쾅!
치료실 문이 부서질 듯 닫혔다. 제임스 밀러 감독의 거친 발소리가 복도 저편으로 멀어질 때까지, 방 안에는 무거운 침묵만이 흘렀다.
사흘 휴식 후 등판. 그리고 110구 이상의 완투 지시.
그것은 이적 첫해인 신인 투수에게 내려진 사형 선고나 다름없었다. 현대 야구의 어떤 구단도 이따위 살인적인 스케줄을 허용하지 않는다. 하지만 여기는 세이버메트릭스의 빛이 미처 닿지 않는 어두운 싱글A의 막장 마운드였고, 현장의 전권을 쥔 늙은 야수는 눈엣가시 같은 신인을 뭉개버릴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사흘이라니…… 미친 영감탱이가 정말 돌았군."
루크 에반스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바닥에 침을 뱉었다. 그의 투박한 손가락이 포수 미트를 쥔 채 잘게 떨리고 있었다.
"태윤, 이건 단장에게 당장 보고해야 해. 에이전트 아더에게도 연락하고. 계약서상의 투구 수 제한 옵션은 장식품이 아니잖아!"
"소용없어, 루크."
태윤은 얼음주머니를 어깨에 댄 채 차갑게 대꾸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단 한 줌의 동요도 섞여 있지 않았다.
"밀러가 말했잖아. 경기에 내보내고 빼는 건 감독 고유 권한이야. 내가 여기서 단장 뒤로 숨으면, 그 노인네는 나를 불펜 구석에 처박아두고 아예 공을 던질 기회조차 주지 않을 거다. 메이저리그 콜업? 싱글A 벤치에서 물당번이나 하다가 계약이 끝날 때까지 썩어 들어가는 거지."
"하지만 3일 쉬고 110구를 던지면 네 어깨는……."
"내 어깨는 내가 지켜."
태윤은 어깨에 묶어둔 붕대를 천천히 풀었다.
눈앞에 푸른색 빛을 뿜어내는 '육체 관리 장부'의 홀로그램이 떠올랐다.
[현재 신체 마모 복구율: 85.4% (정밀 리페어 필요)] [경고: 단기 휴식 후 등판 시, 마모도 임계점 돌파 위험성 대폭 증가.]
태윤의 입꼬리가 비스듬히 올라갔다.
15년 동안 메이저리그 밑바닥을 구르며 뼈저리게 배운 것은, 시스템이 제공하는 수치보다 결국 그것을 제어하는 투수의 의지가 더 중요하다는 사실이었다.
밀러가 비웃었던 그 극저온 얼음 욕조와 온탕을 오가는 고통스러운 냉온욕 루틴. 그리고 미세 자극 치료 솔루션. 그것이 왜 15년 뒤 메이저리그 에이스들의 필수 생존 프로토콜이 되었는지, 이 무식한 올드스쿨 영감에게 똑똑히 보여줄 차례였다.
"루크. 사흘 동안 넌 나랑 터널링 프레이밍만 지독하게 연습한다. 밀러가 나한테 110구를 던지라고 협박했다면, 난 110구를 던지기 전에 경기를 끝내버리면 그만이야."
"경기를 끝내다니? 어떻게?"
"타자들을 3구 안에 요리한다. 매 이닝을 10구 미만으로 지워버리면, 완투를 해도 투구 수는 90구를 넘지 않아."
루크는 멍하니 태윤을 바라보았다. 9이닝을 90구 미만으로 막는 완투. 메이저리그 역사에서도 손에 꼽히는 '매덕스(Maddux)'의 영역을, 이 싱글A 마운드에서 해내겠다는 소리였다.
그것은 오만함이 아니었다. 태윤의 눈빛에 서린 것은 지독할 정도로 정교한 계산기의 빛이었다.
***
사흘 뒤.
포트마이어스 야구장의 태양은 유난히 뜨거웠다. 관중석에서 풍기는 핫도그 냄새와 맥주 냄새가 바람을 타고 마운드 위로 흘러들었다.
태윤은 마운드 흙을 스파이크 징으로 짓밟으며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체내의 젖산 수치는 이미 사흘간의 지옥 같은 리페어 프로토콜 덕분에 완벽하게 리셋되어 있었다.
[현재 신체 마모 복구율: 99.8%] [근육 피로도: 최적 (Green)]
"흐음."
덕아웃 난간에 기대어 서서 씹는담배를 직직 뱉어대던 제임스 밀러 감독이 태윤과 눈이 마주치자 기분 나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의 옆모습에는 '어디 한번 죽어봐라' 하는 잔인한 기대감이 노골적으로 묻어났다. 사흘 만에 등판한 신인의 어깨가 언제 비명을 지르며 무너질지, 그는 오직 그것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루크 에반스가 홈플레이트 뒤에 쪼그리고 앉아 미트를 넓게 벌렸다.
그의 미트 위치는 정확히 스트라이크 존 하단 경계선에 걸쳐 있었다. 태윤이 요구한 '철저히 낮게 가라앉는 터널 타겟'이었다.
1회초, 상대 팀의 1번 타자가 타석에 들어섰다.
태윤은 글러브를 가슴팍에 모으고 손가락 끝의 미세한 감각을 조율했다. 손가락 지문에 닿는 실밥의 거친 촉감이 신경을 타고 뇌로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포심 패스트볼. 회전 효율 98%.'
슈우우욱!
공이 태윤의 손끝을 떠났다.
공중을 가르는 백스핀의 마찰음이 고요한 경기장에 날카롭게 울려 퍼졌다. 타자는 공의 궤적을 쫓아 잔뜩 어깨를 들이밀었다. 시속 95마일의 묵직한 강속구가 몸쪽 낮게 꽂히는 것처럼 보였다.
타자의 배트가 번개처럼 돌았다.
하지만 그 순간, 홈플레이트 앞 7.2미터. 타자의 뇌가 공의 궤적을 인지하고 스윙 궤도를 고정하는 바로 그 임계점(Decision Point)에서, 공은 마법처럼 아래로 뚝 떨어졌다.
스플리터였다.
퍽!
"스트라이크!"
포수 미트가 아래에서 위로 부드럽게 딸려 올라가며 존 경계선에 걸친 공을 스트라이크로 둔갑시켰다. 루크의 완벽한 미트질이었다. 타자는 허공을 가른 방망이를 쥐고 멍한 표정을 지었다.
"방금 그 구질은…… 분명 패스트볼 궤적이었는데?"
타자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태윤은 대꾸 없이 곧바로 다음 공을 준비했다. 투구 템포는 8초를 넘기지 않았다. 타자가 숨을 고를 시간조차 주지 않는 숨막히는 압박이었다.
두 번째 공. 똑같은 궤적으로 날아오던 공이 이번에는 떨어지지 않고 그대로 낮게 꽂혔다. 2450 RPM의 강력한 포심 패스트볼.
쩍!
"스트라이크 투!"
타자는 배트를 내지도 못하고 삼진 위기에 몰렸다. 완벽한 피칭 터널링이었다. 패스트볼과 스플리터가 홈플레이트 직전까지 완전히 동일한 가상의 원통(터널)을 통과해 날아오니, 타자의 시각 정보로는 두 공을 구분할 재간이 없었다.
세 번째 공.
낮은 슬라이더가 바깥쪽 흘러나가는 궤적으로 가볍게 휘어 들어갔다. 타자는 엉덩이가 뒤로 빠진 채 간신히 방망이를 갖다 대었으나, 공은 빗맞아 3루수 정면으로 힘없이 굴러갔다.
툭. 탁.
"아웃!"
단 3구 만에 첫 아웃카운트가 올라갔다.
덕아웃에서 침을 뱉으려던 밀러 감독의 턱이 미세하게 굳어졌다.
"우연이겠지."
밀러가 중얼거렸다.
하지만 우연은 2번 타자에게도, 3번 타자에게도 반복되었다.
태윤은 단 한 번도 전력을 다해 100%의 힘으로 던지지 않았다. 15년 차 은퇴 투수의 노련함이란 바로 이런 것이었다. 힘으로 타자를 압도하는 것은 하수다. 진정한 고수는 타자의 타이밍을 뺏고, 그들의 시각적 착각을 지배한다.
2번 타자는 초구 패스트볼 스트라이크, 2구째 낮은 스플리터에 속아 2루수 땅볼 아웃. 투구 수 2개.
3번 타자는 초구 하이 패스트볼에 헛스윙, 2구째 낮게 떨어지는 체인지업에 배트가 나가며 삼진. 투구 수 2개.
1회를 마쳤을 때 태윤의 투구 수는 단 7구였다.
"말도 안 돼……."
루크가 덕아웃으로 들어오며 흥분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태윤, 네 공은 진짜 마구야. 내가 미트를 대고 있으면, 공이 알아서 빨려 들어오는 느낌이라고! 타자들이 완전히 바보가 됐어."
"이제 겨우 1회야, 루크. 힘 빼. 갈 길이 멀다."
태윤은 담담하게 컵에 담긴 전해질 음료를 들이켰다. 그의 시선은 상대 팀 덕아웃이 아닌, 자신들의 덕아웃 구석에서 불안하게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는 밀러 감독에게 향해 있었다.
밀러의 눈빛이 흔들리고 있었다.
원래 그의 계획대로라면 사흘 휴식 후 등판한 태윤이 3회쯤 투구 수 50구를 넘기며 어깨 통증을 호소하거나, 난타를 당해 질질 짜며 마운드를 내려가야 했다. 그래야 계약서 위반이라는 단장의 압박을 피해 '실력 부족'과 '투혼 결여'를 명분으로 태윤을 매장할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경기는 밀러의 각본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2회초. 태윤은 단 9구로 세 타자를 처리했다.
3회초. 투구 수 8구. 포수 땅볼, 우익수 플라이, 삼진.
4회초. 투구 수 6구. 타자들은 태윤의 초구 스트라이크에 조급해져 무리하게 배트를 휘둘렀고, 그것들은 죄다 빗맞은 내야 땅볼이 되어 야수들의 글러브로 빨려 들어갔다.
관중석의 스카우트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들의 스피드건에 찍히는 구속은 93마일에서 95마일 사이로 엄청난 강속구는 아니었다. 하지만 타자들의 반응은 흡사 105마일짜리 불덩어리를 상대하는 것처럼 처참하게 무너지고 있었다.
"저 친구, 투구 메커니즘이 완전히 미쳤군. 릴리스 포인트가 모든 구종에서 단 1인치도 벗어나지 않아."
"저건 싱글A 수준의 제구력이 아니야. 피칭 터널링의 극한이다."
스카우트들의 펜이 바쁘게 움직였다.
덕아웃의 밀러 감독은 입술을 바르르 떨었다. 씹는담배를 바닥에 내팽개치며 그가 투수 코치에게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저 건방진 녀석이 힘을 아끼고 있잖아! 전력투구를 안 해? 코치, 당장 마운드로 가서 태윤에게 전력으로 던지라고 해! 구속이 왜 저따위냐고 압박해!"
투수 코치가 난감한 표정으로 마운드로 향했다.
태윤은 마운드에 올라온 코치를 무표정하게 바라보았다.
"태윤, 감독님이 구속을 더 올리라고 하신다. 전력으로 던지라고."
태윤은 피식 웃었다.
"코치님. 지금 제가 안타를 맞고 있습니까, 아니면 볼넷을 내주고 있습니까?"
"그건 아니지만……."
"전 지금 경기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감독님의 사적인 감정 때문에 제 투구 밸런스를 무너뜨릴 생각은 없습니다. 내려가서 전해 주십시오. 저는 제 방식으로 이 경기를 끝내겠다고."
코치는 태윤의 서늘한 눈빛에 압도되어 더는 말을 잇지 못하고 마운드를 내려갔다.
덕아웃에서 그 보고를 받은 밀러 감독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터질 듯한 분노가 그의 이마 한가운데 굵은 힘줄을 만들어냈다.
"이 빌어먹을 동양인 놈이…… 기어이 내 머리 꼭대기 위에 올라타겠다 이거지?"
그러나 밀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전광판의 점수판은 4대 0으로 태윤의 팀이 앞서가고 있었고, 태윤의 피칭은 그야말로 완벽한 예술에 가까웠으니까.
5회초. 투구 수 10구.
6회초. 투구 수 8구.
태윤은 오직 피칭 터널링과 미세한 회전축 변형만으로 상대 타선의 뇌를 완전히 교란하고 있었다. 억지로 힘을 들여 어깨를 쥐어짜지 않아도, 타자들은 스스로 파멸해 갔다.
하지만 7회초를 앞두고 마운드에 올라섰을 때, 태윤의 눈앞에 불길한 오렌지빛 경고등이 켜졌다.
위이잉.
[경고: 누적 투구 수 60구 도달.] [어깨 관절 와순 마모도: 2.15% 돌파.] [경고: 단기 휴식으로 인한 미세 근섬유 피로 누적 감지. 심박수 불안정.]
쿵쾅! 쿵쾅!
갑작스럽게 심장이 갈비뼈를 뚫고 나올 것처럼 거칠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지독한 이명과 함께, 시야의 가장자리가 검게 물들어 갔다. 15년 전, 어깨 관절 와순이 사방으로 찢어지며 커리어가 끝장나던 그 마지막 경기의 비명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부상 공포증(Yips).'
회귀를 했음에도 육체에 깊게 각인된 과거의 트라우마가, 투구 수가 늘어나고 신체에 미세한 피로가 쌓이는 순간을 놓치지 않고 태윤의 멱살을 잡아챈 것이었다.
숨이 턱 막혔다. 차가운 땀방울이 이마를 타고 흘러내려 눈으로 들어갔다.
"태윤!"
그때, 홈플레이트 뒤에서 루크가 마스크를 벗어 던지고 마운드로 달려왔다.
루크는 태윤의 앞을 가로막아 서며 그의 넓은 어깨를 양손으로 꽉 움켜쥐었다. 덕아웃의 밀러 감독과 스카우트들의 시선으로부터 태윤을 철저히 차단하는 영리한 행동이었다.
"숨 쉬어, 태윤. 내 눈을 봐."
루크의 거친 목소리가 이명을 뚫고 태윤의 귓가에 꽂혔다.
"넌 지금 최고야. 저 멍청이들은 네 공에 손도 못 대고 있어. 네 어깨는 멀쩡해. 내가 다 받아낼 테니까, 넌 그냥 내 미트만 보고 던져. 알겠어?"
루크의 땀에 젖은 얼굴과 단단한 손아귀의 힘이 태윤의 흔들리는 정신을 현실로 붙잡아 두었다.
태윤은 거칠게 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심박수 안정화 중…… 110 bpm.] [경고 창 해제.]
가까스로 시야가 맑아졌다. 푸른색 시스템 창의 수치들이 다시금 정상 궤도로 돌아왔다.
"고맙다, 루크."
"천만에. 자, 이 빌어먹을 영감탱이 코를 완전히 납작하게 만들어주자고."
루크가 씩 웃으며 다시 홈플레이트로 돌아갔다.
태윤은 글러브를 깊게 고쳐 쥐었다. 마모도 수치가 서서히 차오르고 있었지만, 정밀한 리페어 프로토콜 덕분에 아직 파열 임계점까지는 한참 여유가 있었다.
7회를 단 8구로 막아내며 투구 수 66구로 이닝 종료.
그리고 마침내 경기는 8회초로 접어들었다.
전광판의 투구 수 표시기는 겨우 66을 가리키고 있었다. 8회인데 66구. 그것은 밀러 감독이 그토록 바라던 '어깨 혹사로 인한 파멸'의 시나리오를 정면으로 비웃는 숫자였다. 밀러는 덕아웃 난간을 주먹으로 내리치며 부르르 떨고 있었다.
하지만 상대 팀도 순순히 물러설 생각은 없었다.
8회초 선두 타자.
상대 팀의 덕아웃에서 묵직한 체구의 사내가 배트를 들고 걸어 나왔다.
싱글A 홈런 1위이자, 메이저리그 파워 툴 평가에서 상위 1%를 기록한 괴물 신인 중견수, 잭슨 카터였다.
카터는 타석에 들어서며 태윤을 향해 기괴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의 눈빛에는 앞선 타자들과 달리 조급함이 없었다. 그는 사흘 동안 태윤의 투구 비디오를 수십 번 돌려본 듯, 아주 느긋한 템포로 배트를 가볍게 휘둘렀다.
카터가 배트 끝으로 태윤을 가리키며 입모양으로 속삭였다.
'네놈의 그 잘난 터널링 궤적, 이젠 질렸어.'
태윤의 미간이 좁아졌다.
카터는 태윤이 철저하게 낮게 떨어지는 스플리터와 패스트볼의 2지선다로 타자들을 요리해 왔다는 패턴을 완전히 간파했다는 듯, 배트를 어깨 뒤로 바짝 붙이며 극단적인 어퍼스윙 자세를 취했다.
낮은 공을 걷어 올려 담장 밖으로 날려버리겠다는 노골적인 선전포고였다.
마운드 위의 태윤과 타석의 카터 사이에 팽팽한 불꽃이 튀었다.
과연 이 영리한 머리싸움의 승자는 누가 될 것인가. 태윤의 손끝이 다시 한번 팽팽하게 긴장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