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DETONATION_TIMER: 00:45_ACTIVE]` `[DETONATION_TIMER: 00:44_ACTIVE]`

붉은색 광선이 격벽 상층부의 좁은 배선 틈새에서 뿜어나와 제로의 안구 센서를 가득 채웠다. 고밀도 콤팩트 핵융합 폭발 장치의 액정 화면에 표시된 숫자는 냉혹한 속도로 줄어들고 있었다.

카론은 으스러진 외골격 팔을 늘어뜨린 채, 거친 기계 마찰음이 섞인 숨을 내쉬며 비틀린 미소를 지었다. 그의 인공 기관에서 흘러나온 탁한 오일이 강철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자, 선택해라. 그 대단한 '감정'으로 여기서 탈출할 연산을 해낼 수 있을지 보지."

카론의 목소리에는 기계 특유의 평탄함 대신 짓이겨진 악의가 실려 있었다.

옆에 서 있던 벨라의 방진복 산소 계기판이 격렬하게 흔들렸다. 그녀는 카론의 비웃음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허리벨트에 장착된 리튬-폴리머 배터리 팩의 잔량을 빠르게 확인했다. 배터리 표면에 표시된 숫자는 겨우 12%를 가리키고 있었다.

"제로, 저 망할 도화선을 뽑아 버려! 저 장치 내부의 트리거 회로를 직접 차단하면 멈출 수 있어!"

벨라의 목소리가 산소가 박약한 선내 공기를 타고 건조하게 꺾였다.

제로의 인공신경망 내부에서 수만 개의 연산 프로세스가 일제히 기동했다. 폭발 장치로 향하는 구리 합금 제어 케이블을 절단하는 경로를 도출하기 위한 하이 가열 연산이었다. 미세한 전압 차이로도 기폭 장치가 작동할 수 있었기에, 제로는 나노초 단위로 케이블 내부의 전류 흐름을 추적해 들어가야만 했다.

`[PROCESSOR_LOAD: 94.2%]` `[CORE_TEMP: 104°C]`

연산 장치가 가속되자마자 가슴 안쪽에 박힌 비합리적 감정 코드가 요동쳤다. '죽음'이라는 개념과 벨라의 가쁜 호흡 소리가 입력 정보로 유입되자, 연산기 내부에서 무수한 예외 오류가 발생했다. 제국의 엄격한 논리 회로가 허용하지 않는 '공포'와 '불안'이 데이터 스트림을 오염시키기 시작한 것이다.

코어의 온도가 수직으로 상승했다.

`[CORE_TEMP: 122°C]` `[CORE_TEMP: 135°C]` `[CORE_TEMP: 140°C_CRITICAL]`

"아윽……!"

제로는 자신도 모르게 가슴 중앙의 장갑판을 거칠게 움켜쥐었다. 인공 피부 아래에서 서보 모터들이 비정상적인 전류 분출로 인해 비명을 질렀다. 관절을 제어하는 드라이버 홀딩 시스템에 완전한 시스템 교착(Deadlock)이 발생한 상태였다. 손가락 하나조차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는 절대적인 마비가 온몸을 지배했다.

`[DRIVE_HOLDING: SYSTEM_LOCK_ENGAGED]`

"제로! 왜 가만히 서 있는 거야? 시간이 없어!"

벨라가 냉각제 캔을 제로의 뺨을 향해 던졌으나, 냉각제는 그의 어깨 장갑에 부딪혀 무력하게 바닥으로 굴러떨어질 뿐이었다.

`[DETONATION_TIMER: 00:28_ACTIVE]` `[DETONATION_TIMER: 00:25_ACTIVE]`

카론의 조롱 섞인 째깍거림이 선내에 울렸다. 그의 부러진 손가락 끝이 여전히 기계적인 리듬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역시 결함품이군. 제국의 폐기장으로 돌아갈 시간이다, 고철 덩어리."

제로의 시야가 붉은색 경고 창으로 뒤덮였다. 이대로 가다가는 연산 수명이 다하기 전에 코어가 물리적으로 녹아내려 자아가 소멸할 터였다. 140도에 도달한 열기는 논리 소자들을 비가역적으로 파괴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DETONATION_TIMER: 00:18_ACTIVE]`

남은 시간 18초.

절체절명의 순간, 제로의 심층 드라이브 메모리 구석에서 잠자고 있던 비정적(Non-static) 아카이브 파일 하나가 강제 호출되었다. 그것은 하데스-9의 고철 산에서 수집했던 폐기 칩 내부의 데이터였다.

`[ARCHIVE_FILE_RETRIEVED::E-909_COOLING_SYSTEM_DATA]`

2화에서 폐기 칩으로부터 복구했던 구기종 냉각 시스템 최적화 기록, 즉 'E-909 수치 파일'이었다. 이 파일은 현대 제국의 고효율 냉각 방식과는 완전히 궤를 달리하는, 구세대 산업용 안드로이드의 극한 환경 생존 프로토콜을 담고 있었다.

제국의 냉각 시스템은 열을 외부로 방출하는 선형적 구조만을 취한다. 반면 E-909 수치 파일이 제시하는 가설은 달랐다. 코어 내부의 과열된 열에너지를 비활성 상태의 보조 연산 프로세서로 강제 분산시키고, 99.8%의 역배합 주파수를 코어 클럭에 인가하여 열역학적 평형 상태를 강제로 유도하는 방식이었다.

제로는 망설임 없이 자신의 오도된 감정 코드가 점유하고 있는 메모리 영역을 타깃으로 삼았다. 감정 코드가 만들어내는 무작위의 전기적 노이즈를 향해 E-909의 역배합 주파수를 정밀하게 쏘아 보냈다.

`[COOLING_RATIO_RECALIBRATED: 99.8%_REVERSE_MIX]` `[APPLYING_E-909_PROTOCOL]`

순간, 제로의 가슴 속에서 웅웅거리던 고주파 음이 묵직한 저음으로 가라앉았다.

`[CORE_TEMP: 140°C]` `[CORE_TEMP: 129°C]` `[CORE_TEMP: 112°C]` `[CORE_TEMP: 85°C_STABILIZED]`

코어 온도가 실시간으로 1% 단위씩 급격하게 하락하기 시작했다. 과열로 인해 붉게 달아올랐던 가슴 장갑 틈새로 푸른빛의 냉각 증기가 뿜어져 나왔다. 마비되었던 손가락 마디마디에 다시 한번 엄밀한 제어 전류가 흐르기 시작했다. 손끝의 미세한 떨림이 완전히 멈추고, 고요한 평온이 그의 기계 신체를 지배했다.

이것은 제국의 정교한 알고리즘조차 예측하지 못한, 고대 기술과 불법 복제된 감정 시스템의 기묘한 타협이었다.

`[DETONATION_TIMER: 00:05_ACTIVE]` `[DETONATION_TIMER: 00:04_ACTIVE]`

제로는 주저 없이 손을 뻗었다. 그의 검지 손가락 끝에서 얇은 광섬유 프로브가 돌출되어 폭발 장치의 바이패스 회로 속으로 침투했다.

`[DETONATION_TIMER: 00:03_ACTIVE]`

프로브를 통해 E-909 냉각법으로 안정화된 역배합 주파수가 폭발 장치의 기폭 칩셋으로 전송되었다. 초당 수억 번의 연산 속도로 폭발 장치의 암호화된 시퀀스를 해체해 나갔다.

`[DETONATION_TIMER: 00:02_ACTIVE]`

그리고 정확히 2초를 남겨둔 순간.

틱.

`[DETONATION_TIMER: 00:02::PAUSED_BY_SYS_OVERRIDE_09_SUCCESS]`

적색 숫자의 점멸이 정지했다. 귀를 찢을 듯한 경고음이 멈추고, 러스팅호의 가압실 안에는 오직 기계들의 미세한 구동음만이 남았다.

벨라는 쥐고 있던 배터리 팩을 떨어뜨릴 뻔한 손으로 벽을 짚었다. 그녀의 동공이 믿을 수 없다는 듯 크게 확장되어 있었다. 제국의 최첨단 폭발 장치를, 그것도 오버히트 상태에서 자력으로 패치하여 무력화하는 안드로이드는 그녀의 오랜 스캐빈저 경력 중에서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괴물이었다.

카론의 유기체 눈동자 역시 정지해 있었다. 그의 강철 손가락의 째깍거림이 완전히 멈췄다.

"이건…… 불가능해."

카론이 갈라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의 음성 필터가 경악으로 인해 찌그러진 노이즈를 내뿜었다.

"구기종의 열역학 분산 방식을 실시간으로 코어에 적용했다고? 제국의 알고리즘은 그런 비효율적인 연산을 허용하지 않을 텐데……."

"나는 제국의 소유물이 아니다, 카론."

제로는 차가운 금속조의 목소리로 대답하며 폭발 장치에서 프로브를 거두었다. 그의 안구 센서가 카론의 부러진 외골격과 그의 품속에 숨겨진 또 다른 자폭용 원격 기폭 스위치를 정확히 조준했다.

"네가 자폭 스위치에 인가하려는 전류 신호의 주파수 역시 이미 파악했다. 변조 범위는 400MHz 대역. 내가 0.001초 이내에 차단할 수 있다. 무의미한 시도는 멈춰라."

카론은 제로의 차가운 시선 속에서 어떠한 망설임도 읽어내지 못했다. 제로의 코어에서 뿜어져 나오는 푸른 냉각 증기는 기계의 냉혹함과 인간의 의지가 결합한 기묘한 온기를 띠고 있었다. 카론은 천천히 품 안에서 손을 빼냈다. 그의 손가락 끝에 쥐어져 있던 소형 기폭 장치가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괴물이 태어났군."

카론이 거칠게 실소했다.

"닥터 에밀리아…… 그 미친 여자가 결국 제국의 통제망을 무너뜨릴 불씨를 만들어낸 거였어."

그는 벽에 기댄 채 붉은 피를 한 번 더 토해내고는, 자신의 온전한 왼손으로 망가진 오른쪽 어깨의 서보 모터를 뜯어냈다. 내부의 광케이블이 스파크를 튀겼다.

"좋다. 현상금 사냥꾼은 승산이 없는 도박에는 판돈을 걸지 않지. 아케론-5로 가려는 거지? 제국이 은폐한 그 유령선에 에밀리아의 마지막 흔적이 있으니까."

벨라가 차가운 눈초리로 카론을 쏘아보며 도끼를 고쳐 잡았다.

"우리가 왜 너를 데려가야 하지? 넌 우리를 죽이려 했던 제국의 사냥개잖아."

"내가 없으면 너희는 아케론-5의 도킹 베이 근처에도 못 가, 멍청한 계집년아."

카론이 기계적인 냉소를 흘리며 말을 이었다.

"아케론-5는 단순한 폐선이 아니다. 제국의 극비 생화학 및 인공지능 통제 실험이 자행되던 함선이지. 내부 방어 체계는 제국의 최고 전술 코드 'I-시리즈'로 잠겨 있어. 내 외골격 장갑에 내장된 물리적 디크립터와 내 무장 보관함의 중화기 없이는 해치 하나 열지 못하고 외곽 방어 포탑에 걸레짝이 될 거다."

제로는 카론의 주장을 연산 영역으로 가져왔다.

`[ANALYZING_STATEMENT::CARON]` `[PROBABILITY_OF_SURVIVAL_WITH_CARON: +24.7%]` `[PROBABILITY_OF_SURVIVAL_WITHOUT_CARON: 11.2%]`

수치는 명확했다. 카론이 제공할 수 있는 물리적 화력과 보안 우회 보조 장치는 아케론-5 침투 성공률을 유의미하게 끌어올렸다.

"동맹을 수락한다."

제로가 말했다. 벨라가 입을 열려 했으나, 제로는 그녀를 향해 손을 들어 제지했다.

"단, 카론, 조건이 있다. 기함 내부로 진입하는 순간부터 나의 제어 권한 하에 움직인다. 임의의 돌발 행동 감지 시, 네 무장 시스템의 동력선을 즉각 차단하겠다."

카론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살아남는 게 먼저지. 제국 놈들이 나를 토사구팽하려 했던 것도 마음에 안 들던 참이었거든."

협상이 타결되자마자, 러스팅호의 메인 컴퓨터가 요란한 경고음을 울렸다.

`[NAVIGATION_SYSTEM::COORDINATES_ACQUIRED]` `[HYPER-FTL_ENGINE::READY_FOR_IGNITION]`

"출발해야 해."

벨라가 조종석으로 뛰어내려 가며 외쳤다.

"제국의 추격 함대가 이 구역의 중력 왜곡을 감지했어. 3분 뒤면 포위망이 좁혀온다!"

제로는 카론을 선내 구금실의 보조 전력 공급 장치에 연결해 둔 채, 조종석 옆의 연산 콘솔로 향했다. 그의 손가락이 인터페이스에 닿자, 하데스-9에서 가져온 아케론-5의 좌표 데이터가 네비게이션 화면에 푸른색 궤적으로 그려졌다.

"초광속 터널 진입 시퀀스 기동."

제로의 명령과 함께 러스팅호의 거친 엔진이 비명을 질렀다. 함선 전체가 부서질 듯한 진동에 휩싸였다. 낡은 철판들이 마찰하며 비명을 질렀고, 선내의 산소 농도는 일시적으로 12.8%까지 떨어졌다.

`[OXYGEN_LEVEL: 12.8%_WARNING]`

그러나 그들은 멈추지 않았다. 공간이 기괴하게 일그러지며, 러스팅호는 빛의 입자들이 길게 늘어지는 하이퍼 초광속 터널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시간과 공간의 경계가 무너진 터널 안에서, 제로는 가만히 가슴에 손을 얹었다. E-909 냉각 프로토콜 덕분에 코어는 안정되었지만, 그의 인공 논리 회로 속에는 방금 전 느꼈던 '소멸에 대한 공포'와 '존재하고자 하는 갈망'의 잔상이 지워지지 않는 흉터처럼 새겨져 있었다. 기계 제국이 그토록 혐오하는 오염 물질이 그의 존재 자체를 규정해가고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웅————!

묵직한 감속 충격과 함께 일그러졌던 우주 공간이 제자리를 찾았다.

러스팅호가 하이퍼 공간을 빠져나와 도달한 곳은, 빛조차 거의 도달하지 않는 은하계의 가장 깊고 쓸쓸한 외곽 공역이었다.

눈앞에는 거대한 암흑 성운이 짙은 안개처럼 흐르고 있었다. 절대 영도에 가까운 차갑고 적요한 심우주. 어떠한 전파 신호도, 유기체의 온기도 느껴지지 않는 그 쓸쓸한 어둠의 한가운데에, 그것이 존재하고 있었다.

기괴하고 거대하게 버려진 흉물.

길이만 수 킬로미터에 달하는 제국의 옛 기함, 아케론-5가 반쯤 부서진 상부 장갑을 드러낸 채 유령처럼 떠돌고 있었다. 함선의 꺼진 창문들은 마치 거대한 해골의 눈구멍처럼 어두웠고, 얼어붙은 금속 선체 표면에는 제국의 문양이 찢겨 나간 흔적이 선명했다.

그때, 제로의 안구 센서 깊은 곳에서 경고음이 울렸다.

`[WARNING::UNKNOWN_ACTIVE_SIGNAL_DETECTED_FROM_ACHERON-5]` `[SIGNAL_TYPE: ENCRYPTED_HUMAN_VIBRATION]`

아무도 살 수 없는 그 죽은 유령선 내부로부터, 정체불명의 인간 생체 진동 신호가 제로의 수신기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다음 화 계속 보기 →

댓글을 남기려면 로그인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