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 위로 흩날리는 적백의 장미 꽃가루가 차가운 뺨을 스쳤다. 광장을 가득 메운 군중의 환호성은 고막을 먹먹하게 울렸고, 승리에 도취한 기사들의 검날은 가을 햇살을 받아 눈부시게 번뜩였다. 제국 플로렌의 가장 화려한 거리 한복판, 그 소란스러운 축제의 중심에서 오직 두 사람만이 서로 다른 세계에 서 있었다.
라인할트는 승리감과 애정이 뒤섞인 뜨거운 눈빛으로 에일라의 곁을 지켰다. 그의 커다란 손이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으려 슬며시 다가왔다.
그러나 에일라가 바라보는 곳은 고결한 대공의 얼굴이 아니었다. 시계탑의 어두운 그늘 아래, 군중의 틈새에 숨어든 노아가 품속에서 꺼내 든 은밀한 마도구. 오직 에일라의 마력안에만 감지되는 청백색 인광이 허공에 글자를 새겼다.
[모든 헤이븐 전용 통행서의 대공 서명 날인 완료. 철수용 썰매 마차 및 도주로 구비 완료.]
심장 가장자리로 서늘한 해방감이 스며들었다. 마침내 제국을 벗어날 완벽한 퇴로가 완성되었다. 에일라는 눈꺼풀을 완만하게 내리깔며 입꼬리를 밀어 올렸다.
* * *
사흘 뒤, 플로렌 수도에 지독한 혹한이 찾아온 마지막 겨울밤이었다.
창밖으로는 뼈를 시리게 만드는 칼바람이 몰아치고 있었다. 대공저의 최상층에 위치한 에일라의 침소는 타오르는 벽난로의 붉은 열기에도 불구하고 기묘한 냉기가 감돌았다. 실크로 촘촘히 누빈 침구 위에 걸터앉은 에일라는 자신의 가냘픈 손가락 끝을 내려다보았다. 손톱 밑이 푸르스름하게 변해 가고 있었다.
'진혼의 예시안.'
일촉즉발의 위기에서 가장 완벽한 생존의 길을 제시하는 대가로, 영혼과 전신을 얼려 죽이는 무자비한 오한. 황실의 정예 검은 추적자들을 궤멸시키기 위해 이능을 과도하게 무리해 사용한 여파가 이제야 전신을 잠식해 오고 있었다. 시야 아래편에는 붉은빛으로 깜빡이는 숫자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맹약의 은장 효력 만료까지: 01시간 42분 15초.]
체결일로부터 정확히 100일이 되는 오늘 밤 자정, 그들을 옭아매고 있던 영혼의 맹약서는 자동 소멸한다. 그리고 그것은 에일라가 제국을 떠나 혹한의 무법지대 헤이븐으로 도주할 최적의 타이밍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 몸을 이끌고 국경 검문소까지 가기 위해서는 전신을 마비시키는 이 오한을 완전히 해소해야만 했다. 에일라는 레이스가 정교하게 짜인 실크 슬립 위에 두꺼운 캐시미어 가운을 걸치며 시녀를 불렀다.
"대공을 불러다 주겠니. 몹시 춥다고 전해라."
비즈니스의 마지막 단계를 이행할 시간이었다.
채 5분도 지나지 않아 침실의 육중한 활엽수 문이 거칠게 열렸다. 붉은 제복의 단추를 채 풀지도 못한 라인할트가 숨을 몰아쉬며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그의 은발이 땀에 젖어 이마에 흐트러져 있었고, 그의 눈동자는 초조함과 걱정으로 사정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에일라!"
그가 침대로 단숨에 다가와 무릎을 꿇었다.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신성한 온기가 방 안의 냉기를 단숨에 밀어냈다. 에일라는 떨리는 손을 뻗어 그의 단단한 뺨을 감싸 안았다. 차가운 얼음이 뜨거운 화로에 닿은 것처럼, 강렬한 열기가 그녀의 손가락끝을 타고 신경망을 따라 가차 없이 흘러들었다.
"흐읏……."
에일라의 입술 사이로 억누르지 못한 가쁜 숨소리가 흘러나왔다. 라인할트는 그녀의 손길에 자석처럼 이끌려 침대 위로 올라앉아 그녀의 여린 몸을 품에 꽉 끌어안았다. 그의 넓은 가슴과 단단한 팔 근육이 에일라를 빈틈없이 가두었다.
"이토록 차가울 수가…… 도대체 성당 지하에서 무슨 수식을 썼기에 아직도 몸이 이 모양이란 말이오."
라인할트의 목소리가 젖어들었다. 그는 에일라의 목덜미와 어깨에 번갈아 입을 맞추며, 자신의 내면에 깃든 신성한 불꽃을 아낌없이 전력으로 쏟아부었다. 그의 가슴속 깊은 곳에서 고동치는 불꽃이 에일라의 메마르고 얼어붙은 영혼을 녹여 내렸다.
체온이 융합되는 극치 속에서 에일라는 그의 어깨를 강하게 움켜잡았다. 그의 등 뒤로 정교하게 수놓아진 크로이츠 가문의 금실 자수가 손끝에 까칠하게 걸렸다. 라인할트는 그것을 자신을 향한 교감의 몸짓으로 착각한 듯, 그녀의 허리를 더욱 강하게 감싸 안으며 귓가에 갈증 어린 숨결을 불어넣었다.
"이제 모든 것이 끝났소. 그대의 가문도, 우리를 위협하던 황실의 사냥개들도 모두 궤멸했소."
그의 목소리에 전에 없던 집착과 안도감이 끈적하게 묻어났다. 라인할트는 에일라의 젖은 눈동자를 똑바로 응시했다.
"더는 이 차가운 계약서 뒤에 숨어 서로를 저울질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오. 에일라, 이 맹약을 무기한 정략 혼약으로 전환합시다. 황실에 정식으로 청혼서를 제출하겠소. 그대는 내 곁에서 평생 이 온기를 취하며 가장 고귀한 여인으로 살아가면 되오."
그의 눈빛은 애원을 넘어선 맹목적인 구걸에 가까웠다. 오만한 성기사단장이 고작 가문의 정적이었던 악녀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영원한 구속을 청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품에 안겨 따뜻함을 탐하는 에일라의 보랏빛 눈동자는 지독하리만큼 고요했다. 그녀의 머릿속 계산기는 아주 차갑고 기계적으로 작동하고 있었다.
'혼약이라니. 가문의 꼭두각시 노릇에서 벗어나자마자 대공비라는 황금 감옥에 주저앉으라고?'
그가 건네는 다정함도, 사랑이라는 미명 하에 던져지는 헌신도 에일라에게는 그저 자신을 묶어둘 정교한 사기극이자 계산된 올가미에 불과했다. 그녀는 타인의 호의를 신용하지 않았다. 오직 수치화된 가치와 계약서의 조항만이 진실이었다.
[맹약의 은장 효력 만료까지: 00시간 15분 03초.]
에일라는 라인할트의 가슴에 얼굴을 묻으며, 세상에서 가장 가냘프고 순종적인 영애의 목소리를 흉내 내어 속삭였다.
"당신의 뜻대로 하겠어요, 라인할트. 내일 아침, 새로운 서약서를 작성하도록 해요."
그 감미로운 거짓말에 라인할트의 어깨가 눈에 띄게 떨렸다. 그는 에일라가 자신을 온전히 받아들였다고 믿는 듯, 벅차오르는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그녀의 이마와 눈꺼풀에 조심스럽게 입을 맞추었다. 그의 심장이 터질 것처럼 빠르게 뛰는 소리가 에일라의 뺨에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참으로 어리석고 다루기 쉬운 사내였다.
그때, 침실 문밖에서 다급한 노크 소리가 울렸다.
"대공 전하, 황실 종무원으로부터 긴급 수속 요청이 도착했습니다. 대성당 지하 붕괴 사건의 사후 처리와 검은 추적자들의 잔해 수거 건으로 전하의 친필 서명과 마력 각인이 즉시 필요하다고 합니다."
라인할트의 미간이 단번에 찌푸려졌다. 그는 에일라를 품에서 놓아주고 싶지 않은 듯 팔에 더욱 힘을 주었으나, 에일라는 부드럽게 그의 가슴을 밀어내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다녀오세요. 국경 업무와 황실 수속을 깔끔하게 정리하셔야 우리에게도 방해물이 없을 테니까요."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오. 한 시간이 채 되기 전에 돌아오겠소."
라인할트는 아쉬움을 가득 담아 그녀의 손등에 깊게 입을 맞춘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망토를 걸치고 방을 나서는 순간까지도 에일라는 침대 위에서 아련한 눈빛으로 그를 배웅했다.
철컥.
문이 완전히 닫히고 그의 발소리가 복도 멀리 사라진 순간.
에일라의 얼굴에서 조금 전까지 머물던 온화한 온기가 한방에 증발했다. 그녀는 가차 없이 가운을 젖히고 침대에서 내려왔다.
달력을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시야 속의 타이머가 마침내 마지막 숫자를 가리키고 있었다.
[00:00:03] [00:00:02] [00:00:01] [00:00:00] [맹약의 은장 계약 기간 종료. 양측의 마력 구속력이 완전히 해제됩니다.]
화르륵!
그녀의 서랍 깊숙한 곳에 보관되어 있던 은장 계약서의 마력 인장이 소리 없이 타오르며 재가 되어 스러졌다. 이제 제국 맹약법이 규정하는 신체적 구속력은 완벽하게 사라졌다.
에일라는 미리 준비해 둔 가볍고 튼튼한 가죽 여행용 가방을 꺼내 들었다. 방 안에는 그녀가 두고 갈 화려한 실크 드레스들과 보석들이 가득했지만, 그녀는 단 하나도 미련을 두지 않았다.
단 하나, 화장대 위에 놓인 붉은빛의 동화 보석만이 그녀의 시선을 끌었다. 라인할트가 그녀의 한기를 억제하라며 건넸던, 크로이츠 가문의 가공할 비보.
에일라는 품속에서 미리 작성해 둔 양피지 한 장을 꺼내 보석 바로 밑에 정갈하게 내려놓았다. 제국 최고의 감정소에서 공증받은 가치 평가 명세서였다.
[동화 보석의 시장 가치: 금화 45,000닢 상당. 발루아 영애가 대공저에 머물며 제공한 정보 가치 및 맹약 위약금 상쇄 처리 완료. 잔액: 0벨.]
그가 바친 절절한 애정의 증표를, 에일라는 단 일 센트의 오차도 없는 정밀한 계산서로 환산하여 철저한 비즈니스 거래로 종결지었다.
"이제 마지막 잠금장치를 풀 시간인가."
에일라는 대공저의 비밀 정원으로 연결되는 발코니 문을 열었다. 바깥은 살을 에는 듯한 겨울바람이 몰아치고 있었다. 예시안의 페널티가 다시 고개를 들려 했지만, 에일라는 오히려 입꼬리를 올렸다.
그녀의 심장 가장 깊은 곳, 마력 중심부에는 라인할트와 오랜 기간 체온을 연성하며 기생하듯 정착한 그의 신성한 불꽃의 파편이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었다.
에일라는 자신의 마력을 역류시켜 그 작은 불꽃을 강제로 끄집어내 손끝으로 모았다. 파르르 떨리는 붉은 불꽃은 비록 미세하지만, 대공의 고유한 신성 마력 그 자체였다.
정원의 한구석, 우거진 덩굴에 가려진 고대의 우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 우물의 깊은 바닥은 플로렌 수도의 지하 마력 감시망을 우회하는 유일한 배수구이자, 대공저의 가문 결계로 철저히 잠겨 있는 금단의 구역이었다. 크로이츠 가문의 직계 마력이 아니고서는 절대로 열 수 없는 고난도 마력 봉인.
에일라는 손가락 끝에 뭉친 라인할트의 신성 불꽃을 우물 덮개의 정중앙 결합부에 밀어 넣었다.
칙-.
대공의 마력과 완벽하게 동조하는 불꽃이 열쇠 구멍에 맞춰지듯 결계를 내부에서부터 조용히 부수기 시작했다. 고대의 금속 걸쇠가 맥없이 녹아내리며, 굳게 닫혀 있던 철문이 스르륵 열렸다. 라인할트가 자신을 옭아매기 위해 나누어 주었던 그 뜨거운 구원의 불꽃이, 역설적이게도 그녀의 탈출을 돕는 가장 완벽한 마스터키가 된 순간이었다.
우물 밑바닥으로 은밀하게 연결된 통로를 내려간 에일라는 어둠 속에서 대기하고 있던 노아의 모조 마차에 몸을 실었다. 마차의 벽면에는 황실 감시망을 기만하는 특수 은폐 마법이 덕지덕지 발려 있었다.
"시간 맞춰 오셨군요, 영애. 아니, 이제 영애가 아니지."
마부석에서 고삐를 잡은 노아가 비죽 웃으며 모자를 눌러썼다.
"지체할 시간 없어. 출발해."
에일라는 마차의 작은 창문을 닫으며 제국 플로렌의 화려한 등불들을 뒤로했다. 흔들리는 마차 안에서 그녀는 단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마차는 이내 어둠을 뚫고, 국경 통문 검문소 방향으로 거침없이 질주하는 정기 마차의 밀항 구획을 향해 속도를 높였다.
* * *
한 시간 뒤.
황실 종무원의 서류 처리를 이례적인 속도로 끝마친 라인할트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대공저로 들어섰다. 그의 손에는 에일라에게 보여줄 새로운 계약서—사실상 혼인 성서나 다름없는 영구적 결속의 문서가 들려 있었다.
그의 발걸음은 가벼웠고, 심장은 단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설렘으로 요동치고 있었다. 이제 그녀는 거추장스러운 발루아의 성을 버리고 완전히 자신의 품에 안길 것이었다.
"에일라, 많이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
침실 문을 열어젖힌 라인할트의 목소리가 뚝 끊겼다.
방 안은 기묘할 정도로 정적만이 감돌고 있었다. 벽난로의 불씨는 이미 하얗게 죽어 가고 있었고, 차가운 겨울바람만이 열린 발코니 문을 통해 커튼을 사납게 흔들고 있었다.
"에일라?"
대답은 없었다.
불안감이 엄습한 라인할트가 침대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비어 있는 침구는 이미 온기를 잃고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침대 머리맡에는 그가 평생을 약속하며 건넸던 동화 보석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먼지 한 톨 묻지 않은 깨끗한 감정서 서류와 함께, 완벽하게 녹아내려 은색 재가 된 계약서의 알루미늄 케이스가 놓여 있었다.
라인할트는 떨리는 손으로 종이를 집어 들었다.
[잔액: 0벨. 우리의 비즈니스는 이것으로 만료되었습니다. - E.V]
"……아."
라인할트의 입술 사이로 바람 빠지는 소리 같은 신음이 새어 나왔다.
그녀가 자신에게 보여주었던 그 수줍은 미소도, 온기를 갈구하며 품에 안기던 갈급한 몸짓도, 모두 이 마지막 순간을 위해 그의 마력을 착취하고 감시를 분쇄하기 위한 철저한 계산극이었음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바스락.
그의 손귀에서 새로운 약혼 서서가 보기 좋게 구겨졌다. 라인할트의 두 눈이 붉게 충혈되며, 그의 가슴속에서 길들여지지 않은 광포한 폭풍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