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사흘 뒤, 황궁 근교에 자리한 생트-발레리 대성당의 지하 예배당은 빛 한 점 들지 않는 거대한 묘지나 다름없었다. 차가운 대리석 바닥에는 억겁의 세월 동안 쌓인 먼지와 눅눅한 이끼 냄새가 엉겨 붙어 있었고, 천장 높이 솟은 고딕식 기둥들은 마치 침입자를 짓누르려는 거인의 손가락처럼 험악하게 솟아 있었다.

가스라이팅과 기만으로 점철된 조부 루드비히의 필체는 가문의 문장이 찍힌 편지 봉투 속에서 우아하게 빛나고 있었다. '가문의 해를 끼치지 않는 선에서 마지막 기회를 주마'라는 감언이설은 결국 이 음침한 지하로 에일라를 유인하기 위한 정교한 덫에 불과했다.

"결국 이곳이 제 무덤이 될 거라 확신하셨나 보군요, 아버님."

에일라의 붉은 입술 사이로 서늘한 실소가 새어 나왔다. 그녀의 시선이 닿은 어둠 속에서, 검붉은 마력의 쇠사슬이 기둥 뒤편으로부터 스멀스멀 기어 나와 공기를 오염시키고 있었다.

황제 안드레아스와 루드비히가 합작하여 정교하게 설계한 신성의 흑마법 결계였다. 그들이 방패막이이자 사냥개로 내세운 에일라를 확실하게 처단하고, 동시에 눈엣가시인 라인할트 대공의 성휘 기사단 병력을 통째로 매장하려는 최후의 올가미.

철컥, 철컥거리는 불길한 쇠붙이 소리와 함께 지하 예배당의 거대한 철문이 요란한 굉음을 내며 닫혔다.

"함정이다! 전원 전투 대형으로!"

성기사단의 부단장이 다급하게 외쳤으나 이미 늦은 후였다. 벽면에 새겨진 고대 룬 문자들이 핏빛으로 박동하기 시작하더니, 공기 중에 흩뿌려져 있던 마력이 일제히 역류하기 시작했다. 기사들의 은빛 갑옷 위로 치솟던 호신 강기가 비정상적인 자력에 끌려가듯 결계의 핵으로 빨려 들어갔다.

"윽……! 마력이, 마력이 가동되지 않습니다!"

"숨을 쉴 수가……!"

강인한 체구를 자랑하던 성기사들이 차례로 무릎을 꿇으며 대리석 바닥을 짚었다. 육체에 깃든 마력과 생명력을 강제로 약탈당하는 고통은 뼈마디를 잘게 부수는 듯한 비명으로 이어졌다. 은색 투구 사이로 흘러내린 식은땀이 바닥을 적셨다. 그들의 영혼을 지탱하던 신성력마저 결계의 붉은 사슬에 감겨 허무하게 스러져 가고 있었다.

그 아수라장의 중심에 라인할트 폰 크로이츠가 서 있었다. 그의 은발이 흑마법 결계가 뿜어내는 가혹한 역풍에 미친 듯이 휘날렸다. 차가운 금안이 불꽃을 튀겼지만, 그의 손에 들린 성검 역시 검푸른 녹이 슬 듯 빛을 잃어가고 있었다. 결계는 라인할트가 지닌 신성한 불을 가장 탐욕스럽게 집어삼키고 있었다. 그의 탄탄한 가슴이 가쁘게 들썩였고, 잘 정돈된 입술 틈새로 붉은 선혈이 한 줄기 흘러내렸다.

"에일라……."

고통 속에서도 라인할트의 시선은 오직 한 곳만을 향했다. 제국의 가장 오만하고 표독스러운 악녀라 불리는 여인, 자신을 철저히 이용하고 착취하려 했던 계약 연인의 실루엣을 향해.

그는 결계의 압박 속에서도 그녀를 향해 한 걸음을 내딛으려 했다. 자신의 몸이 타들어 가더라도 그녀만은 구하겠다는 듯이, 떨리는 손가락 끝이 허공을 더듬었다.

하지만 에일라는 그 애절한 손길에 일절의 감정도 담지 않은 채,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응시할 뿐이었다.

'어리석기는.'

에일라는 속으로 차갑게 읊조렸다. 루드비히의 가스라이팅 함정에 빠져 기사단 전체가 절멸할 위기에 처한 이 순간이야말로, 그녀가 준비해 온 패를 던질 가장 완벽한 무대였다.

수만 대의 마력 감지기가 황궁의 지령을 받아 플로렌 수도 전체를 빗자루질하듯 훑고 있었다. 미세한 이능의 파동만 일어도 황실 기사단 본부의 경보가 울려 퍼질 터였다. 그런 삼엄한 감시망 속에서 '진혼의 예시안'을 발동하는 것은 자살 행위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에일라가 믿는 구석은 따로 있었다.

그녀는 슬며시 손을 올려 자신의 심장 부근을 짚었다. 비단 드레스의 부드러운 감촉 너머로, 규칙적으로 뛰는 심장 아래 깊숙이 숨겨진 기이한 열기가 느껴졌다.

그것은 지난날 라인할트와의 밀착 연성 접촉 도중, 그의 거칠고 뜨거운 신성한 불꽃의 일부가 그녀의 마력 중심부에 기생하듯 정착했던 흔적이었다. 남들은 알지 못하는, 오직 그녀만의 비밀스러운 영구 보존 구역에 갇힌 대공의 심장 파편.

'이제 쓸모를 증명할 시간이야.'

에일라가 눈을 지그시 감았다.

체내의 마력을 극도로 미세하게 조율하기 시작하자, 심장 아래 조용히 웅크리고 있던 은빛 불꽃이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동시에 영혼을 얼려 죽이는 듯한 가혹한 오한이 그녀의 척추를 타고 올라왔다. '진혼의 예시안'이 가져오는 필연적인 대가였다. 허파가 서리로 가득 차는 듯한 고통에 에일라의 눈썹이 가늘게 떨렸으나, 그녀는 단 한 마디의 신음도 흘리지 않았다.

대공의 고유 불꽃 주파수와 이 대성당을 짓누르는 흑마법 결계는 본질적으로 동일한 '신성'의 힘을 동력원으로 삼고 있었다. 황제와 루드비히가 라인할트를 죽이기 위해 그의 힘을 역이용하도록 설계한 결계였기에, 역설적으로 라인할트의 영혼 동조 불꽃에는 가장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에일라는 얼어붙는 손가락 끝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심장 속에서 끄집어낸 은빛 불꽃의 파동을 아주 은밀하게, 그리고 아주 부드럽게 개방했다.

윙-

공기가 미세하게 공명했다. 수도 전역에 깔린 수만 대의 마력 감지기들은 이 파동을 감지하지 못했다. 그것은 외부에서 침투한 이능이 아니라, 결계가 그토록 갈구하던 라인할트 자신의 신성력 주파수와 완벽하게 일치했기 때문이었다.

에일라의 보랏빛 눈동자에 기이한 수식과 미래의 궤적이 스쳐 지나갔다. 불완전한 예시아의 신호가 그녀의 뇌리를 때리며, 결계의 마력이 얽히고설킨 연쇄 결합부의 위치를 붉은 실선으로 선명하게 보여주었다.

'거기구나.'

마치 바늘귀에 실을 꿰듯, 에일라는 자신의 손끝에서 흘러나오는 라인할트의 기생 불꽃을 결계의 가장 취약한 결합부를 향해 원격으로 밀어 넣었다.

결계는 자신들의 먹잇감인 대공의 정수가 제 발로 결합부 깊숙이 밀려 들어오는 줄 알고 탐욕스럽게 그것을 빨아들였다. 영혼의 주파수가 일치하는 두 힘이 부딪치는 순간, 에일라는 고의로 예시아의 불안정한 마력 신호를 폭주시켜 내부 연쇄 반응을 유도했다.

"흡……!"

라인할트가 가슴을 부여잡으며 거친 숨을 내뱉었다. 그의 영혼과 연결된 불꽃이 에일라의 손끝에서 날카롭게 벼려져 결계의 심장부를 찌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순간, 거대한 대성당 지하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콰르릉-!

검붉은 마력 사슬의 결합부가 안쪽에서부터 하얗게 번쩍이더니, 이내 감당할 수 없는 과부하를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를 폭사시키기 시작했다. 쇠사슬이 툭, 투둑 끊어지며 허공으로 비산했다. 기사들의 생명력을 갉아먹던 붉은 룬 문자들이 유리창이 깨지듯 산산조각이 나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이, 이건…… 결계가 붕괴한다!"

기사들의 외침과 함께 대성당 내부를 짓누르던 가혹한 압박감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쓰러져 있던 성기사들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무기를 짚고 일어섰다. 그들의 얼굴에는 경악과 안도의 빛이 동시에 교차했다.

자신들을 옭아매던 절멸의 덫이, 그 누구도 손댈 수 없었던 황실의 흑마법 결계가 단 한 순간에 내부에서부터 완벽하게 파괴된 것이다.

그리고 그 파괴의 여파 속에서, 은빛 마력의 잔해가 눈부신 나비처럼 흩날리며 에일라의 주변을 맴돌았다.

라인할트는 그 광경을 넋을 잃은 채 바라보았다. 멀리서도 생생하게 느껴지던 마력의 동조 방식, 그것은 완벽한 자신의 신성력 파생 기운이었다. 에일라의 심장 가장 깊은 곳에서 흘러나와 결계를 무너뜨린 그 힘의 본질을, 그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녀의 안에 나의 불꽃이 살아 숨 쉬고 있었다.'

라인할트의 금빛 눈동자가 걷잡을 수 없이 흔들렸다. 오만하고 냉혹하기 짝이 없던 성기사단의 군주의 얼굴에, 형언할 수 없는 달콤한 착각과 격정 어린 감정이 번져나갔다.

그녀가 자신을 이용하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에일라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의 영혼을 품고 있었고, 위기의 순간에 그 힘을 공명시켜 자신과 기사단을 구원해 낸 것이다.

"에일라…… 네가 나를 위해……."

라인할트의 목소리가 젖어 들었다. 그가 다가와 에일라의 차가운 손을 조심스럽게 쥐었다. 그의 손바닥에서 흘러나오는 뜨거운 신성의 온기가 에일라의 전신을 채우던 예시안의 한기를 서서히 녹여내렸다.

대공은 에일라의 창백한 뺨을 바라보며, 자신들이 영혼의 밑바닥에서부터 하나로 얽혀 있는 일심동체라는 착각에 완전히 도취해 있었다. 그가 보여주는 미세하게 떨리는 눈가와 다정한 미소는, 그가 드디어 이 교활한 악녀의 덫에 스스로 발을 들여놓았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하지만 에일라는 그의 뜨거운 손길 속에서도 속으로 차가운 비웃음을 흘렸다.

'착각은 자유지, 대공.'

그녀에게 라인할트의 불꽃은 그저 위급할 때 쓸 수 있는 유용한 도구이자, 예시안의 페널티를 상쇄하기 위한 효율적인 해독제에 불과했다. 그가 느끼는 영혼의 유대감이니, 운명이니 하는 감정들은 에일라의 정교한 계산기 위에서는 단 일 센트의 가치도 없는 부속품이었다.

그때, 지하 예배당의 무너진 잔해 너머로 전령이 다급하게 달려와 무릎을 꿇었다.

"보고드립니다! 대성당 외곽을 포위하고 있던 황실의 정예 '검은 추적자' 부대가 결계의 역폭발로 인해 완전히 궤멸했습니다! 살아남은 자들은 퇴각 중입니다!"

그 보고를 듣는 순간, 에일라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황실이 자랑하던 가장 치명적인 숙청 기구, 검은 추적자들이 이 소멸전의 여파로 한순간에 소멸했다. 그것은 플로렌 수도를 옭아매고 있던 황실의 감시망과 군사 경비 체계에 대규모의 공백기가 발생했음을 의미했다.

드디어 열린 것이다. 이 지긋지긋한 음모의 제국을 탈출해 북쪽 국경 너머, 그 누구의 간섭도 없는 독립의 땅 '헤이븐'으로 향할 완벽한 기회의 창이.

"성녀이시여! 발루아의 영애께서 저희를 구하셨습니다!"

"에일라 영애를 보호하라!"

결계가 깨지자마자 대성당 밖으로 걸어 나오는 에일라와 기사단을 향해, 광장에 모여든 수많은 추종자들과 시민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그들의 손에서 뿌려진 붉고 하얀 장미 꽃가루가 가을바람을 타고 눈부시게 휘날렸다. 기사들은 검을 뽑아 하늘을 향해 겨누며 그녀에게 숭배에 가까운 경의를 표했다.

귀순용 꽃가루가 뺨을 스치고 지나가는 화려한 거리의 한복판. 라인할트는 승리감과 애정 어린 눈빛으로 에일라의 곁을 굳건히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 에일라의 시선은 군중들의 환호도, 저를 보며 눈을 빛내는 고결한 대공의 얼굴도 향하지 않았다.

그녀의 차가운 보랏빛 눈동자는 저 멀리 시계탑의 어두운 그늘 아래, 평범한 행인으로 위장한 채 서 있는 노아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노아가 에일라와 눈이 마주치자, 품속에서 작은 마도구를 꺼내 허공을 향해 은밀한 전송 신호를 보냈다.

파앗-.

오직 에일라의 특화된 마력안에만 보이는 미세한 청백색 인광이 공중에서 점등되었다.

[모든 헤이븐 전용 통행서의 대공 서명 날인 완료. 철수용 썰매 마차 및 도주로 구비 완료.]

완벽한 도망의 신호가, 마침내 그녀의 눈앞에서 찬란하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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