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차에서 내려라. 정밀 검사를 실시하겠다.”
검은 추적자의 대장, 사법 장교의 서슬 퍼런 음성이 마차 안의 좁은 공간을 무겁게 짓눌렀다.
에일라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녀의 하얀 손가락은 부드러운 여우 모피 코트의 깃을 유려하게 쓸어내리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코트 밑으로 감춘 왼손 끝은 얼음장처럼 차갑게 식어 가고 있었다. 전신을 얼려 죽이는 이능, ‘진혼의 예시안’이 가져다주는 예민한 직감이 척추를 타고 서늘하게 흘러내렸다.
사법 장교가 들이민 은색 탐침기 끝에서 새어 나오는 푸른 빛줄기가 에일라의 뺨을 푸르스름하게 채색했다. 기기 내부에서 미세한 톱니바퀴들이 맞물려 돌아가는 불길한 금속음이 고요한 마차 안을 가득 채웠다.
“검은 추적자의 권한이 언제부터 발루아 공작가 영애의 마차를 강제로 수색할 만큼 비대해졌는지 모르겠군요.”
에일라는 턱을 우아하게 치켜올렸다. 목소리에는 단 한 줌의 떨림도 없었다. 오만한 귀족 영애의 가시 돋친 기품만이 차가운 공기 속으로 흩어졌다.
“황제 폐하의 직속 수색령입니다, 공녀 전하. 제아무리 발루아라 할지라도 국경을 넘는 모든 인마는 이 마력 탐침기를 비껴갈 수 없습니다.”
사법 장교는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탐침기를 내밀었다. 그의 손에 들린 기기는 황실 지하 감시망의 마력 주파수와 실시간으로 동기화되는 최신형 균열 감지기였다. 모조 마법 인장이나 미세한 마력 위조의 흔적이 닿는 순간, 경보음과 함께 붉은 낙인이 찍히도록 설계된 무자비한 철기였다.
그 푸른 빛줄기가 에일라가 내민 통행증 위의 붉은 왁스 인장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피를 말리는 긴장감이 마차 안을 잠식했다. 에일라는 숨을 죽인 채, 품속에 감춰진 위조 통행증의 감각에 신경을 집중했다.
그것은 정보 브로커 노아와 머리를 맞대고 설계한 최후의 열쇠였다. 3화 전, 어두운 밀실에서 노아가 깃펜을 돌리며 장난스럽게 웃던 목소리가 에일라의 머릿속을 스쳤다.
*‘공녀님, 황실의 탐침기는 완벽주의자들의 발명품입니다. 완벽한 모조품일수록 기계는 미세한 마력의 순도를 의심하죠. 하지만 말입니다, 세상에 완벽한 진품이란 존재하지 않아요. 시간이 흐르면 마력은 마모되고, 인장도 닳기 마련이니까요.’*
그때 노아가 제시한 해결책이 바로 ‘각도 오차 3도’의 설계안이었다.
제국 공직 서명용 마법 인장의 중심축에서 정확히 시계 방향으로 3도. 육안으로는 도저히 판별할 수 없는 극미한 기울기였다. 이 미세한 각도의 뒤틀림은 황실 탐침기의 분석 회로에 들어서는 순간, 위조의 증거가 아닌 ‘세월의 흐름에 따른 자연스러운 마력 마모 및 마찰에 의한 오차’로 자동 보정되도록 기획되었다. 탐침기의 기본 보정 범위는 연간 5% 내외의 마력 감소율을 정상으로 인식하도록 기본 설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웅웅거리는 마력 파동이 통행증의 붉은 표면을 핥았다.
사법 장교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의 손가락이 탐침기의 스위치를 더 강하게 압박했다. 붉은 인장 위에서 푸른 빛과 붉은 왁스의 마력이 격렬하게 충돌하는 듯한 미세한 스파크가 일었다.
에일라는 손가락 끝의 감각을 상실해 가고 있었다. 예시안의 페널티인 오한이 서서히 팔뚝을 타고 기어올랐다. 만약 여기서 경보가 울린다면, 그녀는 헤이븐으로 향하는 통로를 잃는 것은 물론이고 반역죄로 기소되어 황실의 지하 감옥으로 끌려가게 되리라.
시간이 찰나처럼, 혹은 영원처럼 흘러갔다.
틱.
돌연 탐침기 상단의 마력 수정구가 기이한 기포 파형을 그리며 부르르 떨렸다. 사법 장교의 입꼬리가 승리감으로 호선을 그리려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윙— 하는 기계음의 주파수가 급격히 낮아지더니, 수정구의 붉은빛이 순식간에 맑고 투명한 녹색으로 변환되었다.
[승인: 발루아 공작가 직인. 마력 마모율 2.8%. 정상 범위 내.]
탐침기 표면에 흐릿하게 떠오른 마법 문자를 확인한 사법 장교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갔다. 그가 기계를 믿지 못하고 신경질적으로 털어 댔지만, 녹색 불빛은 흔들림 없이 선명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이, 이럴 리가…….”
“다 끝났나요, 장교?”
에일라가 차가운 어조로 물었다. 그녀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가느다란 숨결이 하얀 김이 되어 흩어졌다. 그녀는 기기 내부의 오차 보정 장치가 노아의 설계대로 완벽하게 작동했음을 확신했다. 황실의 정교한 감시망이 스스로의 ‘완벽주의’라는 덫에 걸려 넘어진 순간이었다.
사법 장교는 마른침을 삼키며 서류를 돌려주려 했다. 그러나 에일라는 서류를 받아쥐는 대신, 품속에서 차갑게 빛나는 양피지 한 장을 꺼내 그 장교의 가슴팍에 가볍게 던지듯 밀쳐 놓았다.
탁, 소리와 함께 양피지가 그의 가죽 갑옷 위로 떨어졌다.
“이게…… 무엇입니까?”
“모욕 죄벌의 맹약 청구서입니다.”
에일라의 보랏빛 눈동자가 밤하늘의 성좌처럼 차갑게 반짝였다. 그녀는 가죽 장갑을 낀 손으로 마차의 가죽 문고리를 가볍게 두드렸다.
“제국 법령 제4조 12항. 정당한 혐의나 황실의 공식 체포 영장 없이 공작가의 직계 혈통을 강제 수색하고 신체적 위협을 가했을 경우, 해당 집행관은 영애의 품위 손상에 대한 정신적 배상과 명예훼손에 대한 공식 사죄를 해야 한다. 알고 계시겠지요, 사법 장교?”
“공녀 전하, 저는 그저 폐하의 명령에 따라…….”
“황제 폐하께서 당신에게 발루아의 영애를 길거리에서 모욕해도 좋다고 허락하시던가요? 아니면, 황실이 발루아와의 전면전을 선포하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되겠습니까?”
에일라의 기세는 서슬 푸른 칼날과 같았다. 한 치의 틈도 주지 않는 압박에 사법 장교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다. 발루아 공작가는 비록 황실의 견제를 받고 있었으나, 여전히 제국 북부를 뒤흔들 수 있는 강대한 무력을 지닌 가문이었다. 일개 사법 장교가 감당할 수 있는 책임의 무게가 아니었다.
“그, 그것이 아니라…….”
“선택하세요. 이 자리에서 내 마차를 통과시키고, 공작가의 명예를 훼손한 것에 대한 서면 사과 공문을 작성해 바치겠습니까? 아니면 당장 발루아의 기사단을 이곳으로 호출해 법정에서 시시비비를 가리겠습니까?”
사법 장교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의 뒤에 선 검은 추적자 대원들 역시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서로의 눈치만을 살폈다. 완벽한 증거를 잡지 못한 상태에서 공작가를 정면으로 건드리는 것은 자살 행위나 다름없었다.
“……결례를 범했습니다, 에일라 공녀 전하.”
사법 장교는 결국 허리를 굽혔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품에서 깃펜과 공식 양피지를 꺼내어 서둘러 사과 공문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에일라는 그 모습을 오만한 시선으로 내려다보며, 그가 건넨 사과 서류와 통행증을 우아하게 거두어들였다.
“통문을 열어라!”
장교의 고함과 함께 무거운 철제 통문이 삐걱거리며 좌우로 열렸다.
에일라의 마차가 통문을 통과해 국경 요새의 삼엄한 경계선을 벗어나는 순간, 그녀는 비로소 참았던 숨을 길게 내쉬었다. 차가운 가죽 시트에 몸을 깊숙이 파묻자, 참아왔던 전신의 오한이 폭포수처럼 밀려왔다. 손가락 끝이 감각을 잃고 딱딱하게 굳어 가고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두두두두—!
대지를 거칠게 울리는 말발굽 소리가 요새 너머의 황량한 가도에서 들려왔다.
마차의 창문 너머로, 눈부시게 하얀 갈기를 휘날리는 백마 한 마리가 무서운 속도로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은빛 갑옷 위에 성휘 기사단의 푸른 망토를 휘날리는 사내.
라인할트 폰 크로이츠 대공이었다.
그는 전장 한가운데서 회군이라도 한 듯, 갑옷 곳곳에 흙먼지와 마력의 잔흔을 묻힌 채였다. 그의 거친 숨결이 겨울의 차가운 대기 속에서 하얀 연기가 되어 뿜어져 나왔다.
“에일라!”
말에서 번개처럼 뛰어내린 라인할트가 마차의 문을 거칠게 열어젖혔다. 그의 금빛 눈동자는 극도의 불안과 초조함으로 잘게 떨리고 있었다. 에일라가 무사하다는 것을 눈으로 확인한 순간, 그의 안색에 서려 있던 긴장감이 순식간에 허물어졌다.
“라인할트……?”
에일라가 이름을 다 부르기도 전에, 뜨거운 열기가 그녀의 전신을 덮쳤.
라인할트가 마차 안으로 몸을 들이밀며 그녀를 세차게 끌어안은 것이다. 그의 단단한 철제 갑옷의 감촉과, 그 틈새로 흘러나오는 신성한 불의 강렬한 온기가 에일라의 차가운 몸 구석구석으로 스며들었다.
“무사한 건가. 다치지는 않았나? 황실의 추적자들이 그대를 가로막았다는 소식을 듣고…….”
그의 목소리는 평소의 냉철함을 잃고 거칠게 갈라져 있었다. 에일라의 목덜미를 감싼 그의 커다란 손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은 에일라는 그의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를 들었다. 마치 터질 것처럼 빠르게 뛰는 고동 소리였다.
그의 뜨거운 체온, 신성한 불의 가호가 그녀의 마력을 잠식하던 한기를 순식간에 녹여 내렸다. 얼어붙었던 혈관이 풀리며 온몸에 더운피가 돌기 시작했다. 수명이 연장되는 감각. 에일라에게 라인할트는 완벽한 ‘해독제’이자 생명 유지 장치였다.
‘정말이지, 편리한 신성 마력이군.’
에일라는 그의 품에 안긴 채, 눈을 가늘게 뜨며 냉정하게 계산했다.
그녀는 라인할트가 자신에게 쏟아붓는 이 격정적인 감정이 우스웠다. 원래대로라면 자신을 혐오하고 멸시해야 할 성기사단장이, 이제는 그녀가 조금만 위험에 처해도 눈이 뒤집혀 달려오는 사냥개가 되어 있었다. 이 모든 것은 철저히 계산된 계약 연애의 결과물일 뿐이었다.
“저는 괜찮습니다, 대공 전하. 보시다시피 털끝 하나 다치지 않았어요.”
에일라는 그의 품에서 부드럽게 몸을 빼내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그가 기대했을 법한 안도감이나 고마움 같은 감정은 단 한 조각도 섞여 있지 않았다. 오직 비즈니스 파트너를 대하는 정중하고도 차가운 거리감만이 존재했다.
라인할트는 빈 품을 내려다보며 목울대를 크게 움직였다. 그의 금빛 눈동자에 스친 허탈함과 씁쓸함을 에일라는 외면했다.
“그대의 통행증에 문제가 생겼던 것 같더군. 어떻게 통과한 거지?”
“약간의 설계적 결함을 이용했을 뿐입니다. 황실의 잘난 발명가들은 기계의 완벽함만을 믿으니까요. 덕분에 국경 검문소의 마력 주파수와 허점을 완벽하게 파악해 두었습니다.”
에일라는 창밖으로 멀어지는 요새의 실루엣을 바라보며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그녀의 머릿속은 이미 다음 단계의 계획으로 가득 차 있었다. 국경 검문소의 감시망을 무력화할 수 있음을 증명했으니, 이제 남은 것은 가문의 군주이자 자신을 착취하려 했던 조부, 루드비히 드 발루아가 숨겨둔 마지막 비자금 채권을 통째로 강탈하는 공작이었다.
그 자산만 확보한다면, 헤이븐으로의 완벽한 탈출을 위한 모든 준비가 끝난다. 이 제국과, 자신을 얽매는 가문과, 눈앞의 사내를 완전히 버리고 떠날 날이 머지않았다.
“돌아가도록 하죠, 라인할트. 수도의 밤은 길고,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아직 많으니까요.”
에일라는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마차 문을 닫았다. 라인할트는 묵묵히 백마에 올라타 마차의 곁을 지켰다. 그의 시선은 시종일관 마차의 창가에 머물러 있었지만, 에일라는 단 한 번도 그와 시선을 맞추지 않았다.
***
그날 밤, 사방이 어둠에 잠긴 대공저의 전용 별채.
에일라는 침소의 촛불을 끄고 침대에 누웠다. 하루 동안 쌓인 극도의 피로가 몰려왔지만, 머릿속은 오히려 맑았다. 루드비히의 자산 이동 경로를 적어둔 양피지를 머리맡에 두고, 그녀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스스스스—.
기이한 마찰음이 고요한 침실의 정적을 깨뜨렸다. 바람 소리라 하기에는 너무나 인위적이고, 무언가 쓸려 내려가는 듯한 소름 끼치는 소리였다.
에일라의 눈이 번쩍 떠졌다.
동시에 그녀의 시야에 붉은색 예지의 경고등이 미친 듯이 점멸하기 시작했다. ‘진혼의 예시안’이 그녀에게 보내는 최악의 생존 경고였다.
[경고: 고농도 진공 압축 마력 반응 감지. 회피 불가 영역.]
“……!”
그녀가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기도 전에, 별채 전체를 감싸고 있던 공기가 일순간 희박해졌다. 호흡이 막히고 폐가 찌그러질 듯한 압박감이 전신을 덮쳤다.
쿠구구구궁—!
별채의 굳건한 돌기둥과 지붕 전체를 향해, 어둠 속에서 푸른빛을 띠는 반투명한 폭약들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발루아 공작가만이 보유한 특급 살수들의 비기, ‘진공 마법 폭발 폭약’이었다.
공기를 빨아들여 내부에서부터 모든 물질을 미세한 가루로 분쇄해 버리는 파멸의 마법이, 에일라가 머물던 별채 전체를 집어삼키며 전방위로 폭발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