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이 아니라, 구시대의 유물을 박살 낼 마운드죠."
태윤은 휴대폰을 주머니에 쑤셔 넣으며 아더 워드를 향해 가볍게 웃어 보였다. 전화를 끊은 뒤에도 사무실 공기는 여전히 팽팽하게 얼어붙어 있었다. 아더는 마른침을 삼키며 서류 가방을 챙겼다.
"밀러 감독은 소문 그대로군. 12라운더 지명권을 던지자마자 노예 부리듯 부리려 들다니. 태윤, 정말 바로 플로리다로 갈 생각인가?"
"안 갈 이유가 없죠. 비행기 표나 알아봐 주십시오. 몸값은 계약서 도장을 찍을 때 올리면 됩니다."
태윤은 어깨를 가볍게 돌렸다. 손가락 끝에 와닿는 감각은 더할 나위 없이 선명했다. 망설일 시간은 없었다. 15년의 마이너리그 생활 동안 뼈저리게 배운 것이 있다면, 프로의 세계에서는 마운드 위에서 보여주는 숫자가 곧 유일한 법이라는 사실이었다.
***
이튿날 아침, 플로리다주 포트마이어스 해먼드 스타디움.
섭씨 35도를 웃도는 고온다습한 공기가 숨통을 턱턱 막아왔다. 사방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와 눅눅한 잔디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드래프트가 끝난 바로 다음 날이었음에도, 트윈스 산하 싱글A 포트마이어스 미라클의 홈구장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구단 프런트가 주최한 자체 평가 매치. 일종의 쇼케이스이자 신인들의 기를 죽이기 위한 통과의례였다.
"이봐, 한국인 12라운더."
덕아웃 뒤편, 가죽 냄새가 짙게 배어 있는 락커룸 입구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데이비드 크로프트였다. 3라운드에 지명되어 계약금만 수십만 달러를 거머쥔 미네소타의 기대주. 그는 이미 구단 로고가 박힌 화려한 언더셔츠를 입고 거들먹거리며 걸어오고 있었다.
"겨우 12라운드 턱걸이로 기어 들어왔으면 얌전히 뒤에서 배팅볼이나 던질 준비나 하지 그래? 밀러 감독님이 기교파 투수들을 어떻게 다루는지 아직 모르는 모양인데."
크로프트가 침을 퉤 뱉으며 태윤의 어깨를 툭 쳤다.
태윤은 대꾸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크로프트의 오른쪽 어깨와 팔꿈치 너머로 허공에 둥둥 떠 있는 푸른색 반투명 창에 고정되어 있었다.
[대상: 데이비드 크로프트] [내측 측부 인대(UCL) 피로도: 68.21%] [어깨 관절 와순(Labrum) 미세 마모도: 42.15% - 적색 경고] [예상 파열 임계점까지 남은 투구 수: 45구 이하]
'미련한 놈.'
태윤은 속으로 혀를 찼다. 저 어깨는 이미 화약고나 다름없었다. 고교 시절의 명성에 취해 자기 몸이 깎여 나가는 줄도 모르고 구속만 갈구하는 전형적인 소모품의 상태였다.
"내 걱정은 접어두고 네 어깨나 신경 쓰지 그래, 데이비드. 오늘 던질 때 릴리스 포인트를 억지로 앞으로 당기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뭐? 이 새끼가 진짜……."
크로프트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태윤의 멱살을 잡으려던 찰나, 덕아웃 입구의 철문이 쾅 소리를 내며 열렸다.
걸걸한 기침 소리와 함께 등장한 사내의 입술 사이로 검붉은 즙이 흘러내렸다. 제임스 밀러 감독이었다. 그는 질겅질겅 씹던 담배를 바닥에 내뱉으며 두 사람을 째려보았다.
"계집애들처럼 쫑알거리지 말고 당장 마운드로 꺼져. 오늘 너희가 던지는 공 하나하나가 내 라인업 카드에 적힐 이름을 결정한다. 특히 12라운더 꼬맹이, 네가 계약서에 장난질을 쳐놨다더군? 85구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내 눈앞에서 3이닝도 못 버티면 당장 짐 싸서 한국으로 돌아갈 준비나 해라."
밀러의 목소리에는 무자비한 구시대의 권위가 가득했다.
태윤은 묵묵히 글러브를 꼈다. 가죽이 손등을 조여오는 느낌이 오히려 차분함을 불어넣었다.
"말씀대로 마운드에서 보여드리죠."
태윤이 그라운드로 걸어 나갔다.
***
자체 청백전이 시작되자 관중석에 앉은 스카우트들과 구단 관계자들의 시선이 일제히 마운드로 쏠렸다.
먼저 마운드에 오른 것은 크로프트였다. 그는 자신의 힘을 과시하려는 듯 초구부터 온 힘을 다해 팔을 휘둘렀다.
콰아앙!
"99마일!"
스피드건을 확인한 스카우트들이 술렁였다. 포수 미트가 찢어질 듯한 소리를 내며 공을 받아냈다. 크로프트는 마운드 위에서 포효하며 야수들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봤어? 이게 진짜 투수의 공이다!"
두 번째 타자를 상대로 크로프트는 구속을 더 끌어올렸다. 100마일. 전광판에 세 자릿수 숫자가 찍히자 덕아웃의 밀러 감독이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태윤의 눈에는 다른 것이 보였다. 크로프트가 공을 던질 때마다, 그의 어깨 관절 부위에서 붉은색 스파크가 튀는 듯한 시스템 홀로그램이 격렬하게 요동쳤다.
[데이비드 크로프트 어깨 와순 마모도: 45.80% -> 51.30%] [릴리스 포인트 불안정: 관절 내 압력 급증]
공 끝이 미세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구속은 빠르지만, 실질적인 회전수(RPM)와 회전 효율성이 떨어지며 공이 날카롭게 뻗지 못하고 밋밋하게 들어갔다. 타자들의 방망이가 밀리기 시작했으나, 그것은 순전히 구속의 힘일 뿐 메커니즘의 승리가 아니었다.
"태윤, 다음은 네 차례다. 몸 풀어라."
코치의 지시에 태윤이 가볍게 어깨를 풀며 불펜 마운드에 섰다.
그의 머릿속에 설치된 '육체 관리 장부'가 실시간으로 그의 신체 데이터를 띄웠다.
[강태윤 - 현재 신체 상태] [어깨 마모도: 0.00%] [팔꿈치 인대 피로도: 0.12%] [현재 컨디션: 최상] [권장 투구 메커니즘: 회전 효율성 98% 지향 필터 가동]
태윤은 깊은숨을 들이쉬었다. 들이마시는 공기가 허파를 채울 때마다, 과거 어깨가 뜯겨 나가던 그 끔찍한 통증의 잔상이 뇌리를 스쳤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공황 발작의 전조 증상이었다.
'진정해라.'
태윤은 손가락 끝으로 실밥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실밥의 거친 감각이 뇌의 뉴런을 자극하며 현실의 감각을 일깨웠다. 지금의 몸은 18세의 깨끗한 몸이다. 마모도는 제로다. 미래의 기술을 완벽하게 구현할 수 있는 가장 완벽한 그릇이다.
"마운드 올라간다."
태윤이 마운드로 걸어 올라갔다. 크로프트가 2이닝 동안 무실점으로 마운드를 내려오며 태윤의 어깨를 다시 한번 강하게 밀쳤다.
"어디 80마일짜리 똥볼로 얼마나 버티나 보자고."
태윤은 대꾸 없이 마운드 흙을 스파이크로 골랐다.
타석에는 싱글A에서 홈런왕 후보로 꼽히는 거구의 유망주 마크 하퍼가 들어섰다. 하퍼는 가볍게 방망이를 휘두르며 태윤을 얕잡아보는 눈빛을 보냈다.
태윤이 포수의 사인을 확인했다. 포수가 바깥쪽 낮은 코스에 미트를 대자, 태윤의 시야에 가상의 터널이 그려졌다. 홈플레이트 앞 7.2미터 지점까지 일직선으로 뻗어 나가는 푸른색의 투구 궤적 터널.
'피칭 터널링(Pitch Tunneling) 가동.'
태윤이 왼발을 높이 들어 올렸다. 군더더기 없는 완벽한 힙 턴(Hip Turn)과 함께 디딤발이 마운드를 강하게 지탱했다. 상체의 회전력이 어깨를 거쳐 손가락 끝으로 전달되는 찰나, 회전축을 정확히 수직으로 맞추며 공을 채 가로질렀다.
슈우우우-!
공이 손끝을 떠나는 순간, 마찰음이 고요한 경기장을 갈랐다.
타자 하퍼의 눈에는 공이 몸쪽 높은 코스로 들어오는 것처럼 보였다. 하퍼가 엉덩이를 뒤로 빼며 배트를 내밀려던 순간, 공은 홈플레이트 직전에서 마치 보이지 않는 벽에 부딪힌 듯 궤적을 꺾으며 바깥쪽 낮게 꽂혔다.
팍!
"스트라이크!"
하퍼는 배트를 휘두르지도 못한 채 멍하니 서 있었다.
"어라?"
스카우트석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스피드건에 찍힌 구속은 91마일(약 146km/h). 크로프트의 100마일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느린 공이었다. 하지만 타자의 타이밍은 완전히 무너져 있었다.
[회전 효율성: 98.4%] [회전수(RPM): 2,550] [터널링 일치도: 99.1%]
"회전 효율성이 완벽해. 공 끝이 죽지 않고 살아 들어온다."
스카우트 한 명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리포트에 무언가를 적기 시작했다.
태윤은 흔들리지 않았다. 두 번째 공 역시 같은 궤적(터널)으로 던졌다. 하퍼는 이전 공의 잔상 때문에 바깥쪽 낮은 공이라 생각하고 배트를 돌렸다.
하지만 이번에는 홈플레이트 앞에서 종으로 뚝 떨어지는 싱커였다.
쉬익!
허공을 가르는 배트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스크라이크 투!"
"말도 안 돼. 방금 포심이랑 완전히 똑같은 궤적으로 날아왔는데……."
하퍼가 머리를 긁적이며 타석에서 뒤로 물러섰다. 그의 얼굴에는 당혹감이 가득했다.
태윤의 세 번째 공은 하이 패스트볼이었다. 역시 똑같은 터널에서 출발해 타자의 눈앞에서 솟구치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라이징 패스트볼. 하퍼의 배트가 허무하게 허공을 갈랐다. 3구 삼진.
"아웃!"
덕아웃에서 침을 뱉으려던 제임스 밀러 감독의 턱이 미세하게 굳어졌다. 그가 들고 있던 씹는담배 통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저 녀석…… 공이 안 보여."
밀러의 나직한 중얼거림을 들은 크로프트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겨우 90마일 초반대 똥볼이잖아요! 다음 이닝에 제가 진짜 괴물이 뭔지 보여주겠습니다!"
크로프트가 신경질적으로 글러브를 챙겨 마운드로 뛰어 올라갔다.
그의 어깨 마모도는 이미 65%를 넘어서고 있었다. 태윤은 마운드를 내려가며 크로프트의 뒷모습을 차갑게 응시했다.
'경고했을 텐데.'
크로프트는 마운드에 서자마자 폭주하기 시작했다. 타자를 압도하겠다는 강박에 온몸의 힘을 쥐어짜냈다. 그의 투구 폼은 기하학적으로 뒤틀리고 있었다. 릴리스 포인트를 억지로 앞으로 끌고 오기 위해 어깨를 비정상적으로 꺾어 던지기 시작한 것이다.
콰앙! 99마일. 콰앙! 100마일.
하지만 공은 사방으로 날뛰었다. 폭투가 나오고 볼넷을 허용했다. 크로프트의 이마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주자가 쌓이자 그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데이비드 크로프트 어깨 와순 마모도: 88.45% - 위험 수치 돌파] [시스템 경고: 다음 한계 투구 시 영구적 구조적 손상 발생 가능성 99.8%]
태윤의 시야에 비치는 크로프트의 오른쪽 어깨가 시뻘건 불꽃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그것은 곧 다가올 파멸의 전조였다.
크로프트는 귀를 막은 채 관중석의 스카우트들을 의식했다. 그는 이빨을 악물고 마지막 힘을 모았다. 102마일을 던져 사태를 수습하겠다는 어리석은 집념이 그의 눈을 멀게 했다.
"으아아아!"
크로프트가 비명을 지르듯 기합을 넣으며 팔을 내리꽂았다.
그 순간이었다.
*뚝!*
경기장 전체에 메아리칠 정도로 둔탁하고 기괴한 파열음이 울려 퍼졌다. 공은 포수 미트 근처에도 가지 못하고 바닥으로 굴러갔다.
"아아아악!"
크로프트가 오른쪽 어깨를 감싸 쥐며 그대로 마운드에 쓰러졌다. 그의 비명소리가 해먼드 스타디움의 뜨거운 공기를 갈랐다. 그는 바닥에 구르며 극심한 고통에 몸부림쳤다.
"트레이너! 당장 들어가!"
밀러 감독이 씹는담배 통을 내던지며 마운드로 달려 나갔다. 관중석의 스카우트들은 충격에 휩싸여 침묵했다.
태윤은 덕아웃 펜스에 기대어 그 광경을 묵묵히 지켜보았다. 슬픔이나 동정심 따위는 없었다. 자신의 몸을 혹사하며 구속이라는 허상에 매달린 투수의 정해진 결말일 뿐이었다.
'내가 겪었던 지옥을 너도 겪는구나.'
과거 어깨가 파열되던 날의 기억이 머릿속을 스쳤지만, 이번에는 공황이 찾아오지 않았다. 오히려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차가운 안도감이 피어올랐다. 자신은 저 길을 걷지 않을 것이다. 철저히 통제하고, 계산하며, 지배할 것이다.
부상당한 크로프트가 들것에 실려 나갔다. 경기장은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밀러 감독이 땀과 씹는담배 즙으로 범벅된 얼굴을 하고 태윤을 매섭게 쏘아보았다.
"……강태윤. 네가 올라가서 이닝 마무리해라. 주자는 2, 3루다."
태윤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가 다시 마운드에 올랐다. 구원 등판. 아웃카운트는 단 하나만 남은 상황이었지만, 주자는 득점권에 있었다.
태윤은 포수를 바라보았다. 포수 미트가 몸쪽 깊숙한 곳으로 움직였다.
'끝내지.'
태윤이 가볍게 와인드업을 했다. 그의 투구는 크로프트의 폭발적인 투구와는 완전히 대조적이었다. 마치 물이 흐르듯 부드럽고, 기계처럼 정교한 메커니즘.
슈우우욱!
공이 타자의 몸쪽 깊숙한 터널을 뚫고 들어갔다. 타자가 움찔하며 몸을 뒤로 빼는 순간, 공은 홈플레이트 직전에서 바깥쪽 스트라이크 존 구석을 정확히 통과했다. 백도어 슬라이더.
팍!
"스트라이크 삼진, 아웃!"
타자는 배트 한번 휘두르지 못하고 삼진으로 물러났다. 경기가 종결되는 순간이었다.
관중석에서 나직한 탄성이 터져 나왔다. 구속은 90마일에 불과했지만, 타자를 완벽하게 농락한 기하학적인 투구였다. 스카우트들은 크로프트의 부상에 대한 충격을 잊은 채, 태윤의 이름을 리포트 맨 위에 새로 받아 적기 시작했다.
밀러 감독 역시 넋을 잃은 표정으로 태윤을 바라보았다.
태윤은 글러브를 툭툭 치며 차갑게 마운드를 내려왔다. 12라운더의 반란이자, 구시대 장벽에 균열을 내는 첫 번째 균열이었다.
그때였다.
마운드를 내려와 덕아웃 계단을 밟는 순간, 태윤의 눈앞에 있는 푸른색 시스템 창이 갑자기 붉은빛으로 무섭게 점멸하기 시작했다.
[위험: 동기화 한계 초과!] [과도한 미래 데이터 로딩으로 인한 신체 부하 감지.] [강태윤 - 어깨 관절 와순 마모도 급상승: 0.00% -> 12.45%] [경고: 실시간 리페어 프로토콜을 즉시 실행하지 않을 시, 영구적 손상 단계로 진입합니다.]
"윽……!"
태윤이 어깨를 움켜쥐며 주저앉았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하며 시야가 붉게 물들어갔다. 숨이 턱 막혀왔다. 완벽하다고 믿었던 18세의 육체에 생각지도 못한 마모도 폭발이 찾아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