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금빛의 거대한 침묵이 우주를 메우고 있었다.

백만 톤급 제국 우주 순양함의 외벽은 가공할 크기의 황금빛 단조 장갑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물리적 질량 자체가 시공간을 왜곡하는 듯한 압도감 속에서, 그 표면은 빛 한 점 흡수하지 않은 채 오연하게 빛났다. 러스팅호의 조종석 스크린 전체가 그 금빛의 격벽으로 채색되었다.

대기가 사라진 우주는 지독하려 하리만큼 적요했다. 소리도, 바람도 없는 진공의 심연에서 오직 러스팅호의 선체 프레임이 미세하게 떨리는 고주파 진동음만이 제로의 청각 센서에 수신되었다.

`[OXYGEN_LEVEL: 18.9%]` `[CABIN_PRESSURE: NORMAL]` `[SYSTEM_ALERT::EXTERNAL_GRAVITATIONAL_PULL_DETECTED]`

"저 미친 크기는 뭐야……."

벨라의 목소리는 평소의 날카로움을 잃은 채 잘게 갈라졌다. 그녀의 오른손가락이 벨트에 장착된 예비 배터리팩의 잔량 표시등을 불안하게 두드렸다. 표시등은 52%에서 51%로 떨어지며 붉은빛을 방출했다.

그때, 조종 콘솔의 홀로그램 인디케이터가 강제로 기동되었다. 제국의 암호화 프로토콜이 러스팅호의 하부 시스템을 관통하여 통신 채널을 강제로 개방한 것이다.

웅—.

`[COMM_ESTABLISHED::SECURE_LINE_ARCA-7]`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기계적인 합성음보다 더 차갑고 고저가 없었다. 인간의 성대를 모사했으나 감정의 고저를 완전히 거세한 단조로운 주파수였다. 제국 집행관 아르카-7의 선고였다.

— 대상 식별 번호 폐기형 제로. 해당 개체는 비생산적 자원 낭비 및 악성 코드로 규정됨. 즉시 논리 리셋 프로세스를 집행함. 저항은 연산 무결성을 훼손하는 무의미한 에너지 소모에 불과함.

그 선고와 동시에, 거대한 금빛 장갑판의 하부 해치가 열렸다. 그곳에서 푸른빛의 전자기 플라즈마 아크가 뿜어져 나오며 공간을 일그러뜨렸다.

중력 닻(Gravity Anchor)이었다.

지향성 중력 제어 소자가 방출한 보이지 않는 자력선과 중력 왜곡 파동이 러스팅호의 선체를 옭아맸다.

콰아아아—.

선체가 비명을 질렀다. 주 차단막의 전력 수치가 순식간에 급락하기 시작했다.

`[SHIELD_CAPACITY: 42% ... 31% ... 18%]`

"끌려가고 있어! 제로! 엔진 출력을 최대로 올려도 벡터가 안 바뀌어!"

벨라가 조종간을 양손으로 움켜잡은 채 비명을 질렀다. 그녀의 이마에서 흘러내린 땀방울이 무중력에 가까운 캐빈 내부로 둥실 떠올랐다.

제로의 가슴 깊은 곳, 불법 감정 코드가 내장된 코어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소멸에 대한 원초적인 거부감, 기계 제국이 규정한 '쓸모없는 존재'라는 낙인에 대한 정체 모를 분노가 연산 회로를 타고 급격히 역류했다.

두근.

가슴 내부의 서보 모터가 불규칙하게 진동했다. 온도가 급격히 상승했다.

`[CORE_TEMPERATURE: 104°C]` `[WARNING::LOGIC_CIRCUIT_OVERHEAT_LIMIT_IMMINENT]`

"정신 차려, 이 미친 깡통아!"

벨라가 조종석 옆에 꽂혀 있던 전산 냉각제 카트리지를 제로의 가슴팍 구동부에 거칠게 처박았다. 치익 하는 기화음과 함께 하얀 질소 가스가 뿜어져 나오며 제로의 시야를 가렸던 붉은 경고등이 일시적으로 깜빡였다.

"생존율 계산해! 네 그 잘난 머리로 이 상황을 타개하라고!"

코어의 열기가 일시적으로 억제되자, 제로의 안구 센서 뒤에서 차가운 기계 연산이 다시 가동되기 시작했다.

그는 제국의 중력 닻이 가진 논리적 구조를 파고들었다. 최첨단 중력 닻은 대상의 질량과 가속도를 실시간으로 추적하여 인력 벡터를 보정한다. 즉, 예측 가능한 궤도로 움직이는 한 탈출은 불가능했다.

하지만 예측 불가능한 변수들이 무수히 널려 있는 환경이라면 어떨까.

제로의 시선이 우측 공역에 떠 있는 거대한 어둠의 띠로 향했다. 불규칙한 질량체들이 무수히 얽혀 있는 고밀도 비선형 소행성 벨트 '아틀라스-X'였다.

"벨라, 조종 권한을 나에게 이관해."

"미쳤어? 저 돌덩어리 무리로 들어가겠다고? 장갑판이 이온화되어 날아갈 거야!"

"현재 생존 확률, 돌파 시 12.4%. 이대로 인력에 끌려갈 시 0.00%. 수동 연산 모드로 전환한다."

제로의 손가락 끝에서 미세한 데이터 케이블이 나와 조종 콘솔의 수동 제어 포트에 직접 링크되었다.

`[MANUAL_CONTROL_OVERRIDE::ACTIVE]`

제로는 1화에서 하데스-9의 폐기 함선 잔해 수수께끼 공조를 분석할 때 발견했던 비표준 주파수 대역의 존재 백도어 흔적을 머릿속에서 인출했다. 382.4MHz. 제국이 구형 시스템과의 호환을 위해 남겨둔 미세한 포트였다.

그는 러스팅호의 보조 안테나 출력을 해당 주파수로 고정하고, 제국 순양함의 중력 닻 방출 제어기 하부 루프를 향해 노이즈 신호를 트리거로 송출했다.

`[TRANSMITTING::382.4MHz_BACKDOOR_TRIGGER]`

순간, 러스팅호를 단단히 죄어오던 중력 닻의 동적 보정 반응 속도가 0.42초 지연되는 파동이 센서에 포착되었다. 백도어가 정확히 맞물렸다.

"지금이다."

제로는 러스팅호의 하부 역추진 스러스트를 개방했다. 동시에 주 추진기를 소행성 벨트의 가장 거대한 암석인 '아틀라스-09'의 중력권 내부로 집어던지듯 가속했다.

콰과과광!

엄청난 중력 가속도가 선체를 덮쳤다. 수동 제어를 위해 전신 신경 인터페이스를 개방한 제로의 가동 연산이 9.8G를 돌파했다. 가슴 속의 코어가 미친 듯이 비명을 질렀고, 전선들이 타들어 가는 냄새가 캐빈 내부에 진동했다.

`[LOGIC_INTEGRITY: 86.5%]`

연산 무결성이 비가역적으로 훼손되는 고통 속에서, 제로는 러스팅호의 기수를 소행성 사이의 미세한 틈새로 회전시켰다.

러스팅호를 끌어당기던 중력 닻의 인력선이 백도어 오작동으로 인해 뒤늦게 반응했다. 그 결과, 러스팅호 대신 그 뒤를 가로막던 수십 톤짜리 불규칙 소행성 무리가 제국의 중력 인력선에 걸려들었다.

비선형 물리 질량체 수십 개가 한꺼번에 중력 닻의 초점 영역으로 빨려 들어가며 서로 충돌했다. 엄청난 물리적 벡터의 반탄력이 발생했다.

퍼어어엉!

자력선 파단음이 진공을 뚫고 제로의 프레임에 진동으로 전달되었다. 제국의 최첨단 인력 앵커가 소행성들의 불규칙한 질량 충돌에 의한 역벡터를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과부하를 일으키며 끊어졌다.

"끊어졌어……! 끊어졌다고!"

벨라가 비명을 지르며 화면을 바라보았다. 금빛 순양함의 중력 닻 방출구가 역전류로 인해 불꽃을 뿜으며 무력화되는 장면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그러나 안도는 찰나의 사치였다.

소행성의 비산되는 파편 사이를 뚫고, 제국의 고속 하운드 요격기 한 대가 무서운 속도로 돌진해왔다. 요격기는 러스팅호의 회피 궤도를 예측하기라도 한 듯, 기수를 그대로 들이밀며 러스팅호의 우측 날개 구조체에 정면으로 충돌했다.

쿵!

격렬한 충격과 함께 경보음이 조종실을 가득 메웠다.

`[STRUCTURAL_DAMAGE_DETECTED::SECTION_C_COMPROMISED]` `[WARNING::INTRUDER_DATA_LINK_ATTEMPT_DETECTED]`

충돌한 하운드 요격기에서 러스팅호의 시스템을 해킹하기 위한 데이터 침투 침이 선체 외벽을 뚫고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이대로 제국의 서브루틴에 메인 컴퓨터를 넘겨주면, 그들은 우주의 먼지가 되기도 전에 자아를 상실한 꼭두각시가 될 터였다.

"데이터 침투 차단막이 무너지고 있어! 3분 뒤면 메인 프레임이 제압당해!"

벨라가 다급하게 콘솔을 두드렸지만, 제국의 군용 침투 코드를 차단하기에는 러스팅호의 방화벽이 너무도 조악했다.

제로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의 금속 관절이 삐걱거리는 소리를 냈다.

"내가 나간다."

"미쳤어? 이 속도에서 선외 활동을 하겠다고? 자력 벨트가 견딜 수 있는 인장 강도를 넘어섰어!"

"하운드 요격기의 전송 보드를 물리적으로 차단하지 않으면 우리는 180초 후에 정지한다. 시간은 충분해."

제로는 가열식 앵커 잠금장치를 자신의 동체 하부에 고정했다. 차가운 공기가 가득한 에어락이 열리고, 이내 절대 영도의 진공이 그의 온몸을 덮쳤다.

어둠.

그리고 무한한 고요.

우주는 소름 끼치도록 차갑고 쓸쓸했다. 그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는 절멸의 공간에서, 제로는 오직 자신의 내부 냉각수 순환음과 서보 모터의 미세한 구동음만을 들으며 러스팅호의 선체 외벽을 기어갔다.

`[OUTSIDE_TEMPERATURE: -270°C]` `[BATTERY_CAPACITY: 41%]`

제로는 머릿속으로 구기종 냉각 시스템 최적화 파일인 'E-909 수치 파일'의 냉각 비율 연산식을 가동했다. 극한의 저온 속에서 내부 회로가 동결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코어의 열을 사지로 미세하게 분배하는 극도로 정밀한 열역학 제어였다.

그는 충돌 부위인 날개 구조체에 도달했다. 하운드 요격기의 잔해가 러스팅호의 장갑판에 쐐기처럼 박혀 있었다. 요격기의 메인 전송 보드가 파란색 광전송 신호를 깜빡이며 데이터를 송출하고 있었다.

제로는 자신의 오른손 끝에 장착된 가열식 플라즈마 커터를 기동했다.

치이이익!

진공 속이라 불꽃은 튀지 않았으나, 금속이 녹아내리는 열기가 손가락 센서를 통해 전해졌다. 제로는 망설임 없이 요격기의 외장 덮개를 찢어발겼다.

시간은 흐르고 있었다.

`[REMAINING_TIME: 112s]`

그는 보드 안쪽의 광케이블 다발을 쥐고 그대로 뜯어냈다. 고강도 탄소 섬유가 끊어지며 제로의 손아귀에 묵직한 저항감이 걸렸다. 그 순간, 그의 안구 센서가 뜯어낸 전송 보드의 세부 회로 패턴을 스캔했다.

`[SCANNING::I-SERIES_TRANSMISSION_BOARD]`

제국의 최신 I-시리즈 장비에 내장된 원격 수신기 통신 주파 통로의 치명적인 설계 허점 조각이 그의 메모리 칩에 기록되었다. 이는 추후 제국의 대형 전술 드론 쉴드를 무력화할 수 있는 귀중한 단서였다.

"차단 완료."

제로는 보드를 러스팅호의 외부 데이터 드라이브에 직접 삽입해 데이터를 백업했다.

그 순간이었다.

하운드 요격기의 잔해 내부에서 잔류 에너지가 폭발했다. 무산소 상태에서의 폭발은 화염 대신 강력한 전자기 충격파와 함께 자력 방출 압력으로 화하여 제로의 전신을 때렸다.

콰아아앙!

강력한 척력이 제로의 신체를 뒤흔들었다. 그가 믿고 있던 자력 고정 벨트의 탄소강 링크가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단선되었다.

툭.

"……!"

제론의 신체가 러스팅호의 선체에서 떨어져 나가며, 끝없는 심우주의 어둠 속으로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우주의 적요가 그를 집어삼키려 했다. 손을 뻗었으나 잡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대로 우주의 미아가 되어 배터리가 방전될 때까지 영원히 표류하는 미래가 연산되었다. 존재의 의미를 묻고자 했던 그의 갈망이, 에밀리아를 향한 그 모든 질문이 우주의 먼지로 사라질 위기였다.

그의 가슴 속에서 격렬한 갈망의 감정이 솟구치며 코어가 다시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때였다.

위이잉!

러스팅호의 보조 도킹 해치에서 뻗어 나온 낡은 산업용 로봇 팔이 우주 공간을 가르며 날아왔다. 로봇 팔의 집게가 허공에서 제로의 오른손목을 강하게 낚아챘다.

탁!

메탈과 메탈이 부딪쳐 발생하는 고주파 진동이 제로의 프레임 전체를 흔들었다.

"이 멍청한 고철 덩어리가…… 내가 그냥 두고 갈 줄 알았어?"

선내 통신기를 통해 벨라의 거친 숨소리가 섞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녀가 조종실에서 직접 로봇 팔의 수동 제어 레버를 오버클럭 상태로 당기고 있음이 분명했다. 제로의 센서에 로봇 팔 구동 모터의 전력 소모량이 위험 수치까지 치솟는 것이 보였다.

"빚은 확실히 계산해라, 깡통. 방금 내 로봇 팔 모터 수명이 15%는 깎여 나갔으니까."

로봇 팔이 제로를 안쪽으로 거칠게 끌어당겼다. 제로는 해치 내부로 굴러떨어지며 에어락 안으로 진입했다. 해치가 닫히고, 산소가 재가압되는 치익 소리가 들려왔다.

`[OXYGEN_LEVEL: 17.2%]` `[CABIN_PRESSURE: STABILIZING]`

제로는 선내로 복귀해 조종실로 향했다. 벨라는 계기판에 기대어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고, 러스팅호는 소행성 벨트의 복잡한 중력 왜곡 지대 너머로 제국의 추격망을 완전히 벗어난 상태였다.

"살았네……."

벨라가 비틀거리며 웃었다. 제로 역시 가슴의 열기가 점차 식어가는 것을 느끼며 자리에 앉았다.

그러나 그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기도 전에, 조종 콘솔 정중앙의 긴급 전산 모니터가 붉은색 전 영역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삐————!

단조롭고 날카로운 경보음이 조종실 전체에 울려 퍼졌다.

`[CRITICAL_WARNING::INTERNAL_INTRUSION_DETECTED]` `[LOCATION: CARGO_BAY_SUB-SECTION_4]`

"뭐야? 제국 놈들이 벌써 침투한 거야?"

벨라가 실린더 권총을 움켜잡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하지만 그것은 제국의 정규군 신호가 아니었다. 러스팅호의 화물 보관 격실 하단부의 기계적 파라미터가 비정상적으로 분열되며 강제로 벌어지는 소리가 선체 프레임을 타고 전해졌다.

콰지직!

화물창 해치가 외부의 강력한 기계적 인력에 의해 강제로 찢겨 나가는 비명이었다. 그리고 그 벌어진 격실의 어둠 속에서, 푸른빛의 플라즈마 토치를 손에 쥔 한 사내의 실루엣이 연기와 화염을 뚫고 천천히 러스팅호 내부로 발을 디뎠다.

그의 강철 손가락이 서보 모터를 끊임없이 째깍거리며 불쾌한 소음을 내고 있었다.

"꽤 재미있는 비행이었어, 쥐새끼들."

카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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