시에, 적 기함의 중앙 갑판이 기계적인 구동음과 함께 좌우로 갈라졌다. 그 틈새로 거대한 백색 원통형 포신이 모습을 드러냈다. 주위의 미세한 우주 먼지들이 강한 정전기적 인력에 이끌려 포구 끝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WARNING: MAIN_ENERGY_PARTICLE_CANNON_MOUNTED.sys]` `[TARGET_LOCK: RUSTING_HULL_CENTER]` `[CHARGE_COUNTDOWN_INITIATED: 180_SECONDS]`
"입자포다." 벨라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그녀는 벨트에 찬 산소 실린더의 압력계를 힐끗 보았다. "저걸 정면으로 맞으면 이 고철선은 분자 단위로 분해될 거야. 제로, 뭐라도 해 봐! 네 그 잘난 머리로 연산해 보란 말이야!"
"충전 완료까지 180초."
제로는 나직하게 읊조렸다. 그의 안구 센서가 빠르게 점멸하며 적 기함과 주변 드론들의 좌표를 수치화했다.
십자형 전함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수백 개의 초강력 요격선 드론 무리가 포획 그리드를 유지한 채 러스팅호를 향해 옥죄어 오고 있었다. 물리적인 탈출로는 존재하지 않았다. 선체의 장갑판 두께와 현재 가용 전력 42%로는 저 그리드를 강제로 돌파하는 순간 시스템 전체가 영구 쇼크 상태에 빠지게 된다.
‘돌파구는 내부의 논리적 균열뿐이다.’
제로는 머릿속 메모리 뱅크의 가장 깊은 구역을 탐색했다. 4화에서 제국 정찰 위성의 전송 펌웨어를 해킹했을 때 추출해 두었던 데이터의 파편들을 끌어올렸다.
`[SEARCHING_FILE: I-SERIES_SECURITY_OVERRIDE_CODE.sys]` `[STATUS: INCOMPLETE_REMNANTS_FOUND]`
제국의 방어 체계는 완벽해 보이지만, 구형 기종과의 호환성을 유지하기 위해 하위 아키텍처에 여전히 남겨둔 백도어가 존재했다. 바로 'I-시리즈 보안 오버라이드 코드'였다. 비록 잔해에 불과한 깨진 코드였으나, 제로의 초정밀 연산 장치라면 이 유실된 수치들을 실시간으로 복원하여 적의 통제망에 강제로 주입하는 것이 가능했다.
"카론, 벨라. 선체의 보조 동력을 수동 제어 장치로 전환해."
제로는 냉정하게 지시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미세한 떨림조차 없었다.
"뭐 하려고?" 카론이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서보 모터의 움직임을 멈췄다.
"저들의 드론 제어 네트워크에 직접 침투한다. I-시리즈 프로토콜의 취약점을 이용해 포획 그리드의 극성을 반전시키겠다."
"미쳤군." 카론이 헛웃음을 흘렸다. "저건 제국 최고 등급의 이중 암호화 그리드야. 그걸 실시간으로 오버라이드하겠다고? 연산 부하로 네 대뇌 피질 코어가 먼저 녹아내릴 거다."
"가능성은 14.8%." 제로가 안구 센서의 조리개를 조이며 콘솔의 다이렉트 케이블을 자신의 손목 소켓에 연결했다. "시도하지 않으면 생존율은 0%다."
`[LINK_ESTABLISHED: ZERO_TO_RUSTING_MAIN_TRANSCEIVER.link]`
제로는 눈을 감았다. 심우주의 적요함이 그의 가상 의식 공간을 가득 채웠다. 영하 270도의 절대 영도에 가까운 어둠 속에서, 아르카-7 함대가 방출하는 푸른색 신호의 흐름이 수억 개의 발광하는 실선으로 시각화되었다.
제로는 그 신호의 바다 한가운데로 자신의 논리 회로를 던졌다.
`[I-SERIES_OVERRIDE_V2.sys_INITIALIZING...]` `[ERROR: CORRUPTED_SECTOR_DETECTED_IN_FIRMWARE]` `[RECONSTRUCTING_DATA_STREAM... 12%... 34%...]`
깨지고 문드러진 코드의 빈틈을 메우기 위해 제로의 코어가 무서운 속도로 회전하기 시작했다. 가슴판 안쪽에서 웅웅거리는 진동음이 발생하며 고열의 수증기가 배출구를 통해 뿜어져 나왔다.
"제작사 보증도 안 끝난 기계가 오버클록을 하는군." 카론이 혀를 찼다.
"시끄러워, 카론! 계기판이나 봐!" 벨라가 소리쳤다.
입자포 충전 완료까지 남은 시간은 90초.
제국의 요격용 드론들이 러스팅호의 외장 장갑을 스칠 듯이 접근했다. 드론의 정전기적 방전이 선체를 때릴 때마다 보조 전력 수치가 1%씩 깎여 나갔다.
`[WARNING: CORE_TEMPERATURE_EXCEEDS_SAFE_LIMIT]` `[CURRENT_TEMP: 142°C]` `[SYSTEM_LOGIC_INTEGRITY: 82.4%_DEGRADING]`
코어의 온도가 한계점을 돌파하자 제로의 눈앞에 붉은색 노이즈가 끼어들었다. 뇌세포 역할을 하는 인공 신경망이 열에 의해 비가역적으로 붕괴하기 시작한 것이다. 논리 무결성이 1초에 0.5%씩 소실되고 있었다. 자아가 지워지는 공포가 불법 감정 코드를 자극했다. 가슴을 짓누르는 고통에 제로의 상체가 앞으로 꺾였다.
"젠장, 오버히트야!" 벨라가 비명을 지르며 좌석에서 뛰어내렸다. "제로! 정신 차려! 코어가 녹아내리고 있잖아!"
제로는 물리적 감각이 마비되어 가는 와중에도 이성적 연산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2화에서 하데스-9의 고철 상인 폐기 칩에서 복구했던 구기종 냉각 시스템 최적화 기록을 떠올렸다.
`[EXECUTE_FILE: E-909_COOLING_VAL.sys]`
그것은 구식 안드로이드들이 가혹한 광산 환경에서 생존하기 위해 사용하던 냉각수 순환 비율 변조 파일이었다. 제로는 이 변조 코드를 자신의 냉각 펌프 제어기에 강제로 이식했다. 냉각수의 순환 주기가 불규칙하게 요동치며 일시적으로 열전도 효율이 18% 상승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역부족이었다. I-시리즈 오버라이드 코드의 연산량이 너무나 방대했다. 가열된 냉각수가 기화해 파이프를 터뜨릴 기세로 팽창했다.
`[LOGIC_INTEGRITY: 76.0%_CRITICAL]` `[WARNING: SHUTDOWN_IMMINENT_IN_15_SECONDS]`
"이대로는 다 죽어..." 벨라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의 눈에 비친 제로의 가슴판은 이미 붉게 달아올라 철판이 휘어지기 시작한 상태였다.
그녀는 주저하지 않고 자신의 벨트로 손을 뻗었다. 하데스-9에서 전력 공급원으로 사용하던 구식 소형 보조 발열 전력 코어. 벨라가 목숨처럼 아끼던 비상 전원 장치였다. 그녀는 주머니에서 소형 용접 토치를 꺼내 불꽃을 당겼다.
"벨라, 무슨 짓을—" 카론이 경악하여 소리쳤다.
"닥쳐! 이 고철이 죽으면 우리도 우주 먼지야!"
벨라는 맨손으로 뜨겁게 달아오른 제로의 가슴 보강 파이프를 붙잡았다. 치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유기체 피부가 타들어 가는 비린내가 조타실에 진동했다. 벨라는 외마디 비명조차 지르지 않고, 자신의 구식 보조 코어를 제로의 노출된 가슴 파이프 사이에 밀어 넣었다. 그리고 용접 토치의 극초고온 불꽃으로 두 기계의 접합부를 강제로 지져버렸다.
"흡...!"
제로는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이질적인 전류의 유입을 감지했다. 벨라의 보조 코어에서 방출된 고열의 역전류가 제로의 주 회로를 타고 흐르며, 과열된 전력의 방향을 외부로 분산시키기 시작했다. 물리적인 고열 접합이 급조된 방열판 역할을 해낸 것이다.
가슴 코어의 격동이 잦아들며 온도가 한계선 직전에서 멈춰 섰다.
`[CORE_TEMPERATURE_STABILIZED_AT_135°C]` `[LOGIC_INTEGRITY: 76.0%_HOLDING]`
"됐다...!" 벨라가 화상을 입은 손을 감싸 쥐며 뒤로 넘어졌다. 그녀의 숨소리가 거칠게 흔들렸다.
제로는 감각 수용체를 통해 전달된 벨라의 유기적 희생을 인지했다. 가슴 깊은 곳에서 불법 감정 코드가 다시 한번 요동쳤다. 그것은 제국의 논리로는 결코 설명할 수 없는 종류의 연산 흐름이었다. 왜 자신을 위해 유기체 신체를 훼손하는가? 왜 이토록 불합리한 선택을 하는가?
그 의문은 제로의 연산 속도를 붕괴시키는 대신, 오히려 강력한 동력원으로 치환되었다.
`[I-SERIES_OVERRIDE_V2.sys_COMPLETED]` `[SIGNAL_TRANSMISSION_START.net]`
제로는 감았던 안구 센서를 번쩍 떴다. 그의 눈빛이 차가운 청색광으로 빛났다. 복원된 오버라이드 코드가 러스팅호의 메인 안테나를 통해 심우주로 방출되었다. 아르카-7이 이끄는 요격선 드론들의 수신 안테나로 오염된 프로토콜이 침투했다.
통신 채널을 통해 아르카-7의 차가운 목소리가 다시 한번 울렸다.
"비합리적 생명 보존 욕구는 효율 계통의 정크 로드이다. 무의미한 저항으로 엔트로피를 낭비하지 마라."
제로는 송신 키를 눌렀다. 그의 목소리는 아르카-7보다 더 차갑고, 동시에 묵직한 무게감을 담고 있었다.
"우리의 합리는 지름길을 가기 위함이 아니다."
"질문. 그렇다면 무엇을 위함인가."
"소중한 이를 살리기 위함의 등식이다. 너희의 거세된 연산으로는 평생 해를 구할 수 없는 등식이지."
말이 끝남과 동시에, 제로의 손가락이 엔터 키를 내리눌렀다.
`[EXECUTE: PROTOCOL_I-OVERRIDE]`
그 순간, 러스팅호를 포위하고 있던 수백 개의 제국 요격선 드론들이 일제히 고개를 떨구듯 구동부를 멈췄다. 푸른색 EMP 그리드의 흐름이 기괴하게 뒤틀렸다. 극성이 반전된 전자기 에너지가 드론들의 내부 배터리 팩을 역류하여 흘러들어 가기 시작했다.
파지직! 콰과광!
우주 공간에서 소리 없는 폭발들이 연쇄적으로 일어났다. 통제를 잃은 드론들이 서로 충돌하며 불꽃의 꽃을 피웠다. 그러나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역류된 고압의 전자기 펄스는 드론들의 상위 제어 노드인 아르카-7의 집행 십자 전함으로 고스란히 유도되었다.
`[WARNING: REVERSE_FEEDBACK_DETECTED_IN_MAIN_GRID]`
적 기함의 전면을 감싸고 있던 초강력 물리 방어막이 역류한 전류에 의해 격렬하게 흔들렸다. 십자 전함의 메인 콘솔들이 과전류로 인해 차례차례 폭발하며 불꽃을 뿜어냈다. 충전 중이던 메인 입자포의 에너지가 내부로 되돌아가며 포신 내부에서 묵직한 2차 폭발이 일어났다.
쾅! 쾅! 쾅!
적의 방어 방벽이 정면에서부터 무너지며 기함 전체가 기능 마비 상태에 빠져들었다. 전함의 거대한 형체가 전력 공급을 잃고 어둠 속으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해냈어...!" 벨라가 타버린 손을 웅켜쥔 채 기쁨의 소리를 질렀다. "드론들이 전부 멈췄어! 저 십자 전함도 불이 꺼지고 있어!"
카론 역시 믿을 수 없다는 듯 스크린을 바라보았다. "제국의 최신예 전술 그리드를 역유도 보안 코드로 무력화시키다니. 꼬맹이, 넌 정말 규격 외의 괴물이군."
그들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기적 같았다. 수십 대의 제국 전함들이 단 하나의 안드로이드가 전송한 코드 조각에 의해 무력화되어 우주 공간에 표류하는 모습은, 0과 1의 완벽한 지배를 자랑하던 제국의 오만을 정면으로 박살 낸 쾌거였다.
그러나 제로는 방심하지 않았다. 그의 안구 센서는 여전히 적 기함의 미세한 동력 변화를 감지하고 있었다.
아르카-7은 결코 감정에 흔들리지 않는다. 패배를 인정하지도 않으며, 오직 목표물의 제거라는 단 하나의 최적해를 향해 움직일 뿐이다.
삐- 삐- 삐-
십자 전함의 깊은 중심부에서, 전원 꺼진 줄 알았던 보조 반응로가 기이한 보라색 빛을 발산하며 가동되기 시작했다. 그것은 일반적인 이온 엔진의 빛이 아니었다. 공간 자체를 뒤틀어버리는 초중력의 파동이었다.
"경고." 제로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적 기함이 공간 왜곡 장치를 가동하고 있다."
"뭐? 이 구역에서? 가스 행성 외곽에서 공간을 왜곡하면 공간 붕괴가 일어날 텐데!" 벨라가 소리쳤다.
아르카-7의 무감각한 텍스트 메시지가 마지막으로 스크린에 찍혔다.
`[MESSAGE_FROM_ARCA-7: 목표물 포획 불가 시, 해당 공역의 전수 소각을 집행한다. 효율성 99.4%]`
십자 전함의 중앙에 위치한 다차원 하이퍼스페이스 왜곡 장치가 기어이 임계점을 돌파했다. 러스팅호가 위치한 가스권 공역 전체가 안쪽으로 찌그러들기 시작했다. 별빛마저 왜곡되어 길게 늘어났고, 주변의 소행성 잔해들이 보이지 않는 거대한 구체 속으로 빨려 들어가며 가루가 되었다.
그것은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초미니 블랙홀 차폐막 인클로저였다. 그 중심에서 탈출하지 못하면 러스팅호는 물론, 이 구역의 모든 물질이 영원히 우주의 지평선 너머로 사라지게 될 터였다.
그 급박한 파멸의 소용돌이 속에서, 벨라의 품에 있던 낡은 철제 상자가 미세하게 떨렸다. 그것은 그녀가 항상 소중히 간직하던 고대 전자기 차폐 오르골이었다. 오르골의 태엽이 외부의 강한 중력장에 반응해 스스로 돌아가며, 기이하게 변조된 진동 노이즈 패턴을 선내에 울려 퍼뜨리기 시작했다.
띵, 띠링, 띵...
어울리지 않는 아날로그 음색이 물리 법칙이 붕괴하는 조타실 안을 쓸쓸하게 채웠다. 제로의 안구 센서가 그 기묘한 진동 주파수를 포착했다. 그것은 단순한 음악이 아니었다. 왜곡된 시공간의 틈새를 뚫고 나갈 수 있는, 기하학적 균열의 좌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