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침대보 위에 흩어진 은빛 재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라인할트 폰 크로이츠의 시선이 그 잿더미의 한가운데, 마치 차가운 비웃음처럼 놓여 있는 푸른 보석으로 향했다. 가문의 비보이자 그가 그녀의 영혼을 붙잡아 두기 위해 건넸던 동화 보석. 사파이어의 정교한 융기 위로 대공저의 차가운 겨울 달빛이 부서져 내렸다. 보석 밑에 깔린 종이는 지독하리만큼빳빳하고 결이 고운 황실 제지소의 특제지였다.

[잔액: 0벨. 우리의 비즈니스는 이것으로 만료되었습니다. - E.V]

그 아래에는 정교한 필체로 작성된 감정서와 수취 거부 명세서가 첨부되어 있었다. 보석의 중량, 마력 전도율, 제국 중앙은행 기준 환산 가치가 소수점 아래 세 자리까지 정량화되어 적힌 서류였다. 맹약 파기에 따른 위약금과 그동안 그녀가 받아 간 신성 마력의 가치를 정확하게 등가교환으로 상쇄했다는, 완벽하게 계산된 정산서였다.

그녀에게 그의 진심은, 그가 심장을 통째로 구워 바치려 했던 그 맹목적인 갈망은 단지 몇닢의 은화와 마력 수치로 환산되는 교역재에 불과했다.

"…에일라."

라인할트의 입술이 비틀려 올라갔다.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는 짐승의 그르렁거림에 가까웠다. 그의 손가락 끝이 펜을 쥐듯 명세서의 모서리를 쓸어내렸다. 바스락거리는 종이 소리가 고요한 침실을 잔인하게 찢었다.

그녀의 미소, 온기를 탐하며 그의 품에 안기던 그 가녀린 어깨의 떨림, 그의 뺨을 만지던 지극히 다정했던 손길까지. 그 모든 순간이 오직 이 마지막 탈출극을 위해 설계된 정밀한 계산의 일부였다는 사실이 그의 뼈마디를 시리게 파고들었다. 자신은 그저 그녀의 수명을 연장하기 위한 해독제용 가축이자, 장기판 위의 편리한 말이었을 뿐이다.

"나를…… 이토록 완벽하게 기만했군."

그의 눈동자가 기이한 금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억눌려 있던 신성한 불꽃이 그의 심장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폭발하듯 솟구쳤다. 그것은 온기를 주는 구원의 불이 아니었다. 모든 것을 재로 만들고야 말겠다는 파괴와 증오, 그리고 가눌 길 없는 슬픔이 뒤섞인 광포한 화염이었다.

콰아아앙!

대공저의 중심부에서 시작된 순백의 불꽃 기둥이 천장을 뚫고 하늘을 향해 치솟았다. 화려한 프레스코화가 그려진 대성당 풍의 유리 돔이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하얗게 기화했다. 밤하늘을 수놓은 차가운 별빛 사이로, 대공의 광포한 마력이 거대한 해일처럼 플로렌의 상공을 뒤덮었다.

정원의 백장미들이 순식간에 불타올라 붉은 재가 되어 흩어졌다. 무너져 내리는 대리석 파편들 사이에서, 라인할트는 미동도 하지 않은 채 불타는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맹약의 은장이 새겨져 있던 손목의 피부가 붉게 갈라지며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그는 피어오르는 연기 속에서 낮게 웃었다. 그 웃음소리는 지독한 비명과도 같았다.

* * *

바람이 유리를 때리는 소리는 날카로운 쇠붙이가 부딪치는 것 같았다.

제국 북부 국경 관문. 해발 수천 미터의 만년설산 사이에 우뚝 솟은 그 성벽은 거대한 얼음 야수의 이빨처럼 보였다. 사나운 칼바람이 눈보라를 몰고 와 마차의 가죽 천장을 사정없이 두들겼다.

"영애, 아니. 에일라 님. 전방 관문 검문소입니다. 준비하십시오."

마부석과 연결된 작은 틈새로 노아의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에일라 드 발루아는 가볍게 눈을 떴다. 붉은 모피 망토의 깃을 여미는 그녀의 손끝은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그녀는 품 안에서 은색으로 빛나는 얇은 판을 꺼내 들었다. 노아가 수개월에 걸쳐 정교하게 위조한, 제국 상단 연합의 면세 통행증이자 3도 미세 오차 보정서였다.

제국 국경의 마법 검문망은 황실의 정교한 술식으로 짜여 있어, 아주 미세한 마력 반응도 실시간으로 플로렌의 중앙 마력탑에 전송된다. 하지만 노아가 제작한 이 인장은 검문망의 감지 주파수를 단 3도 뒤틀어 놓는다. 감시 기구는 그녀를 일개 지방 상인의 마차로 인식할 터였다.

"통행증을 제시하라."

철갑을 두른 경비병이 마차 창문을 두드렸다.

에일라는 창백하리만큼 아름다운 얼굴로 창을 내렸다. 그녀의 손가락 사이로 위조된 은색 인장이 매끄럽게 활공하며 경비병의 마력 측정기에 닿았다.

웅-.

작은 진동음과 함께 푸른빛이 인장을 훑었다. 경비병의 눈앞에 떠오른 전송망 화면에는 황실이 추적하는 '에일라 드 발루아'의 붉은 표식 대신, 흔하디흔한 '로렌 상단 소속 식료품 수송 마차'라는 녹색 서명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이상 없군. 문을 열어라!"

거대한 철문이 비명을 지르며 좌우로 갈라졌다. 마차가 미끄러지듯 관문 내부를 통과하는 순간, 에일라는 가만히 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어깨를 짓누르던 발루아 가문의 가스라이팅과 황실의 음모, 그리고 라인할트라는 거대한 폭풍의 손길이 마침내 저 먼 국경선 너머로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마차가 관문을 완전히 빠져나가자, 눈앞에 펼쳐진 것은 끝없는 백색의 황야였다.

제국의 법령도, 황실의 그 조밀한 감시망도 결코 침투할 수 없는 무법의 영역. 영혼 제어 마법마저 얼어붙어 작동하지 않는다는 지옥 구덩이이자, 오직 강인한 생존력을 지닌 자들만의 안식처.

북부의 심장, 헤이븐(Haven)이었다.

"성공이군요."

노아가 마차 창문을 닫으며 비죽 웃었다.

"수도 플로렌의 정보원들에 따르면, 지금쯤 대공저가 통째로 불타올랐다고 합니다. 그 고고하신 대공 전하께서 제정신을 잃으신 모양이더군요."

"그의 감정은 내 알 바가 아니야."

에일라가 차갑게 대꾸했다.

그녀는 자신의 가슴팍, 마력의 중심부인 하트를 지긋이 짚었다.

그곳에서는 기이하게도 아주 작고 미세한 순백의 불꽃이 조용히 일렁이고 있었다.

과거 라인할트와의 내밀한 연성 접촉 도중, 그의 신성한 불꽃 일부가 그녀의 마력 중심부에 기생하듯 정착했던 기현상. 11화 대성당 지하의 복잡한 마력 봉인 결계를 내부에서 파열시킬 때 미세한 열쇠로 요긴하게 써먹었던 바로 그 불꽃의 잔재였다.

당시 결계를 파괴하고 남은 그 미세한 온기는, 제국의 감시망을 완전히 벗어난 지금 그녀의 체내에서 믿을 수 없는 기적을 행하고 있었다.

‘진혼의 예시안’을 사용할 때마다 전신을 얼려 죽이려 들던 그 잔혹한 오한이, 마력 중심부에 박힌 그의 불꽃 잔재와 부딪치며 완벽하게 상쇄되고 있었다. 더 이상 라인할트의 체온을 갈구하며 그의 품에 안기지 않아도, 그의 심장 조각이 그녀의 몸 안에서 영원히 작동하는 해독 필터가 된 것이다.

그녀가 그에게서 뜯어낸 가장 완벽하고 가치 있는 전리품이었다.

"철저한 등가교환이지."

에일라는 낮게 속삭였다. 그녀의 입술 사이로 하얀 김이 새어 나왔지만, 그녀의 내면은 그 어느 때보다 따뜻하고 평온했다.

* * *

헤이븐의 깊은 침엽수림 속, 거대한 침엽수들이 천연의 장벽처럼 둘러싼 분지에 자리 잡은 목조 공방 아지트는 아늑했다.

벽난로에서는 참나무 장작이 타오르며 붉은 온기를 뿜어내고 있었고, 바닥에는 두꺼운 양털 카펫이 깔려 있었다. 가문에서 쓰던 숨 막히는 실크와 상아 장식 대신, 투박하지만 실용적인 목재 가구들이 배치된 공간은 에일라에게 난생처음으로 '안전함'이라는 감각을 선사했다.

노아가 테이블 위에 가죽 가방을 내려놓으며 서류 뭉치를 꺼냈다.

"영애께서 의뢰하신 헤이븐 사유 영지의 소유권 이전 서류, 그리고 은퇴 후 영위하실 자영업 제조 상가의 지적재산 취득권 확인서입니다. 이 헤이븐 지역의 자치 연합에 정식으로 등록을 마쳤습니다. 이제 제국 황실조차 이 권리를 침해할 수 없습니다."

에일라는 서류를 받아 들었다.

[소유주: 에일라]

발루아라는 더러운 성씨가 빠진, 오롯이 그녀 자신의 이름 석 자만이 박힌 완벽한 자립의 증서였다.

그녀는 천천히 서류의 촉감을 음미했다. 거친 가죽지의 질감이 손가락 끝을 자극했다. 가문의 꼭두각시로 살며 매 순간 목숨을 걸고 판돈을 던져야 했던 그 지옥 같은 삶이 끝나고, 난생처음으로 맑은 공기를 들이마시는 기분이었다.

"수고했어, 노아. 네 몫의 잔금은 약속대로 북부 은행의 무기명 계좌로 송금해 두었어."

"역시 거래 하나는 확실하시군요, 에일라 님. 이 맛에 상인들이 영애와 일하는 걸 선호하는 겁니다."

노아가 과장되게 모자를 벗어 경의를 표했다.

에일라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헤이븐의 밤하늘은 제국의 수도처럼 화려한 마법 불빛은 없었지만, 스스로 빛나는 은하수가 하늘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협박도, 기만도, 숨 막히는 가스라이팅도 없는 세계. 그녀는 마침내 자신의 영토를 손에 넣었다.

* * *

같은 시각, 제국 수도 플로렌은 피와 비명으로 얼룩지고 있었다.

"대공 전하! 아무리 대공이라 할지라도 황실 사법 평의회의 승인 없이 공작가를 군부 계엄 하에 두는 것은 반역입니다!"

발루아 공작가의 가주, 루드비히 드 발루아는 사르르 떨리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의 화려한 실크 로브는 이미 흙먼지와 핏자국으로 더러워져 있었다.

그의 눈앞에 선 라인할트는 인간의 형상을 한 악마와 같았다.

그의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순백의 신성 마력은 이미 광기로 오염되어 푸르스름한 안개처럼 대기를 잠식하고 있었다. 그의 발걸음이 닿는 대리석 바닥이 열기를 견디지 못하고 쩍쩍 갈라졌다.

"반역?"

라인할트가 검을 느리게 뽑아 들었다. 검날이 바닥을 긁으며 소름 끼치는 금속음을 냈다.

"에일라를 어디로 숨겼지, 루드비히."

"무슨 소릴 하시는 겁니까! 그 아이는 대공 전하와 함께 대공저에……!"

스각!

"아아악!"

루드비히의 비명이 공작가의 연회장을 가득 채웠다.

라인할트의 검끝이 루드비히의 오른쪽 어깨를 깊숙이 찌르고 들어갔다. 신성의 불꽃이 상처를 통해 주입되자, 뼈가 타들어 가는 고통에 루드비히는 바닥을 뒹굴며 침을 흘렸다.

"내 인내심을 시험하지 마라."

라인할트의 목소리는 너무도 낮아 오히려 고요했다. 그의 눈동자는 완전히 초점을 잃은 채, 오직 붉은 살기만을 내뿜고 있었다.

"그녀는 내 맹약을 파기하고 도망쳤다. 내 불꽃을, 내 심장을 도려내서 제멋대로 사라졌단 말이다. 그녀를 도운 자가 누구지? 발루아의 비밀 탈출로인가? 아니면 황실의 쥐새끼들인가?"

"나, 나는 모릅니다! 정말로 모릅니다! 그 아이는 나를 배신하고 가문의 자금마저 빼돌려 도망친 배은망덕한……!"

"모른다면, 네놈의 존재 가치도 없다."

라인할트가 검을 높이 치켜들었다.

그의 손목에서 흐른 붉은 피가 검자루를 타고 흘러내려 검날의 신성한 불꽃을 검붉게 오염시켰다. 진정한 죽음의 공포를 직면한 루드비히는 본능적으로 바닥에 머리를 찧으며 소리쳤다.

"헤이븐! 헤이븐입니다!"

검날이 루드비히의 목덜미 직전에서 멈췄다.

"…뭐라 했지?"

"그 아이는 오래전부터 제국의 눈이 닿지 않는 북부의 헤이븐으로 도망칠 계획을 세우고 있었습니다! 위조 인장과 자금을 준비하는 것을 내 눈으로 똑똑히 보았습니다! 살려주십시오, 대공 전하! 제발……!"

루드비히는 비참하게 구걸하며 바닥을 기었다.

라인할트는 천천히 검을 거두었다. 그의 시선이 북쪽 하늘을 향했다.

그녀가 도망친 곳. 제국의 법령도, 자신의 손길도 닿지 않는 그 척박하고 차가운 무법지대.

그녀는 자신을 철저히 이용해 수명을 연장하고, 그 미련조차 남기지 않은 채 가장 먼 곳으로 날아가 버린 것이다.

"헤이븐……."

라인할트의 입술 사이로 잔혹하고도 처절한 미소가 번졌다.

손목의 맹약 상흔에서 흘러내린 피가 바닥의 눈을 붉게 적셨다. 그는 핏방울이 떨어지는 손을 꽉 쥐며, 오염된 순백의 불꽃을 전신에 두르기 시작했다.

"기어코 나를 버리고 그곳으로 가셨군, 에일라."

그의 신성 마력이 대지를 뒤흔들며 폭발했다.

"내 심장을 가져갔으니, 끝까지 책임져야지."

라인할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군마에 올라탔다. 그의 뒤로 성휘 기사단의 최정예 병력들이 어둠 속에서 붉은 눈을 빛내며 정렬했다.

광기에 절은 대공의 단독 전속 기동이 북부를 향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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