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흘의 세월은 찰나와 같았으나, 백골지야의 용광로를 식히고도 남을 만큼 차가운 음모를 품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사천 제갈세가의 성소(聖所), 천해선경(天海仙境)의 중심에 우뚝 솟은 대회의당은 장엄하다 못해 기괴하리만치 무거운 침묵에 짓눌려 있었다. 청색 매화 문장이 수놓아진 장막들이 사방을 가로막고, 가문 내부의 사법권을 독점한 원로원의 노정객들이 높은 단상 위에서 부동자세로 아래를 굽어보았다.
그 정중앙, 원로원주 제갈무창이 좌정하고 있었다. 먹빛 도포를 입은 그의 노안에는 서자를 한 치의 오차 없이 파멸시키겠다는 단호한 종법적 살기가 서려 있었다.
"서자 제갈휘는 앞으로 나아오라."
집법관의 서슬 퍼런 목소리가 청중석을 때렸다.
제갈휘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의 걸음걸이는 무인의 경쾌함과는 거리가 멀었으나, 기계의 톱니바퀴처럼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일정한 궤도를 그리고 있었다. 그의 뇌리에서는 이미 수백 가지의 공률 계산과 율법의 변수가 빛의 속도로 연산되고 있었다.
그의 머릿속 한구석, 현대 대학 시절 즐겨 부르던 어머니의 자장가 멜로디가 모래알처럼 바스러져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만물성리분개(萬物性理分解)의 대가였다. 뇌수에 가해지는 극심한 열하(熱下)의 대가로 감정이 마모될 때마다, 그는 오히려 더 냉정한 기계가 되어갔다. 타인의 호의를 믿지 않는 그의 편집증적 안광이 단상 위를 훑었다.
그리고 그의 시선이 닿은 곳에는, 뜻밖의 인물이 오만한 미소를 지으며 서 있었다.
사천당문의 소주이자 천재 암기 제조가인 당천악(唐千岳)이었다.
"제갈세가의 종법은 엄정하거늘, 가문의 서자 놈이 백골지야라는 척박한 땅에서 금제(禁制)된 마도 잡술을 부려 사천의 질서를 어지럽혔다."
당천악이 비단 소매를 펄럭이며 제갈무창을 향해 포권을 취했다. 그의 어조는 은근하면서도 날카로웠다.
"원로원주 어른, 저희 사천당문은 이 자가 백골지야에서 자행한 불법 유황 독점과 병기
제조를 획책한 명백한 증거를 확보하였습니다."
당천악이 품속에서 두꺼운 장부를 꺼냈다. 황금색 비단으로 장식된 표지였다. 사천 관아가 보증한 유황 거래 명세서였다.
"최근 반년 동안 백골지야로 흘러 들어간 유황의 양만 수만 근에 달합니다. 유황은 군기시(軍器寺)에서 엄격히 통제하는 군수 물자. 서자가 사사로이 이를 독점한 것은 명백한 반역의 획책입니다."
당천악의 격앙된 목소리가 회의당을 울렸다. 원로원주 제갈무창의 눈빛이 깊어졌다. 그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가문의 가규를 넘어, 대명률(大明律)을 범한 죄로다. 서자 제갈휘는 이에 대해 해명하라."
제갈무창의 목소리에는 승리의 확신이 차 있었다. 사천당문과의 결탁. 그리고 대명률의 칼날. 서자를 완벽히 매장할 이중의 덫이었다.
하지만 제갈휘의 표정은 평온했다. 그의 안구 내측에서 붉은빛 연산 수식이 점멸했다. 그는 당천악이 들고 있는 유황 명세서를 응시했다.
'만물성리분개(萬物性理分解).'
물질의 구조가 해체되어 뇌리로 쏟아졌다. 연산의 대가로 고향의 낡은 도서관 냄새가 소실되었다. 그는 개의치 않았다. 오직 눈앞의 적을 무너뜨릴 수식만이 중요했다.
제갈휘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의 소매 끝에서 거친 한철 조각 하나가 떨어졌다. 바닥에 부딪힌 한철은 기이하게도 회백색의 돌처럼 굳어 있었다.
"유황은 화약의 원료가 아닙니다."
제갈휘의 건조한 음성이 낙하했다.
"그것은 백골지야 기계들의 윤활과 마모를 막는 필터의 원료일 뿐입니다."
당천악이 실소를 터뜨렸다.
"궤변이구나! 유황이 어찌 쇠붙이의 마모를 막는단 말이냐?"
제갈휘는 차가운 눈으로 당천악을 직시했다. 그가 한철 조각을 가리켰다.
"한철 가루와 유황을 고온에서 교반하면 황화철 피막이 형성됩니다. 이는 금속 표면에 불침투성 고체층을 형성하여 수분 접촉을 원천 차단합니다. 산화 반응을 억제하여 기어의 마모 수명을 극대화하는 원리입니다."
현대 기계공학의 극압 첨가제 원리였다. 사천의 조악한 광물로 구현한 토법(土法) 기술이었다. 백골지야 수조에서 일어난 석화 현상이 바로 그 증거였다.
"백골지야의 가마는 이 황석 필터 기술로 작동합니다. 군용 화약과는 성질도, 배합도 다릅니다. 사천 관아의 검수관들 역시 이를 확인하고 무해함을 판정했습니다."
제갈휘가 품에서 관아의 검수 직인이 찍힌 문서를 꺼냈다. 당천악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치밀하게 준비한 유황 독점 혐의가 단숨에 어긋났다.
"그, 그렇다 해도 무단 병기 제조의 죄는 면치 못한다! 백골지야에서 기계 인형을 만드는 것은 명백한 사병 육성이다!"
당천악이 악을 쓰며 소리쳤다. 제갈무창 역시 매서운 어조로 거들었다.
"당 소주의 말이 옳다. 가문의 허락 없이 살상용 기갑을 제조한 것은 가규 위반이다. 원로원은 즉시 백골지야의 모든 자산을 몰수하겠다."
원로원 집법관들이 일제히 검자루를 쥐었다. 공당의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제갈휘의 멸망을 바라는 이들의 침묵이었다.
그때, 제갈휘가 품에서 낡은 법전 한 권을 꺼냈다. 대명률(大明律)이었다.
"대명률 제백이조(第一百二條)를 읊어 드리지요."
제갈휘의 목소리가 정적을 찢었다.
"황실 종묘의 제례를 위한 자동 기구는 관아의 징세와 몰수 대상에서 영구히 제외한다. 또한, 이를 제조하는 공방은 국가의 직할로 간주하여 가문의 종법보다 대명률이 우선한다."
제갈무창의 안색이 굳어졌다.
"그것이 백골지야와 무슨 상관이란 말이냐?"
"백골지야에서 주조하는 기계 인형들은 병기가 아닙니다."
제갈휘가 손가락을 튕겼다. 대회의당의 육중한 문이 열렸다. 수레 한 대가 들어섰다. 그 위에는 거대한 청동 종과 기계 톱니로 연결된 목조 인형이 서 있었다.
"황실의 번영을 기원하는 '자동 성종 제례 종각(自動 聖鐘 祭禮 鐘閣)'입니다."
기어들이 맞물리며 웅장한 종소리가 대회의당을 채웠다. 인형이 정교하게 움직이며 제례의 동작을 완벽히 재현했다. 살상용 병기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오직 황실의 권위를 찬양하는 신묘한 기구일 뿐이었다.
"황당무계한 소리! 급조한 장난감으로 법망을 피하려 드느냐!"
당천악이 삿대질을 했다.
"황실의 공인을 받지 못한 물건은 효력이 없다!"
그 순간, 청중석 뒤편에서 한 여인이 걸어 나왔다. 제갈설명이었다. 그녀의 손에는 황금색 명주로 봉인된 공문서가 들려 있었다.
"황실 예부(禮部)의 공식 접수부입니다."
제갈설명의 맑은 목소리가 공당을 울렸다.
"백골지야 공방은 대명 황실의 예부 위탁 처로 정식 등록되었습니다. 사흘 전, 장안의 황실 세무 감찰 사신을 통해 모든 절차가 완료되었습니다."
문서의 중앙에는 예부의 붉은 도장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황실의 권위였다.
제갈무창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황실의 위탁 처를 가문의 가규로 몰수하는 것은 반역이다. 원로원의 사법권이 황실의 법망 앞에서 무력화되었다.
"이럴 수가……."
당천악이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완벽했던 덫이 오히려 자신들의 목을 죄는 형국이었다.
제갈휘는 냉소적인 시선으로 그들을 내려다보았다. 인간의 욕망과 법률의 허점. 그것들은 기계의 톱니바퀴보다 다루기 쉬운 부품들에 불과했다.
"원로원주 어른."
제갈휘가 제갈무창을 향해 포권을 취했다.
"백골지야는 이제 황실의 영역입니다. 가문의 종법으로 이를 침범하시겠습니까?"
제갈무창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의 주먹이 분노로 잘게 떨릴 뿐이었다.
공당의 승리는 결정되었다. 제갈휘의 완벽한 역전승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크으윽……!"
당천악의 입에서 핏빛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의 눈동자가 광기로 번들거렸다. 그의 비단 소매 속에서 미세하고 붉은 안개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사천당문의 비전 독기, 만천화우의 전조였다.
동시에, 제갈휘의 감각이 경고음을 울렸다. 대회의당 천장 음영 속에서, 정체불명의 살기가 느껴졌다. 가문의 무인도, 당문의 무사도 아닌 기운. 황실의 비밀 세작들이 뿜어내는 차가운 철 혈의 기운이었다.
상황은 새로운 파국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붉은 안개는 은밀했다. 사천당문의 비전 독수, 적련향(赤鍊香). 공기 중으로 기화된 독은 폐부를 녹인다. 제갈휘의 눈동자가 기계적으로 회전했다.
‘만물성리분개(萬物性理分解).’
시야가 흑백으로 반전되었다. 독무의 입자 크기가 수치로 환산되었다. 황과 비소의 화합물. 밀도는 공기보다 무겁다. 바닥을 기어 사방으로 퍼질 궤도였다.
동시에 머릿속 연산 장치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유년 시절, 어머니와 함께 걷던 가을 길의 낙엽 색깔이 지워졌다. 그는 아쉬워하지 않았다. 감정은 생존에 무익한 부품이다.
기화된 비소 화합물은 밀도가 높아 바닥의 서늘한 기류를 타고 흐른다. 이때 고온의 상승 기류를 인위적으로 발생시키면 대류 현상에 의해 천장으로 독무가 강제 배출된다. 유체역학의 기초인 열대류(熱對流) 순환 제어 방식이다.
제갈휘가 오른발로 종각의 하단을 밟았다. 그가 미리 설계해 둔 비상 배기 밸브가 열렸다. "치이이이익!" 청동 종 내부에 압축되어 있던 고온의 증기가 바닥을 향해 폭발하듯 뿜어졌다. 강렬한 열풍이 불었다. 바닥을 기던 붉은 독무가 증기와 뒤엉켜 순식간에 천장으로 치솟았다.
"이, 무슨……!" 당천악이 경악하며 뒤로 물러섰다. 독무는 그가 예상치 못한 궤도로 상승했다. 그리고 그 끝에는 천장의 어둠이 있었다.
"쿨럭! 컥!" 어둠 속에서 기괴한 기침 소리가 터져 나왔다. 동시에 흑색 야행복을 입은 신형 셋이 단상 위로 추락했다. 그들의 가슴팍에 황금빛 실로 수놓아진 문양이 번뜩였다. 날개 달린 물고기, 비어(飛魚). 황실 직속의 무소불위 정보기관, 금의위(錦衣衛)였다.
대회의당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제갈무창의 노안이 경악으로 일그러졌다. 황실의 사신들이 가문의 성소에 잠입해 있었다는 사실. 그것은 가문의 사법권이 이미 황실의 감시 하에 놓였음을 뜻했다.
낙하한 금의위의 수장이 품에서 패를 꺼내 들었다. "황명(皇命)을 수행 중인 금의위 백호(百戶)다. 사천당문은 황실의 자산을 독으로 훼손하려 했는가?" 차가운 쇠붙이 같은 목소리가 당천악의 심장을 찔렀다. 당천악의 손이 부르르 떨렸다. 황실 자산의 훼손은 멸문지화의 대죄였다.
제갈휘는 그 광경을 방관했다. 그의 계산대로였다. 세무 감찰 사신이 보낸 밀탐들이 이곳에 있으리라 예측했다. 황실의 묵인을 얻기 위해 던진 미끼가 저들을 끌어들인 것이다.
금의위 백호가 제갈휘를 돌아보았다. 그의 눈에 기이한 탐욕과 경계심이 서려 있었다. "제갈휘. 네가 만든 이 자동 종각의 도면을 황실에 헌납하라. 그것이 네 목숨을 보존하는 유일한 길이다."
가문의 종법을 피하자, 황실의 가혹한 탐욕이 이빨을 드러냈다. 제갈휘의 입가에 차가운 호선이 그려졌다. 새로운 공식의 연산이 시작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