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덜미를 스치는 백은색 검날은 비단보다 매끄러웠으나, 그 끝에 서린 살기는 한겨울의 서리보다 매서웠다.
성휘 기사단장, 라인할트 폰 크로이츠 대공의 성검이 에일라의 목덜미를 베어낼 듯 멈춰 선 순간이었다. 검날에서 뿜어져 나오는 미세한 신성 마력이 그녀의 얇은 피부를 자극해 붉은 선을 그리려 했다. 당장이라도 숨통을 끊어놓겠다는 듯이 번뜩이는 청색 눈동자가 에일라의 시야를 가득 채웠다.
하지만 에일라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전신을 얼려버릴 듯한 극심한 예시안의 오한이 뼈마디를 타고 흘러내려 심장을 옥죄고 있었으나, 그녀는 상아빛 목덜미를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곧게 세웠다. 오히려 제 목을 겨눈 검날을 향해, 품속에서 꺼낸 두꺼운 양피지 한 장을 느리게 흔들었다.
"이것이 무엇인지 알아보시겠습니까, 대공?"
사각사각, 양피지가 미세하게 떨리며 내는 소리가 긴장으로 터질 듯한 응접실의 정적을 깨뜨렸다. 라인할트의 시선이 아주 찰나의 순간 그녀의 손끝으로 향했다.
그것은 제국 황실의 비밀 정예 기구인 '검은 추적자'가 사용하는 특수 양식의 지령서였다. 짙은 흑색 밀랍 위로 황실의 상징인 외눈박이 까마귀 인장이 정교하게 찍혀 있었다. 단순한 서류가 아니었다. 수도 플로렌의 지하 전체에 그물망처럼 얽혀 있는 마력 감시망을 우회하여, 성휘 기사단장의 사저를 은밀히 에워싸고 침투하라는 구체적인 작전 경로가 상세하게 그려진 정밀 지도이자 황제의 친필 지령서였다.
"이게…… 어떻게 네 손에 있는 거지?"
라인할트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그의 빙청색 눈동자에 서린 의혹이 한층 짙어졌다. 발루아 공작가의 오만방자한 악녀가 황실 최고의 극비 문서를 들고 제 침소에 난입했다는 것 자체가 상식을 벗어난 일이었다.
"황제 안드레아스 폐하께서 당신을 얼마나 정교한 단두대 위에 올려놓으셨는지, 이제야 실감이 나시는 모양이군요."
에일라는 차갑게 미소 지으며 대공의 성검을 향해 오히려 한 걸음 다가섰다. 날카로운 검끝이 그녀의 얇은 쇄골 뼈 부근을 스치며 옷감을 찢었으나,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이능인 '진혼의 예시안'이 강제한 대가는 가혹했다. 발끝에서부터 얼어붙기 시작한 냉기가 이미 명치끝까지 차올라 숨을 쉴 때마다 가슴이 찢어지는 듯했다. 당장 이 남자의 온기를 탐하지 않으면, 몇 분 안에 영혼까지 동사할 것이 분명했다.
에일라는 가느다란 손가락을 뻗어 라인할트의 가죽 장갑이 덮이지 않은 손목 안쪽, 맥박이 뛰는 살갗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읏……!"
짧은 신음이 에일라의 입술 사이로 새어 나왔다.
접촉하는 순간, 라인할트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미세한 신성한 불의 한 자락이 그녀의 손끝을 통해 체내로 밀려들었다. 타오르는 유황과 미르의 향을 머금은 듯한 불꽃의 기운이, 얼어붙어 가던 그녀의 혈관을 거칠게 녹여내기 시작했다. 뇌리를 지배하던 극심한 두통이 걷히고, 심장 박동이 제자리를 찾았다. 에일라는 그 달콤한 구원의 감각에 취하지 않으려 이가 시릴 정도로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정량을 초과한 갈취는 의심을 부른다. 그녀는 철저히 생명줄을 이어갈 만큼의 온기만을 탐욕스럽게, 그러나 지극히 은밀하게 갈취해 지탱했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라인할트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의 손목을 쥔 에일라의 손가락은 얼음 조각처럼 차가웠으나, 그의 마력을 흡수하는 힘만큼은 기이할 정도로 집요했다.
"이 손 치워라, 에일라 드 발루아. 더는 내 인내심을 시험하지 마."
"문밖에 발루아의 사냥개들이 들이닥쳤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뒤에는 황실의 검은 추적자들이 칼을 품고 대기 중이지요. 대공, 당신이 나를 이 방에서 시체로 가문으로 돌려보내는 순간, 당신은 정적의 영애를 납치해 살해한 대역죄인이 됩니다. 황실이 설계한 완벽한 각본대로 말입니다."
에일라는 잡은 손목을 놓아주지 않은 채, 다른 한 손으로 품속에서 또 다른 서류를 꺼내 들었다. 은빛 마력으로 정교하게 짜인 사슬 문양이 표지를 장식하고 있는 책자였다. 제국의 모든 귀족이 영혼의 맹세로 받드는 절대적인 구속력의 도구, '맹약의 은장' 계약서였다.
"서로를 파멸시키기 위해 안달이 난 두 가문이, 그리고 그 틈에서 어부지리를 노리는 황실이 가장 경악할 만한 변수를 던져주는 겁니다. 이를테면…… 정적 관계인 우리 두 사람이 사실은 남몰래 열렬히 연모하는 사이였다는 기만극 말입니다."
"연모라고? 네가 미친 것이냐, 아니면 발루아의 늙은 여우가 새로운 수작을 부리는 것이냐?"
라인할트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실소를 터뜨렸다. 그러나 그의 눈빛은 흔들리고 있었다. 에일라가 제시한 황실의 지령서가 너무나도 진짜였기 때문이다. 성휘 기사단조차 파악하지 못한 황실의 지하 감시망 경로가 그 종이 위에 명확히 기재되어 있었다.
"루드비히 공작은 나를 황실의 칼날 앞에 방패막이로 던졌습니다. 황제는 나를 죽여 발루아와 크로이츠를 동시에 무너뜨릴 덫을 놓았고요. 그러니 이것은 내 생존을 위한 투쟁이자, 당신에게도 나쁘지 않은 제안입니다."
에일라는 맹약의 은장 계약서의 첫 페이지를 펼쳐 보였다. 은빛으로 빛나는 글씨들이 허공에 떠올랐다.
"제1조, 양인은 대외적으로 깊이 연모하는 연인 관계임을 선포하고 이를 철저히 연기한다. 제2조, 성휘 기사단장은 발루아 영애의 신변을 황실과 공작가의 위협으로부터 공식적으로 보호한다. 제3조, 영애는 대공에게 황실의 감시망 정보와 내부 모략 계획을 실시간으로 제공한다……."
그녀는 마치 남의 일을 대독하듯 건조하고 정량화된 어조로 계약 조항을 읽어 내려갔다. 그 목소리 어디에서도 연인 관계를 연기해야 하는 부끄러움이나 설렘은 찾아볼 수 없었다. 오직 철저한 거래와 수치 계산만이 가득한 상인의 눈빛이었다.
라인할트는 그녀의 초록색 눈동자를 깊게 들여다보았다.
원래의 에일라 드 발루아라면 결코 보여주지 않았을 눈빛이었다. 사교계에서 오만하고 잔혹하기로 이름 높았던 그녀는 감정에 휘둘려 날뛰는 폭군에 가까웠다. 하지만 지금 제 눈앞에 서서 목에 칼날을 겨누고도 동등한 비즈니스를 논하는 이 여자는, 지독하리만큼 차분하고 계산적이었다.
"가문의 추방과 황실의 숙청 위기에서 겨우 생존하기 위해, 내게 이런 거대한 사기극을 제안한다고? 고작 네 목숨 하나 건사하자고 제국 전체를 기만하겠다는 소린가."
"고작 목숨 하나라니요. 제게는 이 세상 그 어떤 가치보다 무거운 안위입니다."
에일라가 차갑게 쏘아붙였다. 그녀의 눈가에 서린 자조적인 빛은 이내 오만한 빛으로 대체되었다. 과거 가문의 가스라이팅과 학대 속에서 자라난 그녀에게 타인의 호의나 사랑 따위는 믿을 수 없는 신기루에 불과했다. 오직 문서로 보장된 등가교환만이 그녀가 신뢰할 수 있는 유일한 법칙이었다.
"당신이 나를 믿지 못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니 이 계약의 대가로, 내 심장 박동과 영혼의 링크를 볼모로 잡으십시오."
"영혼 링크를?"
라인할트의 미간이 좁혀졌다. 영혼 링크는 맹약의 은장 중에서도 가장 극단적인 구속 제어 방식이었다. 한쪽이 계약을 위반하거나 거짓을 말할 경우, 마력의 반동이 즉각적으로 심장을 파열시켜 목숨을 앗아가는 저주에 가까운 맹약이었다.
"내가 당신을 배신하거나, 황실의 가락에 맞춰 춤을 추는 순간 내 심장은 그 자리에서 터져 나갈 것입니다. 이보다 확실한 보증이 어디 있겠습니까?"
에일라는 자신의 상아빛 손목을 들어 올렸다. 얇은 핏줄이 비치는 손목은 라인할트의 신성 마력 낙인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는 듯 무방비하게 노출되어 있었다.
문밖에서 다시 한번 육중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울렸다. 발루아 공작가의 기사들이 황실의 수색 영장을 소리 높여 읽기 시작하는 소리가 문틈을 타고 들어왔다. 일촉즉발의 순간이었다.
라인할트는 에일라를 응시했다. 그녀의 몸은 여전히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으나, 눈빛만큼은 흔들림 없는 일직선의 화살 같았다. 그녀가 제시한 황실의 음모는 정교했고, 그녀가 스스로 내건 볼모는 치명적이었다.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아니, 침입자들의 발소리가 복도를 메우는 지금, 그에게도 선택지는 없었다.
"좋다."
라인할트가 마침내 성검을 거두어 칼집에 꽂아 넣었다. 검이 들어맞는 둔탁한 금속음과 함께, 그가 에일라의 손목을 강하게 낚아챘다.
"네 오만함이 스스로를 파멸로 이끄는 독이 될지, 아니면 내 칼날이 될지 지켜보지."
그는 자신의 검지 손가락 끝에 신성한 마력을 모았다. 붉고 뜨거운 불꽃의 기운이 그의 손가락 끝에서 응축되며 찬란한 백금색 빛을 내뿜었다. 맹약의 은장을 그녀의 영혼과 육체에 각인시키기 위한 의식이었다.
라인할트가 에일라의 가녀린 손목 안쪽에 손가락을 대고 마력을 밀어 넣었다.
"내 허락 없이 죽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는 계약이다, 에일라."
낙인이 살갗을 파고드는 순간, 에일라는 제 손목이 불에 달군 인장으로 지져지는 듯한 극심한 열감을 느꼈다. 고통스러웠으나, 동시에 체내를 지배하던 지독한 한기가 썰물처럼 밀려 나가는 해방감이 전신을 감쌌다.
그러나 그 순간, 기이한 이변이 일어났다.
"……윽?!"
갑자기 라인할트의 안색이 하얗게 질려 들어갔다.
그가 밀어 넣던 신성 마력이 단순한 각인을 넘어, 폭포수처럼 에일라의 몸속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에일라의 마력 중심부에 내재된 차가운 심연이, 라인할트가 지닌 신성한 불꽃의 근원을 강제로 움켜쥐고 무자비하게 뜯어내고 있었다.
"무슨…… 짓을 한 거냐!"
라인할트가 손을 떼려 했으나, 두 사람의 영혼이 얽힌 은장의 사슬은 오히려 더욱 단단하게 조여들며 그의 마력을 사정없이 흡수했다. 그의 영혼 깊은 곳에서부터 신성력이 통째로 뜯겨나가는 미증유의 감각에, 제국 최고의 성기사단장인 라인할트 대공의 눈동자가 난생처음으로 거대한 공포와 충격으로 뒤흔들렸다.
두 사람의 마력이 충돌하는 지점에서 발생한 백은색 불꽃이 응접실의 가구들을 집어삼킬 듯이 일렁였다.
타오르는 유황과 마른 장미 향이 뒤섞인 매캐한 증기가 바닥에 깔린 수입 카펫 위로 흐트러졌다. 라인할트는 이를 악물었다. 그의 단단한 어깨가 겉잡을 수 없이 떨리고 있었다. 가문을 수호하는 성스러운 불꽃은 그의 의지와 상관없이, 에일라라는 차가운 심연을 향해 기이할 정도로 빠르게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마치 메마른 모래더미가 폭우를 집어삼키듯, 그녀의 마력 회로는 그의 신성을 탐욕스럽게 탐하고 있었다.
"너…… 내게 무슨 주술을 건 거지? 이 손을 놓아라!"
라인할트의 낮고 거친 목소리에 서린 것은 분노를 넘어선 경악이었다. 그는 억지로 손목을 뒤로 빼려 했으나, 공중에서 얽힌 은빛 사슬—맹약의 마력 사슬이 두 사람의 손목을 단단히 옭아매고 있었다. 계약이 완전히 체결되어 각인이 새겨지기 전까지는 그 누구도 이 결속을 끊을 수 없었다.
그 순간, 에일라의 뇌리가 깨질 듯한 통증과 함께 하얗게 점멸했다.
그녀의 영혼 깊은 곳에 웅크리고 있던 죽음의 이능, '진혼의 예시안'이 라인할트의 막대한 신성력을 촉매 삼아 폭발적으로 깨어난 것이다. 시야가 붉게 물들며, 왜곡되고 파편화된 예지의 환영이 그녀의 눈앞에 강제로 펼쳐졌다.
—*‘문 너머, 발루아의 기사단장 손에 들린 자색 마정석. 성수 오염을 감지하는 탐색석이 그녀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빙결의 이능을 감지해 붉게 타오른다. 들이닥치는 순간, 그녀는 마녀로 기소되어 그 자리에서 심장이 꿰뚫릴 것이다.’*
‘안 돼.’
에일라의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황실과 가문이 준비한 덫은 정교했다. 단순히 그녀를 찾아내 납치극의 피해자로 만드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다. 그녀의 몸에 깃든 이질적이고 불완전한 빙결 마력을 '마녀의 증거'로 몰아, 크로이츠 대공가와 발루아 공작가 모두를 파멸로 몰고 가려는 음모였다. 지금 이 순간, 그녀의 체내에 남은 예시안의 오한을 완벽하게 숨기지 못한다면 문이 열리는 즉시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갈 터였다.
살기 위해서는 더 많은 온기가 필요했다. 라인할트의 신성한 불꽃으로 그녀의 얼어붙은 마력 흐름을 완벽하게 덮어써야만 했다.
"대공, 엄살 부리지 마십시오."
에일라는 이를 악물고 차가운 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오히려 라인할트의 옷자락을 강하게 잡아끌며, 그의 넓은 품 안으로 제 몸을 밀착시켰다.
바스락거리는 비단 드레스 자락이 그의 단단한 가죽 갑주와 마찰하며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라인할트의 가슴팍에 이마를 기댄 에일라는, 그의 목덜미를 향해 가느다란 팔을 뻗어 단단히 감싸 안았다.
"미쳤군……! 감히 어디를 범하려 드느냐!"
라인할트의 몸이 발작하듯 굳어졌다. 그의 청색 눈동자가 수치심과 분노로 붉게 달아올랐다. 평생을 성결과 규율 속에서 살아온 성기사단장에게, 정적의 영애가 이토록 노골적으로 몸을 밀착해 오는 상황은 생소함을 넘어 모욕에 가까웠다.
하지만 에일라는 개의치 않았다. 그녀의 뺨이 그의 뜨거운 목덜미에 닿았고, 그곳에서 뿜어져 나오는 살인적인 열기가 그녀의 차가운 피부를 녹여내렸다.
"가만히 있으십시오, 라인할트. 살고 싶다면."
그녀의 서리 가득한 목소리가 그의 귓가에 속삭이듯 감돌았다.
"문밖의 기사들이 들고 있는 것은 단순한 수색 영장이 아닙니다. 마력 탐색석입니다. 내 몸에서 풍기는 이능의 흔적을 감지하는 순간, 당신과 나 모두 이 자리에서 반역과 마도 죄인으로 낙인찍힐 겁니다."
"그게 무슨……."
"당신의 그 뜨거운 신성력으로 나를 완전히 덮으란 말입니다! 내 마력이 당신의 불꽃 아래로 숨을 수 있도록!"
에일라는 그의 심장 부근을 손끝으로 강하게 짓눌렀다.
그녀의 극단적인 거래주의는 이 무자비한 신체 접촉마저도 철저한 계산의 영역으로 치부하고 있었다. 수치심도, 설렘도 없었다. 오직 생존을 위해 상대의 가장 귀중한 자원을 약탈하는 포식자의 눈빛만이 그녀의 초록빛 눈동자 속에서 번뜩였다.
라인할트는 그녀의 오만한 명령에 기가 막혔으나, 동시에 그녀의 말이 지닌 기이한 확신을 무시할 수 없었다. 문밖에서 들려오는 마력 파동이 심상치 않았다. 확실히 단순한 수색 기사들의 마력이 아니었다. 이계를 탐지하는 특수 마도구의 공명이 복도 전체를 진동시키고 있었다.
결국 라인할트는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나직한 저주를 내뱉으며, 에일라의 가느다란 허리를 한 손으로 강하게 감싸 안았다. 제 품에 안긴 여인은 깃털처럼 가벼웠으나, 그 안에서 소용돌이치는 얼음의 힘은 그의 신성을 끊임없이 갈구하고 있었다.
"이 대가는 뼈저리게 치르게 될 것이다, 에일라 드 발루아."
그가 폭발적인 신성 마력을 방출했다. 백금색의 불꽃이 두 사람의 신체를 완전히 휘감으며 장막을 형성했다. 에일라의 체내로 밀려드는 뜨거운 기운은 그녀의 영혼을 태워버릴 듯 강렬했으나, 그녀는 신음 소리 하나 내지 않고 그 고통을 고스란히 감내했다.
마침내 은장의 맹약 사슬이 두 사람의 손목 위에서 마찰음을 내며 녹아내려, 가느다란 은빛 팔찌의 형상으로 피부 위에 완전히 각인되었다. 계약이 성립된 것이다.
동시에, 굳게 닫혀 있던 응접실의 육중한 문이 거친 마력 파동과 함께 굉음을 내며 부서져 나갔다.
쿵—!
"황실의 명이다! 대공 전하, 발루아 공작가의 영애를 은닉하고 있다는 혐의로……!"
먼지 구름을 헤치며 방 안으로 들이닥친 발루아의 기사단장과 황실의 검은 추적자들이 일제히 검을 뽑아 들었다. 기사단장의 손에는 예시안의 예지대로 자색으로 흉포하게 빛나는 마력 탐색석이 들려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마주한 광경은, 그들이 예상했던 '납치당해 죽어가는 영애'의 모습이 아니었다.
흐트러진 시트와 부서진 가구들의 잔해 속에서, 성휘 기사단장 라인할트 대공이 한 여인을 제 품에 안은 채 오만한 자세로 침대에 걸터앉아 있었다. 그의 붉게 달아오른 얼굴과 거친 숨소리, 그리고 그의 품에 안겨 가쁜 숨을 몰아쉬며 붉어진 뺨을 그의 가슴에 묻고 있는 에일라 드 발루아의 모습은, 누가 보아도 방금 전까지 격정적인 밀회를 나누던 연인의 그것이었다.
라인할트가 침입자들을 향해 빙청색 눈동자를 서늘하게 빛내며, 낮고 위압적인 목소리로 물었다.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무기를 빼 드는가. 내 사적인 침소까지 유린하라는 것이 황제 폐하의 명인가?"
기사단장의 손에 들린 자색 마정석은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은 채, 그저 차갑게 식어 있었다. 에일라의 이능은 라인할트의 압도적인 신성력 아래 완벽하게 은폐되어 있었다.
수색 대원들이 당혹감에 동요하는 순간, 에일라는 라인할트의 품속에서 살며시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입가에 걸린 미소는 지극히 매혹적이면서도, 들이닥친 이들을 향한 조소로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그 순간, 에일라는 자신을 감싸 안은 라인할트의 손길에 기이할 정도의 강한 힘이 실리는 것을 느꼈다.
허리를 조여오는 그의 손가락이 굳건하게 그녀를 구속하고 있었다. 그녀가 제 목숨을 건사하기 위해 던진 사기극의 덫에, 제발로 걸어 들어간 성기사단장의 눈빛이 이질적인 소유욕으로 타오르기 시작한 것은 바로 그 찰나의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