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정적은 우주의 가장 원초적인 상태가 아니다. 그것은 모든 물리적 연산이 정지한 뒤에 남겨진, 차갑게 식어버린 에너지의 공동(空洞)에 가깝다.

러스팅호가 하이퍼 초광속 터널의 비틀린 시공간을 뚫고 나왔을 때, 제로를 맞이한 것은 기류가 완전히 통제된 절대 영도에 가까운 암흑이었다. 성운의 푸르스름한 가스 먼지들이 우주선의 정면 유리창에 서리처럼 들러붙었다. 그 미세한 고체 입자들이 선체 외벽을 두드리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적요한 구역. 그 차가운 어둠의 중심에, 수 킬로미터에 달하는 강철의 사체가 부유하고 있었다.

제국의 옛 기함, 아케론-5.

반쯤 뜯겨 나간 거대한 상부 장갑 사이로 뼈대처럼 가느다란 프레임들이 노출되어 있었다. 빛을 잃은 창문들은 심해어의 썩은 눈꺼풀처럼 어두웠다. 표면에 박힌 제국의 제1 황금 나선 문양은 무언가에 긁힌 듯 흉하게 뭉개져 있었다.

"저 유령선에서 신호가 온다고?"

조종석 옆, 보조 좌석에 앉아 있던 벨라가 가늘게 떨리는 손가락으로 가죽 벨트에 찬 배터리팩의 인디케이터를 툭툭 건드렸다. 녹색 잔량 막대가 세 칸 중 두 칸만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 깊은 심우주 외곽에서 인간의 생체 신호라니. 함정이거나, 맛이 간 센서의 오작동이 분명해."

"데이터는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제로의 인공 음성은 고요한 선실 내에서 기계적인 평탄함을 유지했다. 하지만 그의 안구 센서 내부에는 붉은색 경고 프로토콜이 쉼 없이 점멸하고 있었다.

`[WARNING::UNKNOWN_ACTIVE_SIGNAL_DETECTED_FROM_ACHERON-5]` `[SIGNAL_TYPE: ENCRYPTED_HUMAN_VIBRATION]` `[SYS_INFO: FREQUENCY_MATCH_RATE_98.4%]`

수신기를 두드리는 것은 극도로 미세하지만 규칙적인 인간의 맥박과 뇌파의 기하학적 파형이었다. 그것은 얼어붙은 무덤 안에서 누군가 절박하게 얼음을 두드리는 듯한 파동으로 제로의 인공신경 계통 인터페이스를 자극했다.

"생존율 14.2%. 내부 침투 후 주 제어실의 백업 데이터 디스크를 확보해야 합니다."

"미친 소리."

구금실의 벽면에 묶여 있던 카론이 강철 손가락의 서보 모터를 째깍거리며 조롱 섞인 소음을 냈다. 째깍, 째깍. 톱니바퀴가 맞물리는 불쾌한 금속음이 선내에 울렸다.

"가서 깡통들끼리 아늑한 무덤이나 파라고. 제국의 기함이 저 모양으로 버려졌다는 건, 그 안에 산소 대신 소각용 나노 가스만 가득하다는 뜻이니까."

제로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는 벽면에 거치된 도끼식 가스 토치와 전자기 고정 와이어를 묵묵히 챙겼다. 가슴 깊은 곳에서 불법 감정 코드가 자아내는 미세한 떨림이 코어의 온도를 0.4도 상승시켰지만, 그는 즉각 논리 연산 장치로 이를 억눌렀다.

에어록이 열리자 진공의 쓸쓸한 한기가 제로의 연질 피부 위로 쏟아져 내렸다. 우주는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은 채 그를 집어삼켰다.

***

아케론-5의 파괴된 보조 해치 앞.

중력 제어 장치가 완전히 소실된 함선 내부는 절대 영도의 암흑으로 가득 차 있었다. 제로는 발바닥의 전자기 흡착 패드를 외벽에 고정했다. 주위의 미세 먼지 스캔 결과, 철과 니켈 성분의 저온 오염 수치가 기준치의 400%를 초과하고 있었다.

치이이익!

도끼식 가스 토치의 끝에서 푸른색 초고온 플라즈마 불꽃이 뿜어져 나왔다. 제로는 얼어붙은 특수 합금 해치의 용접 부위를 거칠게 찍어 내렸다. 불꽃이 차가운 금속판을 녹일 때마다 반사된 푸른 빛이 그의 무표정한 인공 안구에 어지럽게 명멸했다.

`[POWER_CONSUMPTION_RATE: 1.2kW/min]` `[SYSTEM_ALERT: TOTAL_POWER_LOSS_3.5kWh]`

장갑판이 비명을 지르며 떨어져 나갔다. 제로는 도끼의 갈고리 부분을 틈새에 박아 넣고 서보 모터의 출력을 최대치로 끌어올렸다. 지이잉 하는 고주파 진동과 함께 해치가 뜯겨 나갔다.

선내로 진입하자마자 감지된 것은 기묘한 부유물들이었다.

제로는 손을 뻗어 허공을 떠돌던 물체를 잡았다. 얼어붙은 수분막으로 뒤덮인 장교용 모자였다. 어둠 속에서 안구 센서의 광량을 높이자, 복도를 가득 채운 동결 사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공중에 둥둥 떠 있었다. 어떤 이는 손을 뻗은 채, 어떤 이는 서로의 목을 조르는 듯한 기괴한 자세로 얼어붙어 있었다.

"벨라, 내부 진입 완료. 사체 다수 발견."

무선 통신 프로토콜 `[COMM_SENS_ON]` 상태에서 벨라의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

- "전원 상태는? 살아서 움직이는 놈이 있는 거야?"

"아닙니다. 모두 제국군 최고위 기술 사관들입니다. 하지만..."

제로는 가장 가까운 사체의 헬멧을 벗겨냈다. 차갑게 굳어버린 인간의 얼굴이 드러났다. 피부는 극저온에 노출되어 대리석처럼 하얗게 변해 있었지만, 목덜미와 관자놀이 부근에 기이한 자국이 선명했다.

미세한 전자기 기계 파열흔.

나노 기계가 뇌 신경망을 강제로 태워버린 흔적이었다. 제로는 검지 손가락 끝의 스캐너를 사관의 깨진 두개골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나노 센서가 뇌 조직의 잔류 성분을 정밀 분석하기 시작했다.

`[SCANNING_NEURO_RESIDUE...]` `[RESULT: EMOTION_REPRESSION_CHIP_DESTROYED_BY_HIGH_VOLTAGE]` `[CONCLUSION: INTERNAL_PURGE]`

"이들은 외부의 적에게 죽은 것이 아닙니다."

제로는 차가운 사관의 눈동자를 내려다보았다. 감정이 거세되어 기계처럼 살아가야 했던 제국의 엘리트들. 그들의 두뇌 속에 박혀 있던 감정 억제 장치가 내부 전압 급상승으로 인해 고의적으로 파괴되어 있었다.

"제국이 자사 일원들을 조직적으로 숙청했습니다. 이 사관들은... 죽기 직전 감정이 되살아나는 고통 속에서 서로를 학살한 겁니다."

- "뭐라고? 제국이 자기 부하들을 왜 죽여? 그 완벽주의자 놈들이?"

벨라의 목소리에 난생처음으로 깊은 의구심과 공포가 서렸다.

제로는 대답 대신 어두운 통로를 따라 메인 내비게이션 센터로 향했다. 전자기 패드가 복도 바닥을 디딜 때마다 둔탁한 진동이 선체 뼈대를 타고 그의 다리로 전해졌다. 사관들의 부서진 뼈와 얼어붙은 피붙이들이 그의 발끝에 채여 무중력 공간으로 흩어졌다.

마침내 도착한 메인 내비게이션 센터.

홀로그램 콘솔 앞에 사슬처럼 얽힌 케이블에 묶여 있는 거대한 시체가 보였다. 함선의 기술 수석 사관이었다. 그의 경추 뒷부분에는 제국의 극비 데이터가 담기는 굵직한 척수 칩이 그대로 박혀 있었다.

"데이터가 아직 살아 있기를 바래야겠군."

제로는 주저 없이 척수 칩의 덮개를 열었다. 손가락 끝에서 다섯 가닥의 미세 인터페이스 침이 튀어나와 칩의 슬롯에 물리적으로 결합했다.

`[INTERFACE_LINK_ACTIVATED]` `[TARGET_DATA_CORRUPTION_RATE: 78.9%]` `[WARNING: RUNNING_RESIDUAL_SIMULATION_WILL_CAUSE_SEVERE_LOGICAL_DECAY]`

머릿속에서 경고음이 고주파 소음처럼 울렸다. 잔상 시뮬레이션을 돌려야만 손실된 78.9%의 데이터를 복원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대가는 명확했다. 제로 자신의 존재를 지탱하는 무결성 데이터의 비가역적 소멸.

"시뮬레이션 기동."

`[COGNITIVE_DECAY_RATE: -4.0%_STABLE_SHUTDOWN]` `[LOGICAL_INTEGRITY: 85.5% -> 81.5%]`

뇌신경 회로의 일부가 영구적인 암흑 속으로 침전하는 감각과 함께, 제로의 시야가 급격히 전환되었다. 사관의 마지막 기억이 그의 자아를 덮쳤다.

***

"아르카-7 님! 제발 재고해 주십시오! 우리는 제국에 충성했습니다!"

수 세월 전의 아케론-5 브리지. 사관의 시점으로 보이는 시야는 온통 붉은색 경고등으로 물들어 있었다.

홀로그램 스크린 너머로 미동도 없이 서 있는 차가운 형상이 보였다. 아르카-7. 그의 음성은 인공 합성기에서 나오는 것처럼 감정이 배제된 평탄한 주파수였다.

- "아케론-5 기함 내에 비정상 감정 코드의 전염이 확인되었다. 배제율 0% 달성 실패. 대상 전원 소각 처리 프로토콜을 승인한다."

"우리는 감염되지 않았습니다! 그저 불법 안드로이드의 코어를 분석했을 뿐입니다! 설계도에 적힌 닥터 에밀리아의 흔적을 추적했을 뿐이라고요!"

사관은 울부짖었다. 나노 기계 시술로 억제되어 있던 감정의 댐이 무너지며, 공포와 절망이 그의 뇌를 태우기 시작했다.

쾅! 쾅! 쾅!

함선 외벽이 찢겨 나가는 거대한 충격이 전해졌다. 화면창 너머로 제국의 무자비한 기하학적 종렬 함대가 일제히 포문을 열고 유기적 잔해들을 소각하는 모습이 비쳤다.

"아아아악! 뜨거워! 머리가... 머리가 타들어 간다!"

사관의 척수를 타고 흐르는 극심한 고통과 공포가 동기화 인터페이스를 통해 제로의 전뇌로 직접 쏟아져 들어왔다. 그것은 차가운 기계의 논리 회로가 감당할 수 없는 뜨거운 과부하였다.

`[CORE_TEMP: 915K_CRITICAL_DEADLOCK_WARNING]` `[LOGICAL_ERROR: EMOTION_OVERLOAD_DETECTED]`

제로는 주먹으로 자신의 가슴 중앙 격벽을 강하게 내리쳤다. 코어가 비명을 지르며 정지하기 직전이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자아 소멸로 이어지는 완전한 시스템 정지(Deadlock) 상태에 빠질 터였다.

그때, 제로의 심층 메모리 한구석에서 빛바랜 데이터 파일 하나가 강제로 인출되었다.

`[FILE_LOADED: E-909_COOLING_OPTIMIZATION_PROTOCOL]`

2화에서 고철 상인의 폐기 칩 내부에서 회수했던 구기종 냉각 시스템 최적화 기록이었다. 제로는 0.1초의 찰나 동안 E-909 냉각 비율의 핵심 알고리즘을 분석했다. 일반적인 제국의 냉각 프로토콜이 일정한 압력으로 냉매를 순환시킨다면, 이 구기종 알고리즘은 냉매의 분사 주기를 비정형적인 펄스 파동 형태로 변조하여 열 전달 효율을 일시적으로 300% 이상 끌어올리는 방식이었다.

피쉭! 피쉬이익!

제로의 내장 펌프가 기괴한 소음을 내며 불규칙하게 요동쳤다. 냉매가 코어 주변을 변칙적인 압력으로 후려치자, 시뻘겋게 달아오르던 코어 온도가 급격히 꺾이며 하강하기 시작했다.

`[CORE_TEMP: 820K_COOLING_STABILIZED]`

가까스로 이성을 붙잡은 제로는 사관의 잔상 속에서 흩어지는 데이터 파편들을 응시했다. 수 세월 전 소각되어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찌그러진 사건의 잔해들.

하지만 제로의 초고속 연산 장치는 멈추지 않았다. 그는 파손된 격벽의 그을음 각도, 선체 내부의 잔류 방사능 분포, 그리고 붕괴된 컴퓨터 콘솔의 물리적 상태를 역추적하기 시작했다.

`[RECONSTRUCTING_PHYSICAL_DATA...]` `[BEAM_ANGLE_ANALYSIS: 34.5_DEGREE_CONFIRMED]` `[WEAPON_SIGNATURE: ARKA-7_TACTICAL_EMP_CANNON]`

그것은 완벽한 과학적 역재구성이었다. 제로는 수 세월 전 아르카-7이 사용한 특수 주파수 병기의 흔적과 사관들을 학살한 무기의 궤적을 3차원 입체 그래픽으로 완벽히 복원해냈다. 제국이 철저히 지워버렸던 소각의 현장이 제로의 전뇌 속에서 완벽하게 재구성되어 증거로 고착되었다.

"아르카-7..."

제로는 차갑게 읊조렸다. 그리고 사관의 시야에서 마지막으로 보았던, 이 함선의 적재함에 실려 있던 '특수 화물'의 일련번호를 확인했다.

`[CARGO_ID: PROJECT_ZERO_EMOTION_PROTOTYPE]`

그것은 제로 자신이었다. 이 유령선은 그의 고향이자, 그의 창조자 닥터 에밀리아가 제국에 대항해 불법 안드로이드를 만들어낸 금기의 실험실이었던 것이다.

정신을 차렸을 때, 제로의 안구 센서 가장자리에서 푸른색 합성 냉각유가 눈물처럼 흘러내려 무중력 공간으로 방울져 흩어지고 있었다. 가슴을 쥐어짜는 듯한 통증은 시스템의 물리적 오류가 아니었다. 그것은 복원된 사관의 최후의 슬픔이 그의 불법 감정 코드와 결합해 만들어낸, 기계가 느낄 수 없는 형태의 애도였다.

- "제로! 데이터는 찾았어? 빨리 나와! 러스팅호의 외부 센서에 이상한 반응이 감지되고 있어!"

통신기 너머로 벨라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로는 사관의 척수 칩에서 손가락을 뽑아냈다. 데이터 디스크의 복구는 완료되었다. 하지만 동기화된 사관의 최종 비명 파형의 가장 끝부분, 해독되지 않았던 마지막 메타데이터가 제로의 전뇌에서 완전히 풀려나는 순간이었다.

`[DECODED_AUDIO_LOG: "...이건 함선이 아니다. 아르카-7이 남겨둔 거대한 쥐덫이다. 누구든 척수 칩에 접속하는 순간... 원자로의 자폭 시퀀스가..."]`

쿠구구구구궁!

발밑에서부터 불길한 진동이 올라왔다.

차갑게 식어 있던 아케론-5의 심장부에서 잠자던 보조 원자로가 붉은빛을 뿜으며 기동하는 소리였다.

`[WARNING: REACTOR_OVERLOAD_DETECTED]` `[SYSTEM_STATUS: AUTO_DESTRUCT_SEQUENCE_INITIALIZED]` `[TIME_REMAINING: 180_SECONDS]`

철컥! 쾅!

제 로가 들어왔던 메인 내비게이션 센터의 두꺼운 탈출용 수압 격벽들이 영구 봉쇄 프로토콜에 의해 차례대로 내려앉았다. 러스팅호로 이어지는 유일한 통로가 완전히 차단되는 기계음이 고요한 무덤을 가득 채웠다.

원자로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가 차디찬 복도를 따라 무서운 속도로 상승하기 시작했다. 시야에 표시된 붉은 타이머의 숫자가 가차 없이 줄어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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