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부터 나를 도구로 썼다 해도 좋으니…….”
낮게 가라앉은 대공저의 침실, 창틈으로 스며든 차가운 달빛이 라인할트의 금빛 머리칼 위로 부서져 내렸다. 무릎을 꿇은 채 에일라의 손등에 이마를 기댄 그의 어깨가 미세하게 들썩였다. 제국의 가장 고결한 기사이자 무결한 정의를 자처하던 남자가, 오직 생존만을 바라는 악녀의 발치에 스스로 주저앉아 떨고 있었다.
“평생 내 곁에서 내 불꽃을 전부 가져가는 조건으로 살아가는 건 불가능한가?”
애원하는 그의 숨결이 에일라의 손가락 사이사이로 스며들었다. 뜨겁다 못해 데일 것 같은 신성의 온기. 전신을 얼려 죽이려 들던 ‘진혼의 예시안’의 혹한이 그의 불꽃을 받아들이자마자 눈 녹듯 사라지고 있었다. 살갗을 파고드는 감각은 지독하리만큼 달콤했으나, 에일라의 눈동자는 한없이 서늘한 푸른빛을 유지했다.
그녀는 천천히 손가락을 움직여 그의 단단한 턱끝을 밀어 올렸다. 라인할트의 시선이 마주 닿았다. 금빛 눈동자 밑바닥에 차오른 열망과 결핍은 당장이라도 그녀를 집어삼킬 것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하지만 에일라에게 이 열정은 독이었다.
“대공 전하.”
그녀의 목소리에는 그 어떤 감정의 고저도 없었다. 마치 잘 짜인 대리석 조각상에서 흘러나오는 소리 같았다.
“마음에 품지 않은 거짓 맹세는 맹약의 은장을 망가뜨릴 뿐입니다. 계약서의 조항은 명확해야 하며, 사적인 감정은 그 규격을 흐리게 만들지요. 제게 필요한 것은 오직 기한 내에 지불될 확실한 온기뿐입니다.”
라인할트의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그의 뺨을 타고 흐르는 열기가 에일라의 손끝에 닿았다가 이내 증발했다. 에일라는 그의 뺨에서 가차 없이 손을 떼어냈다. 차가운 공기가 그들의 사이에 벽을 쌓았다.
“당신의 그 뜨거운 진심을 제 계약서에 적어 넣을 자리는 없습니다. 평화로운 거래를 원하신다면, 부디 선을 넘지 마십시오.”
말을 마친 그녀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라인할트는 뻗어 나가려던 손을 허공에 멈춘 채, 굳어버린 석상처럼 그녀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가슴속에서 우지끈하며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으나, 에일라는 돌아보지 않았다.
그녀의 마음속 깊은 곳, 마력의 중심부에서는 기이한 감각이 웅성거리고 있었다. 라인할트와 접촉할 때마다 흡수했던 신성의 불꽃 중 극히 일부가, 해독되어 사라지는 대신 그녀의 마력 핵 주변에 기생하듯 똬리를 틀고 정착해 있었다. 미세한 열쇠처럼 조용히 숨죽인 채 흐르는 그 불꽃의 감각을 느끼며, 에일라는 가슴팍에 손을 얹었다.
‘이것 또한 언젠가 쓸모가 있겠지.’
그녀는 철저히 이성적으로 판단했다. 그가 건네는 사랑이라는 감정은 믿을 수 없었지만, 그의 영혼이 흘려보낸 이 불꽃의 파편은 훌륭한 도구가 될 터였다.
* * *
다음 날 오후, 대공저의 응접실은 무거운 침묵에 잠겨 있었다.
라인할트는 에일라의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 어제의 격렬했던 애원은 간데없이, 그는 다시 차갑고 엄격한 대공의 가면을 쓰고 있었다. 그러나 찻잔을 든 그의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까지 숨기지는 못했다.
스륵.
그가 테이블 위로 작은 벨벳 상자를 밀어 놓았다. 상자의 표면에는 크로이츠 가문의 인장이 정교하게 금박으로 새겨져 있었다.
“이것을 받아라.”
라인할트의 목소리는 메말라 있었다.
에일라는 눈썹을 살짝 치켜세우며 상자를 열었다. 그 안에는 어둠 속에서도 스스로 붉은빛을 발산하는 기이한 보석이 박힌 목걸이가 누워 있었다. 루비와 유사했으나, 결정의 중심부에서 마치 살아 숨 쉬는 심장처럼 신성의 불꽃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크로이츠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비전의 수호석이자, 소유자의 영혼과 동화되는 권능을 지닌 ‘동화 보석’이었다.
“……이것은?”
“내 신성의 정수가 담긴 수호석이다. 네 몸속의 한기가 폭주할 때, 내가 곁에 없더라도 일시적으로 그 고통을 억제해 줄 거다.”
라인할트가 고개를 돌리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찻잔이 받침대에 부딪히며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그의 가슴속에서는 깊은 슬픔과 열정이 한데 뒤섞여 요동치고 있었다. 자신이 목숨처럼 아끼는 가문의 보석을 바치면서도, 그녀가 이것을 단지 ‘편리한 간이 해독제’로만 여길 것이라는 비참한 확신 때문이었다.
실제로 에일라의 머릿속은 그의 예상대로, 혹은 그보다 훨씬 더 냉혹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동화 보석이라.’
그녀는 손가락 끝으로 붉은 결정을 톡톡 건드렸다. 겉보기에는 가문의 맹세를 담은 낭만적인 정표 같았지만, 에일라의 눈에 비친 그것은 완벽한 고가치 자산이었다.
‘순도 높은 신성 마력의 결정체. 제국 북부의 암시장에서 거래되는 마력 전도율을 기준으로 기산한다면…… 최소한 골드 가치로 30만 마르크는 가볍게 상회하겠군.’
30만 마르크. 제국 국경 너머 혹한의 무법지대인 ‘헤이븐’에서 방 다섯 개짜리 저택을 사고, 남은 평생을 아무런 노동 없이 풍족하게 자영업자로 살아가기에 충분하고도 남는 거금이었다.
에일라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리며 미세하게 올라갔다.
“과연 대공 전하의 성의가 가득 담긴 물건이군요. 기꺼이 감사히 받겠습니다.”
그녀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상자를 닫아 품에 넣었다. 라인할트는 그녀의 눈동자에서 그 어떤 감동이나 애정의 편린도 찾아볼 수 없자,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의 주먹이 바지 위에서 하얗게 쥐어졌다.
에일라는 그의 아픔을 알면서도 묵인했다. 오히려 이 값비싼 보석을 훗날 자신이 맹약을 파기하고 도망치는 당일, 그에게 남겨두고 갈 ‘위약금 및 정산용 현물 담보’로 못 박아 두기로 결심했다. 그가 준 정표로 그의 계약을 정산한다. 이보다 더 깔끔하고 합리적인 비즈니스가 어디 있겠는가.
* * *
깊은 밤, 에일라는 대공저의 개인 서재에서 촛불 하나만을 켠 채 검은 가죽 장부를 펼쳤다.
스각, 스각.
깃펜 끝이 서늘한 소리를 내며 종이 위를 달렸다.
[세입 및 자산 목록] - 헤이븐 독립용 위조 신분증 제작비: -50,000 마르크 (지불 완료) - 북부 연안 밀항선 선장 포섭비: -20,000 마르크 (예약금 지불) - 크로이츠 가문 동화 보석 (현물 담보 및 위약금 상쇄재): +300,000 마르크 (보관 중)
그녀는 장부를 덮고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 자금 흐름은 완벽했다. 라인할트가 건넨 보석 덕분에 탈출 계획의 재정적 안정성이 비약적으로 상승했다.
그때, 서재의 테라스 창문이 소리 없이 열렸다. 밤바람과 함께 검은 망토를 뒤집어쓴 지극히 실용적인 차림의 사내가 미끄러지듯 안으로 들어왔다. 정보상 노아였다.
“밤늦게 실례합니다, 영애. 아니, 동업자 동지라고 불러야 할까요?”
노아가 후드를 벗으며 특유의 능글맞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에일라는 놀라지 않고 서랍에서 붉은 벨벳 상자를 꺼내 테이블 위에 얹었다.
“이걸 처리해 줘.”
노아가 상자를 열자마자 그의 두 눈이 동그랗게 동전만 해졌다. 그는 침을 꿀꺽 삼키며 보석을 들어 올렸다.
“이, 이건…… 크로이츠 대공의 동화 보석 아닙니까? 미쳤군요, 영애. 이걸 제게 주시면 어쩌자는 겁니까? 제국 전체가 발칵 뒤집힐 물건이라고요!”
“누가 이걸 장물로 팔아치우랬어?”
에일라가 턱을 괴며 냉정하게 대꾸했다.
“네 상인 조합 네트워크를 이용해 이 수호석을 신용장으로 삼아. 헤이븐으로 흘러 들어갈 내 탈출 자금의 현금 흐름 보증 수단으로 세금 우회 처리를 하라는 뜻이야. 대공의 가문 보석이 보증하는 자금이라면 황실의 세무 감사관들도 감히 손대지 못할 테니까.”
노아는 멍하니 보석과 에일라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의 입에서 헛바람이 빠져나왔다.
“세상에…… 대공 전하가 이 보석을 줄 때는 평생의 사랑을 맹세하며 바쳤을 텐데, 그걸 바로 탈출용 세금 우회 보증서로 써먹으시다니. 영애의 그 지독한 대가 계산법에는 정말 혀를 내두르겠습니다.”
“사랑은 장부에 기재할 수 없는 무형의 사기극일 뿐이야. 하지만 30만 마르크는 내 독립을 보장해 주는 실질적인 숫자지. 어느 쪽이 더 가치 있는지는 명백하잖아?”
에일라의 단호한 태도에 노아는 결국 어깨를 으스쓱하며 보석을 품에 넣었다.
“알겠습니다, 알겠어요. 이래야 내 동업자답지. 세금 우회 경로는 완벽하게 설계해서 다음 주 초까지 보고서를 올리겠습니다.”
노아는 품 안에서 다른 가죽 봉투를 꺼내 에일라의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그의 장난기 어린 표정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정보상 특유의 날카롭고 은밀한 눈빛이 들어찼다.
“그나저나, 황실 내부에서 아주 끈적한 정보가 하나 걸려들었습니다.”
에일라가 봉투를 뜯어 내용물을 확인했다. 황실 기사단의 직인이 찍힌 내부 통신 문건이었다.
“황실 지하 탐색기의 대규모 출력이 다음 주 중에 대폭 강화된다는 내용이군요.”
“그렇습니다. 황제 안드레아스가 플로렌 수도 전체의 마력 감시망을 완전히 옭아매려는 모양입니다. 결계나 이능을 조금만 사용해도 위치가 실시간으로 황궁 기사단 본부에 전송될 겁니다. 영애의 그 불안정한 ‘예시안’인가 하는 이능도 잘못 발동했다간 쥐새끼처럼 바로 덜미가 잡히겠죠.”
에일라의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았다. 그녀는 문건을 고이 접어 책상 서랍 가장 깊숙한 이중 바닥에 밀어 넣었다. 탈출을 위한 시간의 유예가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리는 경종이었다.
“그리고…….”
노아가 침을 한번 삼키며 서재의 어두운 구석을 힐끗 보았다. 그의 목소리가 한 층 더 낮아졌다.
“더 최악의 소식이 있습니다. 이번엔 발루아 공작, 그러니까 영애의 그 위대하신 조부 루드비히와 황실이 은밀하게 손을 잡은 모양입니다.”
에일라의 손가락이 책상 모서리를 지그시 눌렀다.
“루드비히가 황제와?”
“예. 두 미치광이가 합작해서 최후의 덫을 설계했습니다. 영애를 확실하게 처단하고, 동시에 눈엣가시인 라인할트 대공의 성휘 기사단 병력을 한꺼번에 매장하려는 음모입니다.”
노아가 내민 양가죽 지도에는 황궁 근교의 대성당 위치가 붉은 잉크로 칠해져 있었다.
“대성당 지하와 내부 기둥 전체에 신성의 흑마법 결계를 연쇄적으로 설치했다는 징후가 포착되었습니다. 기사단이 그곳에 진입하는 순간, 결계가 작동해 내부의 모든 마력을 역류시켜 소멸시킬 겁니다. 영애를 미끼로 던져 대공을 유인하려는 심산이겠죠.”
서재 안의 공기가 차갑게 얼어붙었다.
머릿속에서 ‘진혼의 예시안’이 기분 나쁜 이명을 울리기 시작했다. 시야 한구석에 붉은 경고등이 깜빡이며 왜곡된 미래의 파편이 스쳐 지나갔다. 거대한 성당의 붕괴, 불타오르는 성기사들의 외침, 그리고 그 중심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라인할트의 모습.
에일라는 깊은 숨을 들이쉬며 이명을 가라앉혔다. 조부 루드비히의 탐욕과 황제의 광기가 마침내 그녀의 멱살을 잡기 위해 거대한 올가미를 완성해 가고 있었다.
그녀의 눈앞에 닥친 최후의 결전지, 황궁 근교 대성당이 어둠 속에서 불길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