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손목을 파고드는 백금색의 낙인이 은빛 실선으로 굳어지는 그 짧은 찰나, 에일라의 전신을 감돌던 한기가 일시에 걷히는 듯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라인할트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그의 체내 깊숙한 곳에서 소용돌이치던 신성한 불꽃의 정수가 에일라의 손목을 타고 사정없이 뜯겨나가는 기이한 역류 현상이 발생한 탓이었다. 라인할트는 자신의 성스러운 마력이 강제로 찬탈당하는 생경한 감각에 순간 숨을 들이켰다. 마치 살아 있는 영혼 한 조각을 갈고리로 뜯어내어 바치는 듯한 섬뜩한 통증이 그의 척추를 타고 내달렸다.

그것은 단순한 마력의 흐름이 아니었다. 그의 생명력 그 자체를 강제로 흡착해 가는 포식자의 손길이었다.

"너…… 대체 무엇을……."

라인할트의 목구멍에서 억눌린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의 이마에 핏대가 솟아올랐고, 빙청색 눈동자에는 경악과 본능적인 거부감이 스쳤다. 하지만 은장의 맹약은 이미 체결되었다. 두 사람의 손목을 옭아맨 사슬은 살을 태우는 듯한 빛을 발하며 그들의 영혼 깊은 곳에 쐐기를 박아 넣었다.

쿵, 하고 발루아의 기사단장과 황실의 검은 추적자들이 디딘 대리석 바닥이 울렸다. 자색 마정석의 서늘한 빛이 침실 입구를 비추었으나, 라인할트의 압도적인 신성 장막에 가로막혀 갈 길을 잃고 흩어졌다.

"대공 전하!"

검은 가죽 갑옷을 입은 황실 추적자가 검을 비스듬히 내리누르며 외쳤다.

"이곳에 발루아의 금기된 주술 반응이 감지되었습니다. 비켜서 주십시오."

라인할트는 에일라의 허리를 감싸 안았던 손에 한층 더 강한 힘을 주었다. 손가락 끝으로 그녀의 얇은 실크 드레스 너머, 차갑게 식어 가던 살결이 자신의 온기를 빨아들이며 서서히 붉게 상기되는 것이 느껴졌다. 그는 잇새로 뜨거운 숨을 뱉어내며, 침입자들을 향해 얼음장 같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내 침소에서 내 반려와 나누는 열병을 두고 금기라 칭하는가? 황실의 사냥개들이 마침내 황제의 눈과 귀뿐만 아니라, 내 밤일의 목격자까지 자처하려는 모양이군."

그의 목소리는 낮고 위압적이었으며, 방 안을 가득 채운 백금색 마력은 당장이라도 불청객들의 목을 벨 것처럼 사납게 일렁였다.

침입자들의 시선이 라인할트의 품에 안겨 가쁜 숨을 몰아쉬는 에일라에게로 향했다. 에일라는 그의 가슴팍에 이마를 기댄 채, 가녀린 어깨를 가늘게 떨었다. 묘한 정취를 풍기는 흐트러진 머리칼과 붉게 물든 뺨은 영락없이 격정적인 밀회를 나눈 연인의 모습이었다.

기사단장의 손에 들린 자색 마정석은 끝내 침묵을 지켰다. 에일라의 영혼을 얼리던 예시안의 이능은 라인할트의 신성력 아래 완벽하게 차단되어 자취를 감춘 지 오래였다.

"……무례를 범했습니다, 대공 전하."

황실 추적자는 검을 거두며 허리를 숙였다. 그러나 그들의 눈빛에는 여전히 짙은 의혹이 남아 있었다.

그들이 물러가고 육중한 문이 다시 닫히는 순간, 에일라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라인할트의 품에서 몸을 떼어냈다. 방금 전까지 연인의 품에 안겨 떨던 가녀린 영애의 모습은 간데없었다. 그녀는 차가운 눈빛으로 옷가지를 추스르며 제 손목에 새겨진 은빛 낙인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연기가 훌륭하시군요, 대공 전하."

그녀의 목소리는 방금 전의 열기와는 다르게 얼음처럼 서늘했다.

라인할트는 텅 빈 자신의 품을 내려다보다가, 이내 거칠게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그의 손끝은 여전히 에일라에게 빼앗긴 신성력의 여파로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너는 나를……."

그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자신을 철저하게 해독제이자 방패막이로 이용하는 이 오만한 여인의 눈동자 속에는, 자신에 대한 연모나 두려움 따위는 단 한 조각도 존재하지 않았다. 오직 철저하게 계산된 이득과 생존에 대한 갈망만이 서려 있을 뿐이었다.

***

사흘 뒤, 제국의 기만적인 수도 플로렌의 하늘은 낮게 가라앉은 회색빛 구름으로 가득했다.

에일라는 공식적으로 크로이츠 대공의 연인으로서 그의 임시 거처인 대공저로 처소를 옮겼다. 발루아 공작가의 가주이자 그녀를 가스라이팅으로 지배하려 했던 루드비히 드 발루아는 격분했으나, 이미 황실의 감시망 앞에서 두 사람의 밀회가 증명된 이상 강제로 그녀를 끌고 올 명분이 없었다.

대공저로 향하는 마차 안에서 에일라는 창밖을 응시했다. 화려한 가로수 사이사이에 몸을 숨긴 채 자신을 감시하는 가문의 망령들이 보였다. 루드비히가 보낸 첩자들이 분명했다.

"여전히 꼬리가 길군요."

에일라가 낮게 읊조리며 맞은편에 앉은 라인할트를 바라보았다.

라인할트는 굳은 표정으로 서류를 검토하고 있었다. 그의 넓은 어깨를 감싼 흑색 제복 위로 금색 자수가 화려하게 빛났다. 그는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차가운 어조로 대꾸했다.

"내 영지 내에서는 그 누구도 네게 손을 대지 못한다. 가문의 감시망 따위는 걱정하지 마라."

"제 걱정은 제 가문이 아니라, 전하의 태도에 있습니다."

에일라가 미소를 지으며 손을 뻗었다. 그녀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라인할트의 가죽 장갑을 낀 손등 위로 살포시 내려앉았다.

순간, 라인할트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녀의 손길이 닿자마자, 그의 몸 안에서 신성한 열기가 다시금 그녀의 체내로 흘러들어 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에일라는 전신을 얼려오는 예시안의 오한을 해소하기 위해,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토록 뻔뻔하게 그의 신성력을 갈취했다.

"……또 시작이군."

라인할트가 혀를 찼다. 그의 목소리에는 어이가 없다는 듯한 실소가 섞여 있었다.

"내게 진정한 연모는커녕, 틈만 나면 기를 빨아먹듯 신성력을 훔쳐 가는 여자를 내 침소에 들여야 하다니. 이보다 더 지독한 거래가 어디 있겠나."

"거래란 원래 서로의 결핍을 채워주는 법이지요."

에일라는 그의 손등을 가볍게 토닥인 뒤, 아무런 미련 없이 손을 거두었다. 온기가 사라진 라인할트의 손등 위로 서늘한 바람이 스쳤다. 그는 자신을 철저히 '해독제'로만 취급하는 그녀의 극단적인 이기주의에 가슴 한구석이 서늘하게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이 여자는 정말로 자신에게 아무런 감정도 주지 않을 작정인 것이다.

대공저에 도착한 에일라는 화려하게 꾸며진 온실 정원으로 향했다. 겨울임에도 불구하고 온실 안은 마법 장치 덕분에 이국적인 난초들과 유리처럼 투명한 백합들이 만발해 있었다.

그곳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고급 벨벳 코트를 걸친 사내였다.

"아, 아름다운 대공비 전하를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사내는 과장된 몸짓으로 허리를 숙였다. 대공가의 보석 납품업자로 신분을 세탁하고 잠입한 정보상, 노아였다. 그의 눈빛은 겉보기에는 온화해 보였으나, 그 이면에는 돈 냄새를 맡은 맹수의 탐욕이 번득이고 있었다.

에일라는 주위의 시선을 차단하는 결계석을 가볍게 작동시킨 뒤, 소매 안에서 묵직한 가죽 주머니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주머니가 대리석 테이블에 부딪히며 둔탁한 소리를 냈다.

"발루아 공작가에서 혼수 준비금 명목으로 빼돌린 융자금 서약서와 황실 금화다. 선금으로는 충분하겠지."

노아가 주머니를 열어 내용물을 확인하자, 그의 입 꼬리가 귀에 걸릴 듯 찢어졌다.

"역시 발루아의 영애다운 통 큰 거래십니다. 그래서, 이번에 제가 준비해야 할 '진품'은 무엇입니까?"

에일라는 찻잔을 들어 향긋한 홍차를 한 모금 머금었다. 찻잔의 금박 테두리가 그녀의 붉은 입술 사이에서 잘게 흔들렸다.

"헤이븐으로 향하는 북부 국경의 통행증. 그리고 그것을 보증할 황실 인장의 복사본이 필요해."

노아의 미소가 순간 굳어졌다. 그가 목소리를 낮추며 물었다.

"황실 인장이라니요. 수도 플로렌의 지하 전체에 깔린 마력 추적 장치를 모르시는 것은 아닐 텐데요? 황실 인장의 마력 파동을 조금이라도 모방했다가는, 국경을 넘기도 전에 검은 추적자들에게 목이 날아갈 겁니다."

"그러니 정교하게 만들어야지."

에일라가 찻잔을 내려놓았다.

"마법 각인의 중심축에서 보조 룬 문자들의 각도를 정확히 '3도' 비틀어서 새겨라."

노아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3도요? 각도 오차가 생기면 마법 인장이 작동하지 않을 텐데요."

"아니, 작동한다."

에일라는 예시안의 예지 속에서 보았던 황실 감시장치의 틈새를 떠올렸다.

"플로렌의 탐색망은 완벽한 기하학적 대칭을 이룬 황실 마력만을 감지하도록 설계되어 있어. 도리어 완벽한 모조품일수록 탐색망의 경보를 울리지. 하지만 미세하게 '3도'의 오차를 주면, 감시장치는 그것을 마법 인장이 아닌 자연적인 광물의 마력 간섭이나 단순한 결함으로 인식하고 우회시킨다. 북부 국경 검문소의 마력 수신기는 그 정도 오차는 수용하도록 보정되어 있으니까."

노아는 넋을 잃고 에일라를 바라보았다. 황실 감시장치의 극비 설계 공식을 이토록 정확하게 꿰뚫고 있는 존재가 제국에 몇이나 되겠는가. 그는 침을 삼키며 흥분으로 상기된 얼굴로 속삭였다.

"당신은 정말이지…… 아름답고도 무서운 악마로군요, 영애."

"칭찬으로 받아들이지. 기한은 보름이다."

그때, 온실의 유리문이 열리며 대공가의 시종이 다가왔다. 시종의 손에는 발루아 공작가의 문장이 찍힌 밀서가 들려 있었다.

"영애, 발루아 공작가에서 긴급한 전령이 도착했습니다."

에일라는 밀서를 받아 들었다. 편지를 펼치자, 루드비히의 오만하고도 가식적인 필체가 눈에 들어왔다.

[대공의 군사 배치도와 성휘 기사단의 약점을 파악해 보내라. 가문의 영광을 위해 네 소임을 다하거라. 만약 거부할 시, 네가 가진 추잡한 비밀을 황실에 폭로할 것이다.]

협박과 가스라이팅으로 점철된, 전형적인 루드비히의 방식이었다.

에일라는 실소를 흘렸다. 그녀는 밀서를 들고 유유히 온실을 나와 대공의 집무실로 향했다. 그곳에는 라인할트와 그의 수석 비서관인 율리히 남작이 어두운 표정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영애, 무슨 일이십니까?"

율리히 남작이 경계 어린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대공가 내부에서는 그녀를 발루아의 스파이로 의심하는 눈초리가 강했다.

에일라는 대답 대신, 방 한가운데에 놓인 은제 촛대로 다가갔다. 그 촛대 위에는 라인할트의 성화(聖火)의 불씨가 깃든 푸른 불꽃이 은은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그녀는 라인할트와 율리히가 보는 앞에서, 루드비히의 지령서를 그 푸른 불꽃 위에 망설임 없이 올려놓았다.

화르륵—!

가문의 비열한 지령이 담긴 종이가 순식간에 푸른 불꽃에 휩싸여 타들어 갔다. 타오르는 불빛이 에일라의 백옥 같은 얼굴과 냉소적인 미소를 기괴하고도 아름답게 비추었다.

"영애! 대체 무슨 짓을……!"

율리히가 경악하며 소리쳤다.

에일라는 재가 되어 바스러지는 종이 조각들을 바라보며, 라인할트의 빙청색 눈동자를 똑바로 마주했다.

"발루아 공작이 제게 전하의 군사 기밀을 훔쳐 오라는군요. 가문의 영광을 위해서 말입니다."

그녀는 손가락 끝에 묻은 그을음을 가볍게 털어내며 속삭였다.

"하지만 저는 이미 전하와 계약을 맺은 몸. 제 가치와 목숨은 오직 이 은장의 맹약에만 귀속됩니다. 저를 흔들어 보려는 가문의 하찮은 수작 따위에 내어줄 시간은 없습니다."

그녀는 오직 자신의 비즈니스와 생존만을 위해 이 자리에 있음을, 그리고 자신을 옭아매려던 가문의 손길을 제 손으로 완벽하게 잘라내었음을 대공의 눈앞에서 똑똑히 증명해 보였다.

라인할트는 타오르는 불꽃 너머로 에일라를 응시했다. 가문을 배신하면서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그녀의 오만함과 철저함. 그 모습은 지독히도 위험했으나, 동시에 그의 심장을 걷잡을 수 없이 뛰게 만들었다.

"너는 정말로…… 이해할 수 없는 여자로군."

라인할트의 목소리에 깊은 갈망과 비틀린 소유욕이 섞여 들었다. 그러나 에일라는 그 눈빛을 가볍게 무시하며 돌아섰다.

실컷 이용하고 버려질 줄도 모른 채, 제 발로 덫에 걸려드는 사냥감의 눈빛을 보며 그녀는 속으로 비웃었다.

***

그날 밤, 대공저 외곽의 어두운 골목.

노아는 에일라가 준 금화 주머니와 '3도 오차'의 마법 인장 견본서가 담긴 가죽 가방을 소중히 품에 안은 채 마차에 올랐다.

"빨리 출발해."

그가 긴장된 목소리로 마부에게 지시했다.

말의 발전등이 어둠을 밝히며 마차가 움직이려던 바로 그 순간.

스윽—

차가운 쇠붙이가 마차의 가죽 천장을 뚫고 들어와 노아의 턱밑에 정확히 멈춰 섰다.

날카로운 검날에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가 온몸의 피를 얼려버릴 듯 생생했다. 마차의 문이 서서히 열리며, 어둠 속에서 한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발루아 공작가의 가장 잔혹한 첩보 수사관이자, 루드비히의 충직한 사냥개인 카를이었다.

그의 매서운 칼끝이 노아의 품에 안긴 가죽 가방을 툭툭 건드렸다.

"영애께서 아주 재미있는 장난감을 주문하신 모양이군."

카를의 입가에 잔인한 미소가 걸렸다.

가방 안에는 에일라의 헤이븐 탈출 계획이 담긴 극비 자금 확인서와, 황실의 눈을 속일 3도 오차 인장 견본서가 들어 있었다. 그것이 발각되는 순간, 그녀의 모든 계획은 물거품이 될 터였다.

칼끝이 가죽 가방의 끈을 베어내기 직전, 팽팽한 긴장감이 어둠 속을 가득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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