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제관 지하 복도의 공기는 얼어붙은 무덤처럼 서늘했으나, 에일라의 턱을 움켜쥔 라인할트의 손가락은 살을 태울 듯이 뜨거웠다.
어둠 속에서 그의 금빛 눈동자가 기괴할 정도로 형형하게 빛났다. 그 안에는 격정적인 소유욕과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의구심이 한데 뒤엉켜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그가 내뱉는 숨결마다 신성 마력의 미세한 불꽃이 대기 중에서 타닥거리며 흩어졌다.
“거짓말하지 마.”
라인할트의 목소리는 낮게 긁히며 에일라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그 비표를 들고 어디로 가려는 거지? 이 계약서 이면에 숨겨진 그대의 진짜 목적이 무엇이냐 말이다, 에일라 드 발루아!”
에일라는 등을 짓누르는 차가운 석벽의 감촉을 고스란히 느끼면서도, 조금의 흔들림 없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가느다란 목덜미 위로 그의 뜨거운 숨결이 닿아 내렸지만, 그녀의 눈빛은 오히려 한겨울의 빙판처럼 투명하고 단단했다.
그녀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리며 매끄럽게 올라갔다. 조소인지, 혹은 철저한 계산 끝에 나온 확신인지 알 수 없는 미소였다.
“대공, 당신의 그 뜨거운 연민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스스로 돌아보시지요.”
에일라가 자유로운 한 손을 들어 라인할트의 단단한 손목을 감싸 쥐었다. 비단처럼 부드러운 손길이었으나, 그 안바닥은 이미 동사하기 직전의 사체처럼 차디찼다.
“대공님의 불꽃이 내 동사의 고통을 가라앉힌다는 맹약 외에, 다른 연민에 기인한 속박은 거절합니다. 우리는 계약서 위에서만 온전한 파트너일 뿐입니다.”
“에일라!”
“제 이름을 그렇게 사납게 부른다고 해서 계약서의 잉크가 번지지는 않습니다.”
그녀는 턱에 가해진 그의 손길을 억지로 떼어내지 않았다. 오히려 그 차가운 피부를 그의 손바닥에 더 깊이 밀착시키며 속삭였다.
“그보다, 지금 그 사나운 추궁을 이어가기 전에 이행하셔야 할 의무가 있지 않습니까?”
순간, 에일라의 전신이 눈에 보이지 않는 잔떨림으로 진동하기 시작했다.
‘진혼의 예시안’을 발동했던 대가가 그녀의 뼛속 깊은 곳에서부터 고개를 쳐들고 있었다. 영혼을 얼려 죽이는 무자비한 오한이 심장에서부터 뻗어 나와 혈관을 따라 급속도로 퍼져 나갔다. 손끝이 하얗게 질려가고, 흐릿한 숨결이 하얀 김이 되어 흩어졌다.
이능의 페널티는 잔혹했다. 매번 목숨을 담보로 한 도박이었다. 하지만 에일라에게는 이 고통조차 라인할트라는 가장 완벽한 해독제를 착취하기 위한 명분이자 도구였다.
“보시다시피, 제 영혼이 얼어붙고 있습니다.”
에일라가 차갑게 식어가는 입술을 열어 나직하게 읊조렸다.
“추궁은 나중으로 미루시지요. 지금 당장 맹약에 따른 의무를 이행해 주셔야겠습니다, 대공.”
그녀는 오히려 오만하게 눈을 가늘게 뜨며, 라인할트의 제복 깃을 움켜쥐었다. 금사로 수놓인 사자 문양이 그녀의 손끝에서 잘게 흔들렸다. 그것은 명령이었고, 지독할 정도의 착취적인 요구였다.
라인할트의 눈동자가 분노로 붉게 물들었다. 자신을 철저하게 도구로 취급하는 그녀의 태도에 심장이 뜯겨 나가는 듯한 굴욕감을 느끼면서도, 그는 그녀의 하얗게 변해가는 입술을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었다. 혐오와 집착, 그리고 구원하고자 하는 열망이 그의 이성을 난폭하게 흔들었다.
“……그대는 정말이지, 사악할 정도로 영리하군.”
라인할트가 피할 수 없는 패배를 인정하듯 나직하게 신음했다.
이내 그의 단단한 팔이 에일라의 가느다란 허리를 거칠게 낚아챘다. 좁은 복도의 공기를 터뜨릴 것처럼 팽창하던 신성 마력이 푸른빛을 띤 은백색의 불꽃으로 피어올랐다. 거칠면서도 지독하게 따뜻한 열기가 두 사람의 경계를 무너뜨리며 쏟아져 들어왔다.
“앗…….”
에일라의 입에서 짤막한 탄성이 흘러나왔다.
그의 넓은 가슴에 이마를 묻은 순간, 전신을 마비시키던 혹독한 오한이 봄눈 녹듯 부서져 내렸다. 라인할트는 마치 그녀를 자신의 육체 안으로 녹여 가두려는 것처럼 힘주어 끌어안았다. 그의 심장박동이 에일라의 귓가를 미친 듯이 두드렸다.
그의 뜨거운 마력이 에일라의 살결을 타고 스며들어, 얼어붙었던 마력 회로를 거침없이 활성화시켰다. 단순한 연성 접촉을 넘어선, 영혼의 밑바닥까지 뒤흔드는 열기였다.
그 격렬한 마찰의 소용돌이 속에서, 기이한 현상이 일어났다.
라인할트의 체내 깊숙한 곳에 존재하는 크로이츠 가문의 독문 비술, ‘성휘의 원천’에서 떨어져 나온 미세한 불꽃의 입자들이 에일라의 마력 중심으로 흘러들었다. 그것은 단순한 온기의 전달이 아니었다. 타오르는 태양의 파편과도 같은 순수한 신성 마력의 정수였다.
은백색으로 빛나는 미약한 불씨 몇 개가 에일라의 마력 내부, 그 누구도 침범할 수 없도록 격리된 ‘안전 핵 공간’에 조용히 내려앉았다.
마치 태초부터 그곳에 존재했던 것처럼, 불꽃은 영구 보존 형태로 안착하여 은은한 온기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에일라의 얼어붙은 영혼 한구석이 그 불꽃의 정착으로 인해 영구적으로 따뜻하게 데워지는 감각이었다.
“……!”
그 순간, 라인할트의 몸이 크게 들썩였다.
그는 자신의 영혼 한 조각이 뜯겨 나가 그녀의 심장부로 완전히 귀속되는 듯한 기묘한 상실감을 느꼈다. 그것은 생소하고도 두려운 감각이었으나, 동시에 말할 수 없는 희열을 동반했다.
이제 그녀의 체내에는 자신의 불꽃이 흐른다. 그녀가 아무리 자신을 밀어내고 이 제국을 떠나려 발버둥 쳐도, 그 영혼의 깊은 곳에는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자신의 낙인이 새겨진 것이다.
라인할트는 에일라의 어깨를 쥔 손가락에 더욱 힘을 주며, 광기 어린 목소리로 속삭였다.
“느껴지는가? 내 불꽃이 그대의 영혼 깊숙한 곳에 뿌리내리는 것이.”
“…….”
“그대는 나를 착취한다고 믿겠지만, 결국 그대의 마력은 내 불꽃 없이는 숨조차 쉬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도 감히 내게서 도망칠 생각을 해?”
그의 음성은 젖어 있었고, 동시에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구걸하는 듯한 비틀린 구도였다.
에일라는 그의 품에 안긴 채, 내면의 전력 수치표를 고요히 들여다보았다.
[영혼의 오한 해독률: 92%] [마력 안전 핵 활성화도: 단계 격상 (안정화 완료)] [생명력 잔여 수치: 대폭 상승]
성공이었다.
그녀의 입술 사이로 차가운 조소가 흘러나왔다. 라인할트가 느끼는 그 기묘한 희열과 소유욕은 결국 그녀의 치밀한 계산에 의해 유도된 ‘대가 없는 착취’의 결과물일 뿐이었다. 그의 신성력을 이율도 없이, 단 한 조각의 감정적 부채도 남기지 않은 채 완벽하게 뜯어낸 것이다.
‘바보 같은 남자.’
에일라는 속으로 냉소했다. 그의 집착이 깊어질수록, 그녀의 생존 확률은 올라가고 탈출 계획은 더욱 공고해질 뿐이다.
그녀는 슬며시 그의 품에서 벗어나며 옷가지를 단정히 정돈했다. 흐트러진 머리칼을 뒤로 넘기는 그녀의 손길은 우아하고도 무심했다.
“충분한 온기를 공급받았으니, 이만 가보겠습니다. 대공께서도 공적인 업무로 바쁘실 텐데 무의미한 감정소모는 지양하시는 편이 좋겠지요.”
“에일라!”
“그리고.”
에일라는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푸른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차갑게 빛났다.
“수도 대탈출을 위한 2차 자금 상환서 작성을 시작해야 하니, 제 개인 집무실의 출입 통제를 강화해 주시길 바랍니다. 불필요한 감시자가 서성이는 것은 계약 위반이니까요.”
그녀는 머릿속으로 정보상 노아와의 약속을 떠올렸다. 노아에게 전달했던 헤이븐 전용 신분증 속의 공직 서명용 마법 인장.
그 인장에는 황실의 감시망을 무력화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기획한 미세한 ‘각도오차 3도’의 설계안이 숨겨져 있었다. 황제가 수도 검문소에 깔아둔 정밀 마력 탐색 장치는 완벽한 대칭만을 감지하도록 설계되어 있으니, 이 미세한 불균형이야말로 감시망을 우회할 유일한 열쇠가 되리라.
라인할트는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주먹을 피가 나도록 꽉 쥐었다. 그의 손바닥에서 뿜어져 나온 열기가 사제관의 차가운 바닥을 그슬렸다.
***
사제관을 나온 에일라는 곧장 대공저의 삼엄한 경비가 삼켜진 본관 회의실로 향했다.
그곳에는 이미 기사단의 고위 간부들과 발루아 공작가에서 파견된 전령들이 무거운 침묵 속에서 대치하고 있었다. 최근 발생했던 성수고 오염 사건, 즉 기사단을 몰살하려 했던 사보타주의 배후를 밝혀내기 위한 삼자대면의 자리였다.
발루아 가문의 대리인으로 참석한 중년의 기사는 거만한 태도로 턱을 치켜들고 있었다.
“우리 발루아 공작가는 황실의 충직한 검입니다. 대공저의 성수고가 오염된 사건에 우리 가문이 개입했다는 터무니없는 모함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증거도 없이 명예로운 가문을 모욕한 대가는 가볍지 않을 것입니다!”
기사는 에일라를 힐난하는 눈빛으로 쏘아보았다. 루드비히가 보낸 사냥개다운 뻔뻔함이었다.
그러나 에일라는 회의실 중앙의 대리석 테이블로 우아하게 걸어갔다. 그녀의 품위 있는 걸음걸이마다 드레스 자락에 수놓인 은사 자수가 촛불을 받아 은은하게 일렁였다.
“증거를 원하십니까?”
에일라의 목소리가 맑고 청아하게 울려 퍼졌다. 그녀는 소매 안에서 작은 유리병 하나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유리병 안에는 성수고에서 채취한 오염된 결정과 함께, 검푸른 빛을 띠는 미세한 금속 파편이 들어 있었다.
“이것은 성수고 내부의 정교한 결계를 파괴하기 위해 사용된 특수 마력 폭발물의 잔해입니다. 그리고 여기 계신 발루아의 기사님, 당신들의 영지에서만 채굴되는 ‘청은’의 성분이 검출되었지요.”
“그, 그것은 누군가 우리 가문을 모함하기 위해 위조한 것일 수도……!”
“아직 제 말이 끝나지 않았습니다.”
에일라가 차갑게 말을 잘랐다. 그녀의 눈동자가 기사를 꿰뚫을 듯이 가라앉았다.
“1화 전, 제가 황실 추적자들의 습격을 받았을 때 그들이 사용했던 위장 독잔을 기억하십니까?”
회의실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라인할트 역시 에일라의 입을 주시했다.
“그 위장 독잔의 마개에는 육안으로는 절대 보이지 않는, 미세하고 정교한 균열 구조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황실의 비밀 공방에서 제작된 독점적인 마법 각인이었지요. 기하학적 균열의 무늬가 마력의 흐름을 왜곡시켜 독물의 탐지를 막는 원리입니다.”
에일라는 유리병을 툭 쳤다. 병 안의 결정이 흔들리며 미세한 각인이 빛났다.
“성수고를 오염시킨 이 폭발물의 잔해를 정밀 분석한 결과, 그 독잔 마개와 단 1밀리미터의 오차도 없이 일치하는 균열 구조가 발견되었습니다. 즉, 이 사보타주를 감행한 자는 황실 추적자들과 내통하여 그들의 비밀 장비를 공급받은 첩자라는 뜻입니다.”
기사의 안색이 순식간에 흙빛으로 변했다.
“그리고 그 장비를 성수고 내부로 반입할 수 있었던 유일한 인물은…… 최근 발루아 공작가에서 파견되어 성수 수송을 담당했던, 바로 당신입니다.”
에일라는 한 치의 흔들림 없는 정확한 논리로 첩자의 목을 조여 갔다. 단순한 심증이 아닌, 황실의 독점 기술과 가문의 고유 자원이 결합한 명백한 물증이었다.
황실의 음모를 역으로 이용해 가문 내부의 사냥개를 완벽하게 기소하는 순간이었다.
“이, 이것은 음모다! 대공, 이 미친 여자의 헛소리를 믿으시는 겁니까?”
기사가 발악하며 라인할트를 바라보았으나, 라인할트의 얼굴은 냉혹한 얼음 장벽과 같았다.
“기사단을 몰살하려 한 반역 죄인을 지하 감옥으로 압송하라.”
라인할트의 엄숙한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대기하던 성기사들이 기사의 양팔을 거칠게 꺾어 제압했다. 기사는 비명을 지르며 끌려 나갔고, 회의실 안은 발루아 가문의 기세가 완전히 꺾인 채 무거운 한숨만이 감돌았다.
에일라는 가볍게 먼지를 털어내듯 손을 털며 미소를 지었다. 가문과 황실이 자신을 옭아매려 던진 덫을 완벽하게 분쇄하고, 오히려 그들의 손발을 하나씩 잘라내는 통쾌한 반격이었다.
모든 것이 계획대로였다. 이제 남은 자금을 회수하고 수도를 떠나기만 하면 끝날 일이었다.
그러나 그 순간이었다.
우웅-!
갑자기 회의실 한가운데의 대기 공기가 기괴하게 뒤틀리며 푸른빛의 마법 진원이 강렬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경보음이 울리기도 전에, 강한 마력 파동과 함께 공간을 찢고 나타난 서류 한 장이 날카로운 바람을 일으키며 대리석 테이블 한가운데에 단단히 내리꽂혔다.
퍽!
테이블의 나뭇결이 갈라지는 소리와 함께 꽂힌 것은, 황실의 붉은 왁스 인장과 발루아 공작가의 사자 문양이 동시에 찍힌 공식 보증서였다.
서류의 첫 줄에는 에일라의 이름과 함께, 그녀가 퇴로로 삼으려 했던 영지를 강제로 헐값에 황실에 매각하겠다는 강제 집행 조항이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에일라의 눈동자가 차갑게 굳어졌다. 뒤이어 허공에 떠오른 루드비히의 마법 전언이 조롱 섞인 목소리로 회의실을 가득 채웠다.
[“사랑하는 내 딸 에일라야. 가문을 위한 너의 헌신을 황실에서도 높이 사시어, 네 영지를 직접 거두어 가시기로 했다꾸나. 이제 네게 남은 탈출구는 어디에도 없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