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어리둥절한 호평 속에 마운드를 내려오는 태윤의 앞을 업계에서 가장 악명 높고 이성적인 에이전트 아더 워드가 무표정한 얼굴로 가로막아 선다.

그의 무미건조한 회색 눈동자는 태윤의 땀방울이 턱끝으로 흘러내려 흙바닥에 떨어지는 순간까지도 한 치의 흔들림 없이 고정되어 있었다. 그 뒤편, 그림자처럼 늘어선 구단 스카우트들의 웅성거림이 경기장의 정적을 낮게 흔들었다.

"비공개 쇼케이스라."

태윤이 어깨를 가볍게 돌리며 롭 윌슨을 바라보았다. 붉은색 평가서를 쥔 롭 윌슨의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눈앞에 어른거리는 푸른색 홀로그램 창이 그의 분노 지수와 어깨 마모도 경고를 선명하게 뿜어내고 있었다.

[경고: 12시간 이내 추가 전력투구 시 어깨 관절 와순 마모도 급증 예상.] [예상 마모도 상승률: +8.45% - 부상 위험도 '주의' 단계 진입.]

볼을 타고 흐르는 땀이 차갑게 식어 내렸다. 15년 전, 관절 와순이 찢어지는 끔찍한 파열음과 함께 마운드 위에서 무릎을 꿇었던 기억이 척수를 타고 찌릿하게 올라왔다. 심박수가 분당 130회로 치솟으려 하자, 태윤은 의식적으로 호흡을 길게 가라앉혔다.

쓰읍, 후우.

"롭 윌슨 씨."

태윤의 목소리는 마른모래를 비비는 듯 건조했다.

"내가 왜 당신들의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해 내일 아침 내 어깨를 갈아 넣어야 합니까?"

"뭐라고?"

롭 윌슨의 굵은 눈썹이 단숨에 꿈틀거렸다. 옆에 서 있던 구단 관계자 하나가 헛기침을 하며 한 걸음 나섰다.

"강태윤 군, 말을 조심해야지. 이건 메이저리그 30개 구단이 네 가치를 검증하겠다는 공식적인 요구다. 드래프트 전날 밤에 투구 수 60개도 못 채우는 체력이라면, 애초에 선발 투수로서의 자격이 없다는 뜻이야."

"구시대적인 개소리군요."

태윤이 차갑게 받아쳤다.

"60구 전력투구라니. 내일 드래프트 당일 아침에 그런 무식한 짓을 시키는 스포츠가 야구 말고 또 있습니까? NFL 쿼터백에게 드래프트 당일 아침에 100야드 패스를 60번 던지게 만듭니까? 아니면 NBA 유망주에게 아침부터 하프코트 덩크 슛을 60번 연속으로 내리찍으라고 합니까?"

"이, 건방진 녀석이……!"

롭 윌슨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는 씹고 있던 껌을 바닥에 퉤 뱉어내며 태윤의 가슴팍을 가리켰다.

"네가 아무리 대단한 변화구를 던졌어도, 결국 동양에서 온 뼈대 가느다란 기교파 투수일 뿐이야! 내구성이 검증되지 않은 어깨에 수백만 달러를 베팅할 바보 단장은 없다! 내일 아침 8시, 이 마운드에 서지 않는다면 마이너리그 하위 라운드 계약금 5만 달러짜리 인생으로 시작하게 될 줄 알아!"

태윤은 대꾸하는 대신 고개를 돌려 아더 워드를 바라보았다.

아더 워드는 양손을 코트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 마치 타인의 싸움을 관전하는 로마의 귀족처럼 서 있었다. 그의 무표정한 얼굴 밑바닥에 깔린 계산기를 태윤은 정확히 읽어낼 수 있었다.

"아더."

태윤이 그의 이름을 불렀다.

"내 에이전트가 되고 싶다고 하셨죠."

아더 워드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아직 정식 계약서에 서명하기 전이네만."

"그럼 서명하러 가시죠. 저 무식한 스카우트들의 헛소리를 내 귀에서 치워버리는 조건으로."

태윤은 롭 윌슨을 완전히 무시한 채, 경기장 통로 안쪽에 위치한 구단 간이 회의실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주황색 조명이 희미하게 켜진 좁은 방 안에는 낡은 철제 테이블과 의자 몇 개가 전부였다.

아더 워드가 뒤따라 들어와 문을 닫았다. 묵직한 철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바깥의 소음이 차단되었다.

"자네, 상황 파악이 안 되는 모양이군."

아더가 테이블 맞은편 야전용 의자에 깊숙이 몸을 묻으며 품 안에서 서류 봉투를 꺼냈다. 그의 손놀림은 우아하면서도 냉혹했다.

"롭 윌슨은 스카우트 연합에서 꽤 목소리가 큰 인물이야. 그가 작성하는 리포트 한 줄에 너의 드래프트 순위는 순식간에 5라운드 밖으로 밀려날 수 있어. 내일 아침 60구 투구를 거부하는 건, 메이저리그 전체에 '나는 다루기 힘든 골칫덩이'라고 광고하는 꼴이지."

"그래서, 당신도 내가 내일 아침에 어깨를 갈아 넣길 원합니까?"

태윤이 의자를 끌어당겨 앉았다. 두 사람의 거리는 불과 1미터.

"에이전트로서의 내 답변은 간단하네."

아더가 서류 봉투에서 두툼한 계약서 뭉치를 꺼내 탁자 위에 툭 던졌다.

"일단 던져서 증명해라. 그리고 상위 라운드 지명을 받아라. 내 몫의 수수료 5%와 자네의 화려한 데뷔를 위해서라면, 드래프트 전날의 60구 따위는 기꺼이 감수해야 할 비용이지. 여기 내 표준 신인 대리인 계약서가 있네. 서명하게."

태윤이 계약서를 가져와 천천히 넘겼다.

15년 동안 메이저리그와 마이너리그를 구르며 수없이 보아온 전형적인 '신인 노예 계약서'였다. 에이전트에게 유리한 해지 불가 조항, 선수의 연봉 협상권을 사실상 에이전시에게 독점 위임하는 문구, 그리고 부상이나 성적 부진 시 선수가 독자적으로 계약을 파기할 수 없도록 묶어둔 독소 조항들이 교묘한 법률 용어 뒤에 숨어 있었다.

태윤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아더, 당신이 업계에서 왜 '독사'라고 불리는지 이제 알겠군요. 하지만 이 종이 쪼가리는 나한테 통하지 않습니다."

태윤이 계약서를 탁 소리가 나게 덮어 테이블 중앙으로 밀어 보냈다.

"이건 계약이 아니라 강탈입니다. 그리고…… 당신 지금 나한테 사기 칠 만큼 여유로운 상황이 아니지 않습니까?"

아더 워드의 미간에 미세한 주름이 잡혔다.

"무슨 소리지?"

"크리스 켄드릭."

태윤이 입에서 뱉어낸 그 이름에, 아더 워드의 어깨가 순간적으로 경직되었다.

"당신 에이전시의 유일한 메이저리그 올스타 외야수이자 매출의 80%를 책임지던 기둥. 그 크리스 켄드릭이 지난주에 보라스 코퍼레이션으로 에이전트를 갈아탔죠. 맞습니까?"

아더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건 극비 사항이다. 언론에 보도되지도 않았을 텐데, 네가 어떻게……."

"업계에 비밀이 어디 있겠습니까."

태윤은 속으로 웃었다. 미래의 기억 속에서, 2012년 6월 초 아더 워드는 크리스 켄드릭의 이탈로 인해 심각한 자금난에 봉착해 있었다. 그의 에이전시는 파산 직전이었고, 이번 드래프트에서 대형 신인을 잡아 계약금을 한 푼이라도 당겨쓰지 못하면 당장 다음 달 직원들 월급도 주지 못할 처지였다.

"켄드릭이 떠나면서 남긴 미지급 수수료 소송비용만 해도 숨이 턱밑까지 차올랐을 텐데요."

태윤이 상체를 앞으로 기울이며 아더를 압박했다.

"당신은 지금 당장 시장을 뒤흔들 '괴물 신인'이 필요합니다. 그것도 아주 절박하게. 내가 내일 60구를 던지다 어깨가 박살 나든 말든, 일단 상위 라운드에 지명시켜 계약금 수수료부터 챙겨야 회사가 돌아가니까요. 내 말이 틀렸습니까?"

회의실 안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아더 워드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의 이마에 맺힌 미세한 땀방울이 주황색 조명을 받아 번들거렸다. 업계 최강의 협상가라 자부하던 사내가, 고작 18세의 고교 투수 앞에서 완전히 패를 까보인 채 발가벗겨진 꼴이었다.

"……원하는 게 뭐지?"

침묵 끝에 아더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의 목소리에서 방금 전의 여유는 찾아볼 수 없었다.

"갑을 관계를 확실히 하자는 겁니다."

태윤이 주머니에서 펜을 꺼내 아더의 계약서 첫 장을 거칠게 그어 내렸다.

"첫째, 에이전트 수수료는 5%가 아니라 7%를 주겠습니다."

아더의 눈이 크게 떠졌다. 수수료를 깎아달라고 떼를 쓸 줄 알았는데, 오히려 올리겠다니?

"수수료 7%? 조건이 터무니없겠군."

"맞습니다. 두 번째 조건."

태윤이 아더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한 자 한 자 힘주어 말했다.

"내가 어느 구단에 지명되든, 구단 계약서에 반드시 이 특약을 삽입하십시오. '매 경기 최대 투구 수 85구 제한'. 단 한 구라도 이를 초과할 경우, 투수는 어떠한 불이익도 없이 즉시 마운드를 내려갈 권리를 가지며, 이를 이유로 구단은 벌금이나 징계를 부과할 수 없다."

"미쳤나!"

아더가 벌떡 일어났다. 철제 의자가 뒤로 밀리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85구 제한? 메이저리그 역사상 신인 계약에 그딴 옵션을 넣은 선수는 없어! 감독들은 투구 수 제한을 극도로 싫어해. 특히 구시대적 완투를 지향하는 감독들이라면 널 뽑아놓고도 마운드에 올리지 않을 거다. 이건 네 가치를 스스로 깎아내리는 자살 행위야!"

"내가 던지는 85구는 다른 투수들의 120구보다 정교하고 압도적일 겁니다."

태윤의 목소리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피칭 터널링과 회전 효율성. 내 투구 메커니즘은 완벽합니다. 85구만으로도 상대 타선을 세 바퀴는 완벽히 요리할 수 있어요. 쓸데없이 이닝을 더 먹겠다고 어깨를 갈아 넣는 미련한 짓은 이제 끝입니다. 난 내 몸을 지키면서 15년, 아니 20년 동안 메이저리그를 지배할 겁니다."

"구단들이 이 조건을 받아들일 리가 없다."

"받아들이게 만드는 게 에이전트인 당신의 일입니다, 아더."

태윤이 펜을 돌려 아더의 손에 쥐여주었다.

"파산해서 길거리에 나앉을 겁니까, 아니면 메이저리그의 계약 패러다임을 바꾼 전설적인 에이전트가 될 겁니까? 선택하십시오."

아더 워드는 손에 쥐어진 펜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머릿속에서 수만 가지 계산기가 빠르게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85구 제한이라는 전대미문의 옵션. 하지만 태윤이 오늘 쇼케이스에서 보여준 그 완벽한 무브먼트의 변형 패스트볼과 터널링이라면, 구단들도 눈이 뒤집혀 계약서에 도장을 찍을 수밖에 없을 터였다. 무엇보다, 이 괴물을 놓치면 자신은 정말로 파산이었다.

"……좋아."

아더가 무겁게 침을 삼키며 자리에 앉았다.

"그 미친 조건을 내 계약서에 그대로 녹여내 주지. 대신, 내일 아침 롭 윌슨의 60구 쇼케이스는 어떻게 할 생각이지? 그걸 거부하면 드래프트 순위가 폭락할 텐데."

"거부합니다."

태윤이 냉소했다.

"당장 롭 윌슨에게 가서 전하십시오. 내 공을 더 보고 싶다면, 내일 드래프트에서 순번을 써서 뽑은 다음에 마음껏 보라고 말입니다. 쇼케이스는 오늘로 끝입니다."

아더 워드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번졌다.

"독종이군. 마음에 들어."

그가 계약서의 조항을 수정하기 위해 거침없이 펜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순간, 태윤의 시야에 찬란한 푸른색 홀로그램 빛이 뿜어져 나왔다.

[알림: 아더 워드와의 전속 에이전트 계약이 체결되었습니다.] [파트너 신뢰도 단계 상승: '비즈니스 파트너' → '동반자'] [시스템 동기화 완료: '육체 관리 장부'의 데이터 업데이트 주기가 10분에서 '실시간(초 단위)'으로 단축됩니다.] [새로운 기능 활성화: 이제 투구 직후 근육 마모도 및 회전 효율성이 0.01초 단위로 실시간 피드백됩니다.]

머릿속이 맑아지며, 자신의 어깨 관절과 회전근개의 미세한 신경 세포 하나하나가 살아 움직이는 듯한 감각이 뇌리를 스쳤다. 완벽한 통제력이 손끝에 깃드는 느낌이었다.

"계약은 성사되었네, 태윤."

아더가 서명된 계약서 한 부를 태윤에게 건네며 악수를 청했다.

"이제 우리는 한 배를 탄 거다. 내일 어떤 결과가 나오든 말이지."

"후회하지 않게 해드리죠."

태윤이 그의 손을 굳게 맞잡았다.

* * *

다음 날인 612년 6월 4일 오전.

드래프트 날 아침은 폭풍전야와 같았다.

예상대로 태윤이 롭 윌슨의 60구 추가 쇼케이스 요구를 단칼에 거절하자, 스카우트 연합은 발칵 뒤집혔다. 롭 윌슨은 "건방진 아시아 투수가 메이저리그를 모독했다"며 각 구단 단장들에게 태윤의 인성 결함과 부상 의혹이 담긴 리포트를 뿌려댔다.

효과는 즉각적이었다.

1라운드 전체 지명 후보로 거론되던 태윤의 이름은 순식간에 아래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드래프트가 시작되고, 1라운드부터 5라운드까지 태윤의 이름은 불리지 않았다. 아더 워드의 사무실에서 텔레비전 중계를 지켜보던 태윤은 오히려 덤덤했다.

"정말 괜찮은 건가?"

아더가 초조한 듯 입술을 깨물며 물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최소 2라운드 안에는 지명되었어야 해. 롭 윌슨 그 자식이 판을 완전히 망쳐놨어."

"상관없습니다."

태윤이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

"어차피 하위 라운드로 갈수록 구단은 나를 지명하기 위해 더 적은 돈을 쓰게 될 거고, 그만큼 내 '85구 제한' 옵션을 받아들이기 쉬워질 테니까요."

그때였다.

텔레비전 화면 속 드래프트 중계진의 목소리가 사무실의 정적을 깨뜨렸다.

[미네소타 트윈스, 12라운드 전체 370번 픽으로…… 한국 출신의 우완 투수, 강태윤을 지명합니다!]

"12라운드……!"

아더가 탄식을 내뱉었다. 초고교급 괴물 투수가 고작 12라운드라니.

하지만 태윤의 눈은 번뜩였다. 미네소타 트윈스. 그리고 그들의 싱글A 산하 구단인 포트마이어스 미라클.

그곳의 감독이 누구인지 태윤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제임스 밀러.

"투수는 마운드 위에서 뼈를 묻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진, 씹는담배를 바닥에 내뱉으며 130구 완투를 밥 먹듯이 지시하는 구시대의 화신이자 악명 높은 혹사 신봉자.

탁자 위의 휴대폰이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화면에 뜬 것은 미네소타 트윈스 프런트의 번호였다.

아더가 전화를 받아 스피커폰으로 전환했다. 수화기 너머로 거칠고 걸걸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아더 워드인가? 나는 트윈스 산하 싱글A 감독 제임스 밀러다. 강태윤이 옆에 있나?

"예, 감독님. 듣고 있습니다."

태윤이 대답했다.

- 잘 들어라, 꼬맹이. 네가 무슨 대단한 공을 던진다고 헛바람이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내 밑에 온 이상 그 건방진 85구 제한 옵션 따위는 당장 찢어버리는 게 좋을 거다. 내 마운드 위에선 내가 내려가라고 하기 전까지 아무도 못 내려가니까.

밀러 감독의 으름장에 태윤의 입꼬리가 차갑게 올라갔다.

- 당장 내일 아침까지 플로리다 싱글A 캠프로 합류해라. 늦으면 지명 철회다.

뚝.

전화가 끊겼다.

아더 워드가 태윤을 바라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태윤, 지옥문이 열린 것 같군."

태윤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어깨를 가볍게 풀었다. 손끝에 흐르는 실시간 마모도 수치는 0.00%로 완벽하게 깨끗했다.

"지옥이 아니라, 구시대의 유물을 박살 낼 마운드죠."

태윤의 눈동자가 차가운 투지로 타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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