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계간에 가로놓인 얼어붙은 침묵의 계곡 입구에 새하얀 성기사 갑주를 붉게 물들인 대공 라인할트가 홀로 폭풍을 뚫고 괴물 같은 살기로 그녀의 아지트 문턱 아래에 그림자를 깊게 투사한다.

휘몰아치는 설산의 동풍이 아지트의 낡은 참나무 문짝을 거칠게 두드렸고, 이내 쩍 갈라지는 굉음과 함께 쇠붙이로 고정된 문고리가 비참하게 뜯겨 나갔다. 매서운 눈보라가 실내로 들이닥치며 촛불의 미약한 온기를 사정없이 집어삼켰다. 동빙(凍氷)의 장막을 찢고 들어선 사내의 형상은 제국의 영웅이라 불리던 고결한 대공의 모습이 아니었다. 어깨를 덮은 백은색 견갑에는 검붉게 굳어 버린 누군가의 혈흔이 사선으로 길게 얼룩져 있었고, 그의 거친 숨결이 닿는 곳마다 하얀 김이 서려 흩어졌다.

라인할트 폰 크로이츠.

그는 붉게 충혈된 눈으로 에일라를 응시했다. 오만하게 치켜올라가던 눈꼬리는 처참하게 무너져 내렸고, 굳게 다물린 입술 사이로 오직 그녀만을 향한 광포한 소유욕과 짓무른 후회가 섞여 들었다. 사내가 비틀거리며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바닥에 얼어붙은 서리가 사각거리며 부서졌다.

"에일라……."

그의 부름은 짐승의 으르렁거림과도 같았고, 동시에 구원을 바라는 신도의 애원과도 같았다. 라인할트는 사정없이 떨리는 손을 뻗어 에일라의 얇은 어깨를 움켜쥐었다. 가죽 장갑 너머로 느껴지는 그의 악력은 뼈가 으스러질 듯 강렬했으나, 그와 동시에 기이할 정도의 열기가 에일라의 어깨를 타고 스며들었다.

그 순간, 에일라의 마력 중심부 깊은 곳에 기생하듯 정착해 있던 미세한 신성 불꽃의 잔해가 세차게 요동쳤다. 과거 라인할트와의 밀착 연성 도중 그녀의 심장 가장자리에 영구히 각인되어 버린 그 기현상이, 주인의 진짜 온기를 마주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붉은 빛을 발하며 공명하기 시작한 것이다. 가슴팍을 찌르는 찌릿한 자극과 함께 전신을 짓누르던 예시안의 혹독한 오한이 일순간 뒤로 물러섰다.

"내 모든 것을 가져가라."

라인할트가 낮게 읊조렸다. 그의 얼굴이 에일라의 뺨 바로 옆까지 다가왔다. 뜨겁고도 거친 숨결이 그녀의 살결에 닿아 서늘한 피부를 녹였다.

"내 심장을 도려내어 네 마력의 노로 삼아도 좋고, 내 신성을 기화시켜 네 수명을 늘리는 땔감으로 써도 좋다. 오직…… 나를 이대로 버려두지만 마라. 네 계산서에 내 가치가 단 한 푼이라도 남아 있다면, 나를 네 곁에 묶어 두란 말이다."

피폐함의 극을 달리는 사내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불빛 속에서 기괴하게 번뜩였다. 제국 최고의 무인이 오직 한 여자에게 영혼을 잠식당한 채, 자발적인 제물이 되겠노라 목을 내밀고 있는 꼴이었다.

그러나 에일라 드 발루아는 그 절박한 구애 속에서도 단 한 치의 감정적 동요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녀의 눈동자는 헤이븐의 만년설보다도 차갑고 투명했다. 가혹한 학대와 기만으로 얼룩진 과거의 삶은 그녀에게 철저한 교훈을 남겼다. 인간의 감정이란 가장 부서지기 쉬운 정략적 사기극에 불과하며, 오직 명확하게 수치화된 계약과 등가교환만이 배신하지 않는 진리라는 것을.

"전하, 흥분하셨군요."

에일라가 낮고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녀는 어깨를 쥔 라인할트의 손을 은밀하면서도 단호한 힘으로 밀어냈다. 그리고는 품 안에서 묵직한 가죽 주머니와 두꺼운 양장 서류철을 꺼내 메마른 참나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탁 소리와 함께 주머니가 열리며, 그 안에서 영롱한 오색 빛깔을 내뿜는 결정 하나가 굴러 나왔다. 과거 라인할트가 자신의 사랑과 후회를 담아 에일라에게 밀어 넣었던 가문의 비보, '동화 보석'이었다.

"이것부터 돌려드리도록 하지요."

에일라가 보석 옆에 정교하게 작성된 가치 평가서 한 장을 미끄러뜨렸다.

"제국 상업 연합과 헤이븐의 감정사들을 통해 공인받은 가치 평가서입니다. 전하께서 제게 주신 이 보석의 순수한 마력적 가치와 희귀성을 정량화한 결과, 미화 기준으로 정확히 이만 오천 골드의 가치가 책정되었습니다. 이를 지난 맹약의 은장 계약 파기에 따른 '위약금 대체물'로 정식 수취하겠습니다."

"에일라, 내가 네게 준 것은 그런 돈 따위로……!"

"또한."

에일라는 라인할트의 말을 가차 없이 자르며, 그 위에 붉은 인장이 찍힌 수취 거부 명세서와 맹약 수수료 정산서를 대공의 은장 계약서 껍데기 위에 툭 던졌다.

"보석의 정서적 교감 기능에 대해서는 제게 무용하므로 그 가치를 '영(0)'으로 처리하여 반환 신청서를 첨부했습니다. 전하의 감정은 제 계약서에 기재될 수 없는 초과 자산이니까요. 자, 이것으로 이전 계약의 모든 채권·채무 관계는 완벽하게 청산되었습니다."

라인할트의 얼굴이 참담하게 일그러졌다. 자신이 바친 온전한 마음이 고작 몇 장의 명세서와 골드 단위의 수치로 환산되어 쓰레기처럼 처분당하는 광경을 목격한 사내의 눈가에 깊은 균열이 일었다.

하지만 에일라는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새로 인쇄된 양장 서류철을 라인할트의 턱밑에 바짝 들이밀었다. 은박으로 테두리가 장식된 서류의 제목은 선명했다.

[영구 비즈니스 고문 채용 계약서 및 사유지 진입 금지 벌칙 맹약서]

"새로운 제안입니다, 라인할트 전하."

에일라가 깃펜을 들어 서류의 특정 조항을 가리켰다.

"매달 정해진 양의 신성한 불꽃을 제게 지속적으로 공급하는 대가로, 전하께는 '헤이븐 사유지 내 조건부 일시 방문 권한'을 임대해 드리겠습니다. 단, 방문 시간은 매회 2시간을 초과할 수 없으며, 제 허가 없이 제 몸에 손을 대거나 사적 대화를 시도할 경우 매회 오천 골드의 벌금이 부과됩니다."

"고문…… 채용 계약이라고?"

"예. 철저한 비즈니스 파트너로서의 관계만을 허용하겠다는 뜻입니다. 이를 거부하신다면, 이 자리에서 즉시 계약은 파기되며 저는 다시 한번 종적을 감출 것입니다. 심장 속 동조 불꽃의 자폭 술식은 여전히 유효하니까요."

그녀는 거짓말을 섞어 가며 라인할트의 가슴에 가시를 박아 넣었다. 제국 최강의 성기사단장이자 고결한 대공을 제 발아래 묶어 두고, 오직 자신의 생명을 유지할 '인간 해독 기구'로만 쓰겠다는 오만하고도 잔혹한 구속구였다.

바로 그때, 아지트 외부에서 쇠붙이가 부딪치는 날카로운 소음과 함께 기사들의 고함이 들려왔다. 라인할트를 추격해 온 성휘 기사단의 정예병들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부서진 문틈 너머로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그들의 손에는 무시무시한 신성 마력이 깃든 자검과 대검이 들려 있었다.

"대공 전하! 무사하십니까! 발루아의 악녀가 전하를 감금하고……!"

기사단 부단장이 검을 치켜세우며 아지트 내부로 진입하려 한 순간이었다.

에일라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탁자 모서리에 장식된 작은 구리 레버를 가볍게 눌렀다.

화아악!

아지트 바닥을 감싸고 있던 기하학적인 마법진이 푸른빛을 발하며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그와 동시에 기사들이 쥐고 있던 신성 무기들의 광휘가 거짓말처럼 사그라들며, 그들의 전신을 옭아매는 무거운 마력 구속력이 대지를 타고 흘렀다.

"무, 무슨……! 마력이 흐르지 않는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기사들이 당황하며 비틀거렸다. 에일라는 품에서 헤이븐 자치 의회가 발행한 푸른색 인장이 찍힌 조약서를 꺼내 들어 그들의 눈앞에 펼쳐 보였다.

"무식하군요, 제국의 기사들이여."

에일라의 목소리에 차가운 조소가 섞여 들었다.

"이곳은 제국의 영토가 아닙니다. 제국 법령이 미치지 않는 북부 혹한지 '헤이븐'이지요. 그리고 헤이븐 자치 조약 제14조에 의거, 외부 무장 병력이 개인의 공방 및 영토에 무단 침투할 시, 그 즉시 '영구 마력 박탈 벌금' 및 '무장 동결 결계'가 자동으로 발효되도록 법적 장치를 해두었습니다. 전하의 기사들이 이 경계선을 한 걸음만 더 침범한다면, 제국 성휘 기사단 전체의 마력을 헤이븐 자치령의 이름으로 영구히 동결시키고 막대한 배상금을 청구할 것입니다."

"이, 이 악독한 년이……!"

부단장이 이를 갈았으나, 법적인 속박과 실제로 몸을 짓누르는 고강도 마력 억제 결계 앞에서 함부로 움직일 수 없었다. 에일라는 치밀한 예지와 철저한 준비성으로 기사단의 무력조차 법의 테두리 안에서 완벽하게 봉쇄해 버린 것이었다.

"돌아가십시오."

에일라가 대공의 기사들을 향해 차갑게 선언했다.

"그렇지 않으면 전하의 기사단은 제국으로 돌아가기도 전에 파산하게 될 테니까요."

그녀의 완벽한 반격과 차가운 지배력 앞에 기사들은 단 한 걸음도 움직이지 못한 채 굳어 버렸다. 제국을 호령하던 무력 집단이 고작 변방의 조약서 몇 장과 결계 장치 앞에서 완전히 무력화된 순간이었다.

에일라는 시선을 돌려 다시 라인할트를 바라보았다.

사내의 눈동자에서 마침내 뜨거운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그 눈물은 그의 뺨을 타고 흘러 에일라의 차가운 손등 위로 떨어졌다.

툭.

그 순간, 에일라의 전신을 지배하던 지독한 한기가 거짓말처럼 눈 녹듯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속으로 감탄을 금치 못했다. '진혼의 예시안'이 가져오는 죽음의 오한을 완벽하게 상쇄하는 최상의 해독제. 그것은 라인할트가 자신을 향해 흘리는 절망과 사랑의 온기 그 자체였다.

그녀는 손등에 닿은 눈물의 온도를 정량적으로 측정했다.

'온도 화씨 98.6도. 신성 순도 99.8%. 단 한 방울만으로도 삼 일 치의 한기를 완벽하게 정화할 수 있는 수치야.'

그녀는 여전히 이 사내의 자발적인 구걸과 헌신이 자신에게 극도로 유용한 자원임을 인정했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연인이라는 불확실한 관계 대신, 완벽한 을의 위치에 묶어 두어야 했다.

"전하."

에일라가 차가운 서류를 깃펜으로 톡톡 두드렸다.

"서명하시지요. 거부하신다면, 당장 이 눈물을 닦고 제 영토에서 나가 주셔야겠습니다."

라인할트는 허탈하게 웃었다. 그의 가슴속에 차갑게 굳어 버린 피가 도는 느낌이었다. 그녀는 끝내 자신을 동등한 인간으로, 사랑하는 연인으로 받아주지 않을 것이다. 자신은 평생 그녀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온기를 제공하는 정교한 가축이자, 계약서라는 사슬에 묶인 노예로 남을 뿐이다.

하지만 그 참담한 사실조차도, 그녀의 곁에 머무를 수 있는 유일한 통로라면 기꺼이 받아들여야 했다.

"……기어코 나를 이 사슬에 묶는구나, 에일라."

라인할트가 떨리는 손으로 깃펜을 쥐었다. 그리고 서류의 하단, 을(乙)의 자리에 자신의 이름을 정갈하게 적어 내려갔다.

에일라의 입꼬리가 마침내 오만하게 호선을 그렸다. 제국 최강의 사내가 완벽하게 그녀의 손아귀 안에서 통제되는 순간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콰아아앙!

아지트의 천장을 덮고 있던 얼음 유리창이 일시에 박살 나며, 푸른 신성 마력이 깃든 탄환들이 사방에서 빗발치듯 쏟아져 내렸다.

"무슨……!"

에일라의 눈동자가 커졌다.

헤이븐의 자치 결계를 비웃기라도 하듯, 박살 난 천장 너머로 검은 갑주를 입은 기사들이 내려앉았다. 그들의 갑옷 가슴팍에는 붉은 황실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제국 황제 안드레아스의 직속 정예이자 최후의 생존자들인 '황구 기사단'이었다.

"대공이 기사단을 버리고 홀로 이탈한 틈을 노렸다!"

황구 기사단의 수장으로 보이는 사내가 검을 치켜세우며 외쳤다. 그들의 손에 들린 마력 총구들이 일시에 에일라와 라인할트의 심장을 향해 붉은 조준선을 정렬했다.

"발루아의 악녀와 반역자 대공을 이곳에서 처단한다!"

차가운 헤이븐의 폭풍 속에서, 새로운 죽음의 그림자가 그들을 완전히 포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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