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회초, 마운드 위로 불어오는 바람이 후끈했다.
타석에 선 잭슨 카터는 거만하게 턱을 치켜들고 있었다. 녀석의 어깨가 극단적으로 뒤로 누웠다. 낮게 떨어지는 종(縱) 무브먼트의 공을 밑에서부터 퍼 올리겠다는 노골적인 어퍼컷 스윙의 예비 동작. 싱글A 홈런 1위다운 자신감이 온몸에서 풍겼다.
'패스트볼과 스플리터의 이지선다.'
카터의 머릿속은 그 두 가지만으로 가득 차 있을 터였다. 태윤이 지금까지 보여준 위력적인 피칭 터널링의 핵심이 바로 그 두 구종의 완벽한 궤적 일치였으니까.
태윤은 글러브 안에서 공을 쥐었다. 손가락 끝에 전해지는 실밥의 감각이 극도로 선명했다.
[육체 관리 장부 동기화 완동.] [현재 어깨 마모도: 11.45%] [회전 효율성 기대치: 98.2%]
시야에 떠오른 푸른색 수치들이 태윤의 이성을 더욱 차갑게 굳혔다. 상대가 노림수를 가지고 들어왔다면, 그 노림수의 판 자체를 뒤흔들면 그만이다.
‘누가 내 터널이 두 개뿐이라고 하던가.’
태윤이 루크의 사인을 확인했다. 루크는 바깥쪽 낮은 코스에 미트를 대고 있었다. 하지만 태윤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루크의 눈이 헬멧 너머로 크게 떠졌다.
태윤이 요구한 사인은 전혀 다른 궤적이었다.
스르륵.
태윤의 왼발이 마운드 흙을 쓸며 힘차게 나아갔다. 축발인 오른발 끝에서부터 시작된 회전력이 골반을 타고 척추를 거쳐 어깨로, 그리고 마지막 순간 손가락 끝으로 폭발하듯 전달되었다.
채찍처럼 휘어진 팔끝에서 공이 튕겨 나갔다.
슈우우욱!
공은 정확히 패스트볼의 터널로 빨려 들어갔다. 홈플레이트 앞 7.2미터 지점까지는 시속 94마일짜리 포심 패스트볼과 완벽하게 동일한 높이, 동일한 궤적이었다.
카터의 눈이 번쩍 뜨였다. 예측한 궤적이었다. 그는 주저 없이 허리를 돌리며 배트를 퍼 올렸다. 거대한 체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스윙 스피드가 바람을 갈랐다.
하지만 그 순간, 카터의 배트가 허공을 가르기 직전.
공이 홈플레이트 앞에서 덜컥, 하고 멈춘 듯하더니 아래가 아닌 측면 사선 방향으로 뚝 떨어졌다. 회전 효율성을 극대화한 슬러브(Slurve)였다. 패스트볼의 터널에서 출발했으나, 마지막 순간 전혀 다른 중력의 지배를 받는 것처럼 급격하게 궤적을 꺾었다.
쉬익!
배트가 공의 한참 위를 허무하게 통과했다.
“스트라이크!”
주심의 우렁찬 콜이 경기장에 울려 퍼졌다. 카터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방금 전의 여유롭던 미소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방금 그 궤적은 뭐지?’
카터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자신의 배트를 내려다보았다. 패스트볼이라고 확신했던 공이 완전히 다른 타이밍과 낙차로 꺾였다. 그것도 완벽하게 같은 터널 속에서 튀어나왔다.
태윤은 대답 대신 다시 한번 와인드업에 들어갔다.
공격적인 피칭.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는다.
두 번째 공.
이번에도 투구 메커니즘은 완벽하게 일치했다. 릴리스 포인트의 높이는 단 1밀리미터의 오차도 없었다. 카터의 뇌는 또다시 패스트볼의 궤적을 인지했다. 하지만 첫 타석의 슬러브에 대한 잔상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이번엔 떨어지는 변화구다!’
카터가 순간적으로 스윙 템포를 늦췄다. 배트가 뒤늦게 출발하려는 찰나.
콰앙!
“스트라이크 투!”
시속 95마일의 묵직한 포심 패스트볼이 루크의 미트 한가운데를 찢어발기듯 꽂혔다. 카터는 배트 한 번 제대로 휘두르지 못하고 서서 당했다.
볼카운트 노볼 투스트라이크. 완벽한 지배였다.
카터의 이마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녀석의 발끝이 타석에서 미세하게 뒤로 밀려났다. 이미 수 싸움에서 완전히 패배했다는 증거였다.
태윤은 주저하지 않았다. 셋업 포지션에서 가볍게 숨을 고른 뒤, 곧바로 세 번째 공을 뿌렸다.
세 번째 공 역시 똑같은 터널에서 출발했다.
카터는 본능적으로 배트를 내밀었다. 몸이 먼저 반응한 궁여지책의 스윙이었다. 하지만 공은 홈플레이트 직전에서 이번엔 수직으로 뚝 떨어졌다. 종으로 떨어지는 체인지업.
툭.
“삼진 아웃!”
배트 끝에 스치지도 못한 공이 루크의 미트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싱글A 최고의 슬러거 잭슨 카터가 단 3구 만에 헛스윙 삼진으로 돌아서는 순간이었다. 카터는 허탈한 표정으로 마운드를 바라보다가, 이내 신경질적으로 배트를 바닥에 내던지며 덕아웃으로 걸어갔다.
관중석에서 뜨거운 함성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태윤은 기뻐하지 않았다. 방금 마지막 공을 받을 때, 루크의 미트가 아주 미세하게 흔들리는 것을 포착했기 때문이다. 루크가 공의 변화를 끝까지 잡아내지 못하고 마지막 순간에 미트를 낚아채듯 움직였다. 심판의 성향에 따라서는 볼로 판정받을 수도 있는 위험한 프레이밍이었다.
태윤은 다음 타자가 들어서기 전, 가볍게 손짓하며 마운드 앞으로 걸어 나갔다. 루크 역시 마스크를 벗고 마운드로 뛰어 올라왔다.
“태윤, 방금 슬러브는 진짜 미쳤었어! 궤적이 완전히……”
“루크.”
태윤이 루크의 말을 자르며 나지막하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방금 마지막 체인지업 받을 때 미트 끝이 밑으로 처졌어. 심판 시야에서 공이 완전히 빠져나갔다 들어온 것처럼 보였다고.”
루크가 아차 싶었는지 입술을 깨물었다.
“미안해. 궤적이 너무 늦게 꺾여서 나도 모르게 손목이 밀렸어.”
태윤은 글러브로 입을 가린 채 루크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내 공은 홈플레이트 앞 7.2미터 지점, 즉 터널의 출구까지는 무조건 패스트볼 궤적으로 들어와. 그러니까 미리 공의 낙차를 예상하고 미트를 움직이지 마.”
“미리 움직이지 말라고?”
“그래. 터널의 축을 머릿속에 고정시켜. 내가 던지는 모든 공이 그 가상의 파이프라인을 통과한다고 생각하는 거야. 네 미트는 그 파이프라인의 끝에서 가만히 기다리고 있다가, 공이 터널을 빠져나오는 순간 그 자리에 가두듯이 받아야 해. 미트를 낚아채는 게 아니라, 공이 미트 안으로 스스로 박히게 만드는 느낌으로.”
루크의 눈빛이 흔들렸다. 태윤이 말하는 것은 단순한 조언이 아니었다. 15년 뒤 메이저리그에서 정립된 최첨단 ‘표적 시각 동화(Target Visual Assimilation)’ 기술의 기초였다. 포수가 투수의 피칭 터널을 완벽히 시각화하여 공유할 때, 프레이밍의 극대화가 이루어진다.
“가상의 파이프라인…….”
루크가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투지가 다시금 불타오르는 것이 보였다.
“알았어. 무슨 뜻인지 이해했어. 다음 공부터 바로 적용해 볼게.”
“좋아. 가자.”
태윤은 가볍게 루크의 가슴팍을 치고 다시 마운드로 돌아왔다.
이어진 8회의 나머지 두 타자.
태윤은 공격적인 투구를 이어갔고, 루크는 태윤의 조언을 충실히 이행했다. 공이 꺾이는 순간에도 루크의 미트는 흔들리지 않고 가상의 터널 끝에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다. 심판의 손이 주저 없이 올라갔다.
스트라이크. 스트라이크. 아웃.
8회초 역시 단 4구 만에 이닝이 종료되었다. 총 투구 수 70구.
덕아웃으로 들어오는 태윤을 향해 선수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하지만 덕아웃 한구석에 서 있는 제임스 밀러 감독의 얼굴은 씹는담배의 찌꺼기처럼 시커멓게 죽어 있었다.
밀러는 태윤이 이대로 경기를 끝내버릴 심산이라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다.
‘건방진 녀석. 내 지시를 정면으로 거부하겠다는 거냐?’
밀러는 태윤에게 오늘 최소 110구 이상을 던지며 이닝을 길게 가져갈 것을 명령했었다. 그것은 신인의 기를 죽이고 어깨를 소모시키기 위한 올드스쿨식 길들이기였다. 하지만 태윤은 극단적인 투구 수 절약을 통해 8회까지 단 70구로 막아내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9회까지 마쳐도 80구가 채 되지 않는다.
밀러의 이마에 핏대가 섰다. 그는 당장이라도 태윤을 마운드에서 내리고 싶었지만, 완봉승 페이스의 투수를 명분 없이 내렸다가는 구단 프런트와 언론의 집중포화를 맞을 것이 뻔했다.
9회초가 시작되었다.
태윤은 마운드에 올랐다. 관중석에서는 기립박수가 터져 나왔다. 싱글A에서 보기 힘든 압도적인 완봉승의 서막이었다.
첫 타자, 초구 포심 패스트볼.
쾅!
루크의 미트가 가상의 터널 끝에서 자석처럼 공을 빨아들였다. 3루수 땅볼 아웃. 투구 수 71구.
두 번째 타자. 슬러브로 초구 스트라이크를 잡은 뒤, 2구째 시속 96마일 패스트볼로 우익수 플라이 아웃을 유도했다. 투구 수 73구.
마지막 타석.
상대 타자는 이미 투지를 잃은 표정이었다. 태윤의 손끝에서 떠나간 74번째 공이 몸쪽 깊숙한 곳으로 파고들었다. 타자가 급하게 배트를 내밀었으나 빗맞은 타구는 투수 앞 완만한 땅볼이 되었다.
태윤은 가볍게 공을 글러브로 건져 올려 1루수로 부드럽게 송구했다.
아웃.
경기 종료.
“게임 셋! 강태윤, 단 74구 만에 9이닝 무실점 완봉승을 거둡니다!”
현장 중계석 캐스터의 흥분한 목소리가 스피커를 찢을 듯 울려 퍼졌다.
74구 컴플리트 게임(Complete Game). 이른바 투구 수 100구 미만으로 완봉승을 거두는 ‘매덕스(Maddux)’의 완벽한 재림이었다.
전광판에 새겨진 ‘74’라는 숫자는 마운드 위의 태윤이 거둔 승리의 크기이자, 구시대적인 혹사 야구를 향해 날린 묵직한 돌직구였다.
관중석은 광란의 도가니였다. 루크가 마운드로 달려와 태윤을 껴안았다.
“태윤! 네가 해냈어! 빌어먹을 74구 완봉이라니! 이건 역사에 남을 경기야!”
“네 프레이밍도 좋았어, 루크. 네가 터널을 잘 지켜준 덕분이야.”
태윤은 엷은 미소를 지으며 루크의 등을 두드렸다.
그 시각, 관중석 상단에 위치한 스카우트 및 프런트 전용 부스.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의 세이버메트릭스 담당 분석관들이 태블릿 PC의 화면을 보며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이것 보십시오, 단장님. 강태윤의 오늘 경기 회전 효율성은 평균 98.4%입니다. 피칭 터널 이탈 지점은 홈플레이트 앞 7.1미터로, 리그 최정상급 투수들보다 더 늦게 꺾입니다. 무엇보다 투구 수가 단 74구입니다. 이닝당 평균 투구 수가 8.2구에 불과해요.”
단장은 안경을 고쳐 쓰며 모니터 가득 찬 푸른색 그래프들을 응시했다.
“올드스쿨 감독들은 저 친구를 나약하다고 비난했지. 투구 수 제한을 둔다고 말이야. 하지만 이 데이터를 보게. 이건 나약한 게 아니라 극도로 효율적인 비즈니스야. 어깨 마모를 최소화하면서 경기를 완전히 지배하고 있어.”
단장의 입가에 흥미로운 미소가 걸렸다.
“당장 아더 워드 에인전트에게 연락해. 우리가 제시할 수 있는 계약 조항에 투구 수 통제 옵션을 공식적으로 포함하겠다고 전해라. 저런 보물은 하루라도 빨리 메이저리그로 올려야 해.”
프런트의 분위기는 이미 태윤의 완벽한 승리로 기울어 있었다. 과학적 투구 관리의 승리였다.
하지만.
승리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 클럽하우스 안의 공기는 얼음장처럼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경기를 마치고 가벼운 아이싱을 마친 태윤이 락커룸으로 들어섰을 때였다. 감독실 문이 거칠게 열리며 제임스 밀러 감독이 걸어 나왔다. 그의 얼굴은 분노로 붉게 물들어 있었고, 씹는담배 냄새가 진동했다.
밀러는 태윤의 앞을 가로막아 섰다.
“강태윤.”
태윤은 젖은 수건을 어깨에 걸친 채 밀러를 가만히 응시했다.
“예, 감독님.”
“너 오늘 내 지시를 정면으로 거부했지?”
밀러의 목소리에 날이 서 있었다. 주변에 있던 동료 선수들이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자리를 피하기 시작했다.
“저는 팀의 승리를 위해 최선을 다해 던졌을 뿐입니다. 9이닝 무실점 완봉승입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태윤이 차분하게 대꾸하자, 밀러는 헛웃음을 터뜨리며 태윤의 가슴팍을 손가락으로 쿡쿡 찔렀다.
“최선? 웃기지 마라, 이 건방진 동양인 놈아. 넌 네 어깨를 사리느라 고의로 투구 수를 조절했어. 감독이 110구 이상 던지며 이닝을 책임지는 투혼을 보여달라고 했을 텐데, 넌 교묘하게 타자들을 맞춰 잡으면서 내 오더를 피해 갔단 말이다!”
기적 같은 완봉승을 거둔 투수에게 할 소리가 아니었다. 밀러의 눈에는 오직 자신의 권위에 도전한 신인 선수를 밟아버리겠다는 광기만이 가득했다.
“투혼은 몸을 망가뜨리는 핑계가 될 수 없습니다. 저는 제 몸을 관리할 권리가 있고, 구단과의 계약에도……”
“닥쳐!”
밀러가 고함을 질렀다. 그의 침방울이 태윤의 뺨에 튀었다.
“여긴 내 구장이고, 내 팀이다! 네놈의 그 잘난 데이터니 관리니 하는 개소리는 메이저리그에나 가서 해라. 내 밑에 있는 한, 넌 내 방식대로 굴러야 해.”
밀러는 품 안에서 경기 라인업 카드를 꺼내 태윤의 락커에 거칠게 던졌다.
“완봉승을 거두느라 힘이 아주 많이 남으셨겠지? 단 74구밖에 안 던졌으니 어깨가 아주 쌩쌩하겠어.”
태윤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밀러가 비열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사흘 뒤, 화요일 원정 경기 선발은 너다.”
사흘 뒤.
선발 투수에게 최소 4일, 보통 5일의 휴식을 보장하는 메이저리그의 철칙을 정면으로 위배하는 해괴한 오더였다. 단 3일 휴식 후 등판. 그것은 투수의 어깨를 완전히 파괴하겠다는 선전포고와 다름없었다.
태윤의 머릿속에서 삐- 하는 이음과 함께, 과거 어깨가 파열되던 순간의 비명 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오기 시작했다.
[위기 상황 감지.] [심박수 급증: 135 bpm.] [육체 관리 장부 경고: 3일 휴식 후 등판 시 어깨 마모도 임계치 돌파 위험성 89.7%]
숨이 턱 막혀왔다. 부상 공포증이 다시금 태윤의 멱살을 쥐어잡는 듯했다.
태윤은 떨리는 손을 꽉 쥐며 밀러를 매섭게 쏘아보았다. 과연 태윤은 이 미친 혹사 오더를 어떻게 돌파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