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흘 전, 제국 황실의 지하 고문실에서 벌어진 참상은 이곳 북부의 가장자리까지 도달하지 못했다. 루드비히 드 발루아가 단두대 아래에서 추하게 침을 흘리며 에일라의 도주 경로를 밀고하던 그 순간, 라인할트 폰 크로이츠 대공이 손목의 은장 맹약 상흔에서 피를 흘리며 북쪽을 향해 토벌군을 몰고 폭풍처럼 진격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헤이븐의 주민들은 알지 못했다. 그러나 그 폭풍의 중심에 선 당사자인 에일라 드 발루아만큼은 예외였다.
제국의 법령이 미치지 않는 혹한의 무법지대, 헤이븐.
창밖으로는 뼈를 깎는 듯한 북풍이 몰아치며 침엽수림의 가지를 꺾어대고 있었지만, 에일라가 머무는 저택의 응접실은 기묘할 정도로 정취가 넘쳤다. 벽난로에서 타오르는 자작나무 장작이 톡톡 소리를 내며 붉은 불꽃을 튀겼고, 탁자 위에는 정교하게 세공된 은제 찻잔에서 실론 티의 쌉싸름하고도 달콤한 향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은화 백 개짜리 가죽 자루가 정확히 열두 개입니다. 이번 주 혹한기 제설 약재 공급으로 벌어들인 순수익이죠. 제국 중부의 영지 하나에서 나오는 분기 세금과 맞먹는 액수입니다, 에일라 영애."
노아가 두꺼운 양모 장갑을 벗으며 탁자 위에 가죽 자루들을 내려놓았다. 자루들이 부딪치며 내는 묵직하고 둔탁한 금속음이 밀폐된 방 안에 기분 좋게 울려 퍼졌다. 노아의 입꼬리가 탐욕스러우면서도 경탄에 찬 호선을 그렸다.
"제국의 귀족들이 헤이븐의 눈보라를 피해 성벽 안에서 벌벌 떨 때, 그 눈을 녹일 황산염 약재를 독점할 생각을 하시다니. 역시 영애의 머리는 돈의 흐름을 가장 우아하게 짚어내는군요."
"독점이 아니라 합리적인 분배라고 해 두지, 노아."
에일라는 찻잔을 들어 가볍게 입술을 적셨다. 온기가 입술을 타고 번졌으나, 그녀의 눈동자는 여전히 얼어붙은 호수처럼 차갑고 고요했다. 그녀가 입은 짙은 감청색 벨벳 드레스의 소매 끝동에는 은실로 촘촘히 수놓아진 들장미 문양이 정교하게 반짝였다. 가문의 속박에서 벗어나 이곳 헤이븐에 정착한 이후, 그녀는 비로소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로운 자신만의 독립된 영토를 구축해 나가고 있었다.
"이곳에선 돈이 곧 법이고 권력이야. 제국 기사단이 들이닥친다 해도, 헤이븐의 무법자들이 우리 편을 들게 하려면 이보다 확실한 보증수표는 없지."
그녀의 목소리에는 일말의 흔들림도 없었다. 과거 발루아 공작가에서 겪었던 지독한 학대와 가스라이팅은 그녀를 극단적인 거래주의자로 만들었다. 타인의 호의와 애정 따위는 언제든 배신으로 돌아올 수 있는 위조지폐와 같다. 오직 눈에 보이고, 정량화할 수 있는 금전과 계약서만이 그녀가 신뢰하는 유일한 도구였다.
그때, 노아가 품 안에서 붉은 인장이 찍힌 제국 수도의 저녁 신문을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이 먼 북부까지 신문이 배달되기 위해선 마법 전령조를 통한 막대한 운송료가 들었지만, 에일라는 제국의 동향을 파악하기 위해 그 비용을 아끼지 않았다.
"오늘 아침에 도착한 수도의 소식입니다. 영애께서 아주 흥미로워하실 만한 내용이 1면을 장식했더군요."
에일라는 우아한 손가락으로 신문의 첫 페이지를 펼쳤다.
[발루아 공작가, 반역죄로 종말을 고하다. 황실 직속 '검은 추적자'와 성휘 기사단의 합동 단죄 하에 하루 만에 참수 및 일족 전원 광산 노역형 강등.]
신문의 지면은 피비린내 나는 활자로 가득했다. 가문을 지키겠다는 허울 좋은 명분 아래 에일라를 황실의 사냥개 앞에 방패막이로 던지려 했던 조부, 루드비히 드 발루아의 비참한 최후가 상세히 기록되어 있었다.
평생을 오만하고 고결한 척 군림하던 노인은 단두대 위에서 목이 잘리기 직전까지 미친 사람처럼 에일라의 이름을 부르짖었다고 적혀 있었다. 그녀가 숨겨둔 자금과 이능의 비밀을 털어놓으라며, 자신을 이 비참한 운명에서 구원해 내라고 울부짖는 소리가 광장을 가득 채웠다는 대목이 눈에 들어왔다.
"저런."
에일라의 입술 사이로 짧고 건조한 탄식이 흘러나왔다. 그러나 그녀의 눈가에는 눈물 한 방울, 혹은 일말의 슬픔조차 서려 있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손길은 지극히 태연하고 무심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에일라는 루드비히의 처참한 처형 장면이 그려진 신문 지면을 거침없이 찢어발겼다. 그리고는 벽난로의 쇠창살 틈새로 그 종이 뭉치를 밀어 넣었다.
불꽃이 종이에 닿는 순간, 순식간에 검붉은 불길이 피어오르며 루드비히의 일그러진 얼굴이 인쇄된 지면을 집어삼켰다. 에일라는 벽난로 위에 걸려 있던 쇠꼬챙이를 들어 타오르는 종이 더미 위에 두꺼운 양고기 덩어리를 얹었다. 지글거리는 기름 소리와 함께 고기 굽는 고소한 냄새가 방 안을 채웠다.
"과거를 청산하는 불쏘개개 치고는 제법 화력이 좋군. 오늘 저녁 고기는 아주 맛있게 익겠어."
그녀를 평생 죔쇠처럼 얽매며 괴롭히던 가문의 몰락을 바라보면서도, 에일라는 침 한 방울 뱉지 않는 냉정함의 극치를 보였다. 노아는 그녀의 철저하리만치 무감각한 태도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끼며 마른침을 삼켰다. 과거의 트라우마에 짓눌려 울부짖는 대신, 그것을 한낱 고기 구이용 땔감으로 써버리는 그녀의 오만함은 헤이븐의 그 어떤 무법자보다도 잔혹하고 아름다웠다.
그러나 그 평화로운 광경도 잠시였다.
쿵.
에일라의 가슴 한가운데, 심장보다 깊숙한 마력의 중심부에서 이질적이고 뜨거운 박동이 일었다.
"……!"
에일라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미세하게 미간을 찌푸렸다.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그녀의 영혼 내부에서 기생하듯 요동치는 불꽃. 그것은 과거 라인할트와의 밀접한 체온 연성 도중 그녀의 마력 회로에 정착해 버린 그 남자의 신성한 불꽃 잔해였다.
과거 대성당 지하에서 가문과 황실이 연합해 설치했던 고난도 마력 봉인 결계를 내부에서 파열시키는 미세 열쇠로 요긴하게 써먹었던 불꽃이었으나, 지금은 전혀 다른 용도로 작동하고 있었다.
라인할트 폰 크로이츠의 물리적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이 잔해는 그의 본체와 공명하며 과열 반응을 일으켰다. 매 시간이 흐를 때마다 가슴을 찌르는 듯한 열감이 강해지고 있었다. 그가 제국의 국경을 넘어, 무서운 속도로 헤이븐을 향해 북진하고 있다는 명백한 경고였다.
"그 미친 사내가 정말로 국경을 넘었군."
에일라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그녀는 품 안에서 작은 비단 주머니를 꺼내 탁자 위에 쏟아냈다. 그 안에서 굴러 나온 것은 영롱한 푸른빛을 발하는, 얼음처럼 차가우면서도 내부에 불꽃을 품은 듯한 '동화 보석'이었다. 과거 라인할트가 자신의 온기를 담아 에일라에게 주었던, 그의 비틀린 사랑과 후회의 증표였다.
하지만 에일라에게 이것은 단순한 감정의 쓰레기통에 불과했다. 그녀는 헤이븐으로 탈출하기 직전, 감정 평가사를 통해 이 보석의 가치를 철저하게 정량화했다.
7만 골드.
그녀는 보석의 가치를 정확히 환산한 명세서와 함께, '비싼 위약금 대체물 수취 거부 명세서'를 작성했다. 그리고 그것을 대공저 서재의 책상 위, 자신들이 맺었던 '맹약의 은장' 계약서의 껍데기 위에 차갑게 던져두고 왔었다. 네가 준 사랑과 후회는 내 장부상에서 정확히 7만 골드짜리 계약 위약금으로 처리되었으며, 나는 그것조차 수취를 거부하노라는 냉혹한 선언이었다.
자신의 온 영혼을 바친 고백이 한낱 수수료 계산서로 치부되어 버렸음을 알았을 때, 라인할트가 느꼈을 배신감과 절망은 상상조차 할 수 없으리라. 그 결과가 바로 지금 그녀의 심장을 타고 전해오는 광포한 마력의 진동이었다.
"노아."
에일라가 차분한 목소리로 지시했다.
"침묵의 계곡으로 통하는 가파른 함정 경로에 미리 준비해 둔 전술 수액을 매립해."
"예? 하지만 거긴 제국군이 우회할 수 없는 외길입니다. 대공의 성휘 기사단이 그곳을 지나간다면……."
"막으려는 게 아니야. 지연시키는 거지."
에일라가 차갑게 웃으며 찻잔을 매만졌다.
"그가 품은 신성한 불이 이 혹독한 헤이븐의 추위 속에서, 그리고 내가 파놓은 함정들을 돌파하며 얼마나 소모되는지 정밀하게 계산해야 하니까. 그의 체온이 내 생명을 유지할 유일한 해독제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아. 하지만 그를 내 침소로 들이기 전에, 그의 이빨과 발톱을 완전히 뽑아놓아야 내가 안전하게 거래를 주도할 수 있지."
그녀는 여전히 라인할트를 사랑하는 연인이 아닌, 자신을 살려줄 가장 효율적이고 통제 가능한 '해독제 가축'으로만 취급하고 있었다. 그의 집착조차 계산기 위의 숫자로 치부하는 그녀의 철저함에 노아는 경외감을 느끼며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즉시 배치하겠습니다."
노아가 서둘러 방을 나선 뒤, 에일라는 홀로 벽난로 앞에 서서 타들어 가는 고기를 바라보았다.
가슴속의 불꽃이 점점 더 뜨겁게 요동쳤다. 마치 날카로운 송곳으로 심장을 찌르는 듯한 감각이었다. 라인할트가 다가오고 있었다. 머지않은 시간 내에, 이 방의 문을 열고 그가 들이닥칠 것이다.
폭풍이 창문을 사정없이 두들겼다. 유리에 성에가 하얗게 서리며 방 안의 온도가 급격히 떨어지기 시작했다. 에일라는 코트 깃을 여미며 가만히 숨을 내쉬었다. 입김이 하얗게 바스러졌다.
그녀의 이능, '진혼의 예시안'이 작동하려는 듯 시야의 가장자리가 푸르게 흐려졌다. 전신을 얼려 죽일 듯한 오한이 서서히 발끝에서부터 타고 올라오는 것이 느껴졌다. 해독제가 필요한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 해독제는 광기에 젖어 그녀를 파멸시키기 위해 이곳으로 오고 있었다.
그때였다.
덜컥, 쿵!
저택 아래층의 외문이 찢어지는 듯한 굉음과 함께 박살이 났다.
차가운 눈보라가 계단을 타고 응접실 문턱까지 들이닥쳤다. 가슴속의 불꽃이 비명을 지르듯 과열되어 터질 것처럼 진동했다.
에일라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문가를 바라보았다.
얼어붙은 침묵의 계곡을 가로질러, 그녀가 설치해 둔 모든 전술 함정과 지연책을 한 줌의 재로 만들어버리며 돌파한 사내.
순백이었던 성기사의 갑주는 검붉은 피로 지저분하게 물들어 있었고, 그의 어깨 위에는 차가운 눈보라 대신 광포하게 타오르는 진홍빛 신성의 불꽃이 휘감겨 있었다. 폭풍을 뚫고 홀로 당도한 대공 라인할트 폰 크로이츠가, 숨을 헐떡이며 온몸으로 괴물 같은 살기와 소유욕을 내뿜은 채 에일라의 아지트 문턱 아래에 깊고 어두운 그림자를 투사하고 있었다.
그의 붉게 충혈된 눈동자가 에일라의 시선과 허공에서 격렬하게 부딪쳤다.
한 걸음, 사내가 디딘 발자국을 따라 갑주에 엉겨 붙어 있던 북부의 만년설이 비참하게 녹아내렸다. 바닥의 카펫 위로 그을린 물자국이 어지럽게 번졌다.
그의 검은 그림자가 에일라의 발끝을 집어삼킬 듯이 길게 늘어졌다. 피와 타버린 유황의 냄새가 실론 티의 우아한 향을 단숨에 찢어발기며 방 안을 오염시켰다.
"7만 골드."
라인할트가 떨리는 입술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사막의 모래바람처럼 거칠고 메말라 있었다.
그가 가죽 장갑을 낀 손으로 품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 탁자 위로 거칠게 내던졌다. 툭, 하고 떨어진 것은 구겨질 대로 구겨진 종이 뭉치였다. 에일라가 대공저에 남겨두고 왔던 바로 그 '수취 거부 명세서'였다.
"내 심장을 도려내고, 내 영혼을 짓밟은 대가가 고작 제국 금화 7만 개라니."
그의 눈가에 맺힌 핏발이 가늘게 떨렸다. 분노와 배신감, 그리고 기어코 그녀를 찾아내고야 말았다는 광포한 안도감이 뒤섞인 눈빛이었다.
"에일라 드 발루아. 너에게 내 사랑은, 내가 바친 구원은 고작 장부상의 숫자에 불과했나?"
그의 손가락 끝에서 붉은 신성의 불꽃이 성이 난 포수처럼 일렁였다. 당장이라도 이 저택을, 그리고 그녀가 쌓아 올린 이 조그만 영토를 통째로 불태워버릴 듯한 기세였다.
그러나 에일라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녀는 찻잔을 탁자 위에 소리 없이 내려놓았다. 달캉, 하는 맑은 파열음이 방 안의 팽팽한 침묵을 깨뜨렸다.
"숫자만큼 명확하고 아름다운 기준은 없으니까요, 대공 전하."
에일라가 우아하게 턱을 치켜세웠다. 그녀의 목소리는 서리 맞은 유리창처럼 차갑고 매끄러웠다.
"감정은 변하지만, 장부는 변하지 않죠. 전하께서 제게 주신 보석의 시장 가치는 정확히 그 정도였습니다. 위약금으로서는 차고 넘치는 액수였으니, 서로 깔끔하게 정산한 것으로 생각했습니다만."
"정산……?"
라인할트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실소인지 오열인지 모를 나직한 소리가 그의 가슴 깊은 곳에서 터져 나왔다.
그는 에일라가 자신을 철저히 '해독제'로 착취하고 버렸음을 머리로는 이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입에서 직접 흘러나오는 그 잔인한 계산서를 마주하자, 그의 심장은 다시 한번 갈가리 찢겨 나갔다.
그럼에도 사내는 그녀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자신을 조롱하는 그 차가운 입술마저도, 지독하리만큼 오만한 그 눈동자마저도 그에게는 유일한 구원이었다.
"너는 참으로 잔인하군. 나를 이토록 비참하게 만들어 놓고, 이곳에서 홀로 아늑한 성을 짓고 살고 있었다니."
라인할트가 한 걸음 더 다가왔다. 그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가 에일라의 뺨을 뜨겁게 달구었다.
동시에 에일라의 전신을 지배하던 '진혼의 예시안'의 페널티가 한계에 다다랐다. 발끝에서부터 시작된 오한이 허리를 타고 올라와 그녀의 심장을 얼려버릴 듯이 옥죄어 왔다. 피부 표면에 미세한 성에가 돋아나기 시작했고, 숨을 들이쉴 때마다 폐부가 얼어붙는 통증이 느껴졌다.
수명이 깎여 나가는 극도의 고통 속에서도, 에일라는 라인할트의 뜨거운 온기를 탐하는 내색을 전혀 하지 않았다. 그녀의 눈동자는 여전히 포식자를 내려다보는 지배자의 그것이었다.
그녀는 소맷자락 속에서 미리 준비해 둔 새로운 양피지 한 장을 꺼내 탁자 위에 펼쳐 놓았다.
"발을 멈추세요, 전하. 더 다가오면 이 계약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양피지의 상단에는 붉은 마력 인장과 함께 정갈하게 쓰인 문구가 빛나고 있었다.
[헤이븐 영지 임대 및 체온 연성 독점 공급 계약서]
라인할트의 시선이 양피지 위로 떨어졌다. 에일라는 시려오는 손가락 끝을 숨기며, 얼음처럼 차가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전하의 발톱과 이빨을 드러낸 채 제 영토에 머무를 수는 없습니다. 제국 대공으로서의 지위와 군대를 국경 너머로 물리고, 오직 제 개인 '해독제 공급원'으로서만 이곳에 남으십시오. 매달 정해진 양의 신성한 불꽃을 제게 제공하는 대가로, 전하께 제 곁에 머무를 권리를 임대해 드리겠습니다."
그녀는 자신을 추격해 온 광포한 대공에게, 다시 한번 철저하게 정량화된 '비즈니스 맹약'을 들이밀고 있었다.
그의 집착과 후회마저도 자신의 생존을 위한 자원으로 완벽하게 통제하겠다는 오만한 선언이었다.
라인할트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제국의 영웅이자 성기사단장인 그에게, 이 계약서는 영혼을 노예로 팔아넘기라는 자발적 굴복 요구서와 다름없었다.
"내가 이 계약을 거부하고, 너를 억지로 끌고 돌아간다면 어쩔 셈이지?"
라인할트가 검자루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신성의 불꽃이 웅장하게 요동쳤다.
에일라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한으로 인해 전신이 무너져 내릴 것 같았지만, 그녀는 단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은 채 그의 불꽃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해보시지요. 하지만 기억해 두세요. 제 몸에 강제로 손을 대는 순간, 제 심장 속의 동조 불꽃 잔해는 폭발하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전하께서 제게 억지로 온기를 주입하려 하신다면, 그 즉시 전하의 손으로 제 심장을 터뜨리게 될 겁니다."
그것은 완벽한 거짓말이자, 왜곡된 예지 정보를 바탕으로 설계한 정교한 도박이었다.
하지만 라인할트에게는 그 도박을 검증할 용기가 없었다. 에일라의 목숨이 걸린 일이라면, 그는 단 1퍼센트의 위험조차 감수할 수 없는 나약한 피포식자에 불과했으니까.
"……."
라인할트의 거친 숨소리가 점차 잦아들었다. 그의 어깨를 휘감고 있던 살기가 허무하게 무너지며, 사내의 전신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그는 천천히 검을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타들어 가는 벽난로의 불빛 아래, 제국 역사상 가장 고결했던 기사가 오만한 악녀의 발치 아래 구걸하듯 고개를 숙였다.
"기어코 나를 가축으로 부리겠다는 뜻이군, 에일라."
그의 목소리에 서린 것은 분노가 아닌, 지독하리만큼 깊은 체념과 쾌락이었다. 그녀가 자신을 도구로써 필요로 한다는 사실 그 자체가, 그에게는 유일한 존재 이유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가 떨리는 손을 뻗어 탁자 위의 새 계약서로 향했다.
바로 그 순간, 저택 외부에서 헤이븐의 무법자들이 지르는 비명과 함께, 제국 황실 직속 '검은 추적자'들의 기괴한 마력 파동이 저택 전체를 거세게 뒤흔들며 침입을 알려왔다. 루드비히가 남긴 마지막 덫이 기어코 이곳까지 뻗쳐온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