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밀러 감독이 던진 경기 라인업 카드가 락커룸 바닥의 더러운 흙먼지 위로 툭 떨어졌다.

사흘 뒤 등판.

선발 투수의 생명줄과 다름없는 최소 4일의 휴식기를 통째로 잘라낸, 명백한 보복성 오더였다.

태윤의 귓가에서 삐- 하는 날카로운 이명이 고막을 찔렀다. 15년 전, 어깨 관절 와순이 걸레짝처럼 찢어지던 그날 밤의 비명 소리가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심장 박동이 폭주하기 시작했다. 가슴이 옥죄어 오며 산소가 폐부로 들어오지 않았다. 회기성 공황 발작의 전조 증상이었다.

[위기 상황 감지.] [심박수 급증: 138 bpm.] [육체 관리 장부 경고: 3일(72시간) 휴식 후 등판 시 어깨 마모도 임계치 돌파 위험성 89.7%]

태윤은 한 손으로 락커 문짝을 꽉 움켜쥐었다. 알루미늄 문틀이 비틀리며 찌그러지는 소리를 냈다. 손가락 끝에 피가 통하지 않아 하얗게 질려갔다.

“감독님! 이건 선을 넘었습니다!”

포수 루크 에반스가 마스크를 바닥에 내팽개치며 밀러의 앞을 막아섰다. 붉게 상기된 얼굴로 씩씩거리는 루크의 어깨가 크게 들썩였다.

“사흘 휴식이라니요? 싱글A에서 아무리 혹독하게 굴러도 투수 목숨을 끊어놓겠다는 일정은 없습니다. 태윤이는 방금 완봉승을 거뒀어요!”

밀러는 입안에 머금고 있던 검붉은 씹는담배 침을 루크의 스파이크 바로 앞에 퉤 뱉었다. 지독한 니코틴 냄새가 코를 찔렀다.

“에반스, 네놈이 언제부터 이 팀의 투수 로테이션을 결정했지? 74구밖에 안 던진 놈이다. 힘이 넘쳐나서 몸을 사리는 놈한테 휴식은 사치야. 던지기 싫으면 이 건방진 동양인 놈이랑 같이 짐 싸서 독립리그로 꺼지든가.”

밀러의 눈동자에는 광적인 고집과 적개심만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자신의 전통적인 야구 철학, 즉 ‘많이 던질수록 강해진다’는 신념에 도전한 신인 놈의 싹을 완전히 밟아놓겠다는 심산이었다.

태윤은 거칠게 요동치는 호흡을 억지로 가라앉혔다.

후우. 하아.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내쉬자, 눈앞에 떠오른 푸른색 홀로그램 창이 미세하게 흔들리며 안정되기 시작했다.

[현재 어깨 관절 와순 마모도: 12.45%] [회전근개 피로도: 48.20%]

치명적인 수치였다. 일반적인 투수라면 이 상태에서 사흘 뒤에 공을 잡는 순간 어깨가 파열되어 커리어가 끝장난다. 하지만 태윤에게는 15년 동안 눈물 젖은 빵을 먹으며 터득한, 그리고 미래의 최첨단 스포츠 과학이 집약된 ‘육체 관리 장부’와 리페어 프로토콜이 있었다.

태윤이 고개를 들었다. 눈빛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던지겠습니다.”

“태윤아!”

루크가 아연실색하며 뒤를 돌아보았지만, 태윤은 가볍게 손을 들어 그를 제지했다.

밀러는 태윤의 수용을 굴복으로 받아들인 듯, 비열한 웃음을 지으며 턱을 치켜올렸다.

“현명한 선택이군. 화요일 19시, 포트마이어스 원정이다. 네가 진짜 ‘에이스’라면 실력으로 증명해 봐라.”

밀러가 락커룸 문을 거칠게 열고 나가자, 휑한 공기만이 방 안에 감돌았다.

루크가 답답하다는 듯 머리를 감싸 쥐었다.

“미쳤어? 저 늙은이가 널 죽이려고 파놓은 함정이야! 단장님한테 당장 전화해서 이 계약 위반 사항을……”

“루크.”

태윤이 라인업 카드를 주워 쓰레기통에 던져 넣으며 나직하게 말했다.

“내 몸은 내가 가장 잘 알아. 그리고 저 인간이 틀렸다는 걸 증명하려면, 마운드 위에서 멀쩡하게 살아남는 법 외엔 없어.”

태윤의 시선이 허공에 뜬 장부의 회복 옵션 창으로 향했다.

[마모 리페어 프로토콜 가동 가능.] [목표: 72시간 이내 회전근개 피로도 0.00% 복원.] [조건: 고통스러운 미세 자극 치료 및 극저온 냉온욕 루틴 완수.]

“에이전트에게 연락해. 당장 장비 세팅해야 하니까.”

***

그날 밤부터 태윤의 비밀스러운 투쟁이 시작되었다.

아더 워드가 구단 몰래 신속하게 공수한 극저온 체임버(Cryotherapy)가 태윤의 임시 숙소 차고지에 설치되었다. 밀러 감독은 “그깟 얼음찜질이나 하고 자빠진 나약한 새끼들”이라며 비웃었지만, 태윤에게 이 장비는 생명유지장치와 같았다.

“준비됐나, 강?”

아더 워드가 초시계를 들고 체임버의 밸브를 조절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평소의 냉정함 대신 팽팽한 긴장감이 서려 있었다.

“시작해.”

치이이익!

영하 140도의 액체 질소 가스가 체임버 내부를 가득 채웠다. 사방이 순식간에 하얀 서리로 뒤덮였다.

태윤은 반바지만 입은 채 그 차가운 지옥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살을 에는 듯한 통증이 피부를 뚫고 뼈마디까지 파고들었다. 온몸의 털이 곤두서고 이가 덜덜 떨렸다. 혈관이 순식간에 수축하며 혈류량이 급감했다. 어깨 통증을 유발하는 염증 인자들을 강제로 억제하는 과정이었다.

[시스템 메시지: 극저온 치료 1단계 진행 중.] [피부 온도 12도 도달. 세포 내 산소 공급 차단 및 리커버리 모드 활성화.]

3분. 지옥 같은 180초가 흐른 뒤 체임버 문이 열렸다. 태윤은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기어 나왔다. 루크가 서둘러 담요를 그의 어깨에 덮어씌웠다.

하지만 쉴 틈은 없었다.

“바로 2단계로 간다.”

태윤은 침대에 엎드렸다. 루크가 조심스러운 손길로 태윤의 오른쪽 어깨 주변, 회전근개와 극상근 부위에 미세 전류 패드를 부착했다.

찌릿! 찌릿!

초미세 전류(Micro-current)가 손상된 근육 섬유 사이를 파고들었다. 세포의 ATP(아데노신삼인산) 생성을 500% 이상 촉진하여 미세하게 찢어진 근육을 초고속으로 이어 붙이는 미래의 치료법이었다. 어깨 깊숙한 곳에서부터 욱신거리는 기묘한 기분과 함께, 근육이 스스로 꿈틀거리는 감각이 전해졌다.

“으윽……”

태윤의 입에서 억눌린 신음이 새어 나왔다. 이마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참아라, 강. 이 과정을 거쳐야만 인대의 마모를 막을 수 있다.”

아더 워드가 데이터를 태블릿으로 확인하며 냉정하게 말했다.

마지막은 냉온욕 루틴이었다. 섭씨 4도의 얼음물이 가득 찬 욕조에서 정확히 3분을 버틴 뒤, 곧바로 섭씨 41도의 온탕으로 이동해 다시 3분을 버틴다. 이를 총 5회 반복하는 지옥의 펌핑 작업.

혈관이 수축과 이완을 극한으로 반복하며 근육 속에 쌓인 젖산과 노폐물을 강제로 짜내어 배출시켰다.

얼음물에 들어갈 때는 심장이 멎을 것 같았고, 온탕으로 들어갈 때는 온몸의 세포가 타들어 가는 듯한 극심한 소양증이 찾아왔다.

루크는 그 과정을 지켜보며 주먹을 꽉 쥐었다.

“이런 짓까지 해가면서 던져야 하는 거야? 메이저리그가 뭐라고……”

태윤은 얼음물 속에서 붉게 충전된 눈으로 루크를 바라보았다.

“내 어깨가 부서지는 걸 그냥 보고만 있을 수는 없어. 감독이 원하는 대로 무너지지 않는다. 절대로.”

72시간 동안, 태윤은 먹고 자는 시간을 제외한 모든 순간을 이 가혹한 리페어 프로토콜에 바쳤다.

그리고 화요일 아침.

태윤이 침대에서 일어나 천천히 오른쪽 팔을 돌렸다.

사각거리는 마찰음도, 묵직한 통증도 느껴지지 않았다. 팔을 들어 올리는 궤적이 자로 잰 듯 매끄러웠다.

태윤이 눈을 감고 장부를 호출했다.

[현재 어깨 관절 와순 마모도: 0.02%] [회전근개 피로도: 0.00%] [피칭 메커니즘 정밀도: 100.0%]

완벽한 복원이었다. 피로도는 제로. 어깨는 드래프트 전날의 그 깨끗하고 탄력 넘치는 상태로 돌아와 있었다.

태윤의 입꼬리가 천천히 올라갔다.

“비즈니스 준비 끝났다.”

***

포트마이어스 원정 경기장.

하늘은 잔뜩 흐려 있었고, 마운드는 전날 내린 비로 인해 질척거리는 진흙탕 상태였다. 투수에게는 최악의 조건이었다. 디딤발이 미끄러지기 쉬워 아차 하는 순간 팔꿈치나 어깨에 과부하가 걸리는 환경.

밀러 감독은 덕아웃 기둥에 기대어 씹는담배를 우물거리며 마운드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시선은 오늘 선발로 나선 또 다른 우완 투수, ‘마커스 스톤’에게 향해 있었다.

마커스는 밀러 감독의 총애를 받는 올드스쿨 파 투수였다. 매일같이 “어깨는 던질수록 강해진다”는 밀러의 말을 맹신하며, 통증이 와도 진통제를 삼키고 마운드에 오르던 녀석이었다.

“좋아, 마커스! 사나이답게 팍팍 꽂아넣어!”

밀러가 덕아웃에서 소리쳤다.

태윤은 불펜에서 어깨를 풀며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태윤의 눈에 마커스의 신체 상태가 푸른색 텍스트로 보였다.

[마커스 스톤 / 내측 측부 인대(UCL) 마모도: 94.80%] [경고: 인대 파열 임계치 임박.]

이미 한계였다. 리커버리 프로토콜 없이 사흘간의 가혹한 불펜 투구와 감독의 압박 속에서 마커스의 팔꿈치는 실 한 가닥으로 버티고 있는 형국이었다.

2회말, 마커스가 세 번째 타자를 향해 전력투구를 하는 순간이었다.

슈우욱— 툭.

공이 힘없이 타자 앞에서 패대기쳐졌다.

그리고 동시에, 마운드 위에서 끔찍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퍽!*

마치 두꺼운 가죽 가방의 끈이 끊어지는 듯한 둔탁한 파열음이 덕아웃까지 생생하게 전해졌다.

“아아아악!”

마커스가 비명을 지르며 오른팔을 붙잡고 마운드 바닥에 쓰러져 뒹굴었다. 그의 얼굴은 순식간에 하얗게 질렸고, 고통으로 온몸을 비틀었다.

덕아웃이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트레이너! 당장 나가봐!”

밀러 감독이 당황해 고함을 질렀지만, 이미 상황은 끝난 뒤였다. 마커스는 팔꿈치를 감싸 쥔 채 일어서지도 못했다. 구급차가 외야 펜스를 열고 마운드 위로 진입했다.

UCL 파열. 토미 존 수술이 불가피한, 투수에게는 사망 선고와 다름없는 부상이었다.

덕아웃에 있던 동료 선수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마커스 팔꿈치가 날아갔어……” “감독님이 사흘 동안 계속 던지게 하더니 결국……”

선수들의 싸늘한 시선이 밀러 감독에게로 쏠렸다. 밀러는 애써 태연한 척하며 씹는담배를 바닥에 뱉었지만, 그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까지 숨기지는 못했다.

자신의 ‘어깨 강화론’이 낳은 비극적인 참상이었다.

밀러는 황급히 고개를 돌려 불펜에 서 있는 태윤을 노려보았다. 사흘 휴식 후 등판하는 태윤 역시 마커스처럼 처참하게 무너질 것이라 믿고 싶어 하는 눈빛이었다.

“강태윤! 당장 마운드로 올라가!”

밀러가 보복하듯 윽박질렀다.

태윤은 천천히 글러브를 끼고 불펜 문을 열었다. 그의 걸음걸이에는 단 한 줌의 망설임도 없었다. 질척거리는 진흙탕 마운드를 밟고 올라선 태윤은 포수 루크와 시선을 교환했다.

루크의 눈빛에는 걱정과 신뢰가 동시에 담겨 있었다.

태윤이 마운드 흙을 스파이크로 가볍게 고르며 준비를 마쳤다.

오늘 경기장 본부석에는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의 단장과 프런트 고위 간부들이 직관을 와 있었다. 아더 워드가 미리 정보를 흘려둔 덕분이었다.

밀러 감독의 혹사 지시와, 그 지시를 비웃듯 완벽하게 살아 돌아온 에이스의 쇼타임. 무대는 완벽하게 세팅되었다.

태윤이 루크의 사인에 고개를 끄덕였다.

첫 타자가 타석에 들어섰다.

태윤은 심호흡을 하며 투구 메커니즘을 가동했다. 72시간 동안 극 극한의 고통을 견디며 복원해 낸 깨끗한 어깨 근육이 활처럼 부드럽게 휘어졌다. 디딤발이 진흙을 강하게 디디며 체중을 완벽하게 앞으로 전달했다.

오른팔이 채찍처럼 휘둘려졌다.

손가락 끝에서 실밥이 긁히는 완벽한 마찰음이 느껴졌다.

*콰아앙!*

공이 허공을 가르는 파열음이 경기장에 울려 퍼졌다.

타자는 배트를 반쯤 내밀다 말고 얼어붙었다. 공은 이미 루크의 미트 한가운데를 찢어놓을 듯이 박혀 있었다.

*팍!*

포트마이어스 구장의 전광판 스피드건에 숫자가 찍혔다.

[99 mph]

경기장 전체에 거대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99마일. 시속 159.3km.

사흘 전 74구 완봉승을 거두고, 단 3일밖에 쉬지 못한 싱글A 투수가 던진 공이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궤적과 구속이었다.

덕아웃에 있던 밀러 감독이 벌떡 일어섰다. 그의 입에 물려 있던 씹는담배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눈이 튀어나올 듯이 커진 밀러는 전광판과 태윤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말도 안 돼…… 저 새끼 어깨가 어떻게……”

태윤은 차가운 눈빛으로 덕아웃의 밀러를 응시했다.

‘당신의 그 썩어빠진 야구 이론은 오늘로 완전히 끝이다.’

두 번째 공.

태윤은 패스트볼과 완벽하게 동일한 궤적으로 날아가다 홈플레이트 직전에서 사선으로 날카롭게 꺾이는 슬러브를 구사했다.

*스윽— 쾅!*

타자의 배트가 허공을 크게 갈랐다. 삼진.

“스트라이크 아웃!”

주심의 우렁찬 콜이 울려 퍼졌지만, 관중석과 프런트의 시선은 오직 태윤의 믿을 수 없는 투구에 고정되어 있었다.

세 번째 타자 역시 완벽한 피칭 터널링에 농락당하며 3구 삼진으로 물러났다.

단 9개의 공으로 이닝 종료.

태윤은 마운드를 내려오며 밀러 감독의 바로 앞을 지나갔다. 밀러는 넋이 나간 표정으로 태윤을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자신의 지시를 따르던 투수는 팔꿈치가 터져 구급차에 실려 갔는데, 자신을 거역하고 과학적 관리를 고집한 투수는 99마일의 불꽃 패스트볼을 던지며 마운드를 지배하고 있었다.

승패는 이미 결정 나 있었다. 누구의 방식이 옳은지, 야구의 미래가 어디에 있는지 온 천하에 입증된 순간이었다.

본부석에 앉아 있던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의 단장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의 얼굴에는 흥분과 경악이 뒤섞여 있었다.

단장은 옆에 있던 프런트 간부들을 향해 다급하게 소리쳤다.

“지금 당장 콜업 서류 준비해! 아더 워드한테 연락해서 당장 계약서 새로 쓰자고 해!”

간부들이 허겁지겁 휴대폰을 꺼내 들고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경기장의 모든 소음이 태윤의 발끝 아래로 가라앉는 가운데, 태윤은 푸른색 홀로그램 창을 보며 나직하게 읊조렸다.

[체계적 회복 기법 검증 완료.] [빅리그 콜업 조건 충족.]

마침내, 메이저리그의 문이 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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