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푸르스름한 안광이 제갈휘의 가라앉은 눈동자 너머로 번져 나갔다.

백무결이 건넨 정련 한철 구체.

겉보기에는 거울처럼 매끄럽고 완벽한 구형(球形)이었다. 하지만 만물성리분개(萬物性理分解)의 시야는 기만당하지 않았다. 구체 중심부에서 비껴간 삼 분(分) 지점. 붉은 낙인처럼 아로새겨진 미세한 균열이 고동쳤다. 내부의 응력(應力)이 한곳으로 비정상적으로 쏠려 있었다.

"이것은 죽은 쇠요."

제갈휘의 나직한 음성이 백골지야의 어스름한 공기를 갈랐다.

백무결의 눈매가 단숨에 사납게 좁혀졌다. 그의 두꺼운 손가락이 부르르 떨렸다. 평생을 야철독공에 바친 장인에게 이보다 더한 모욕은 없었다.

"죽은 쇠라니! 내 삼십 년 야철 인생을 통틀어 가장 완벽하게 깎아낸 한철이거늘, 감히 구 학문이나 깨우친 서자 놈이 내 안목을 모독하는가!"

백무결의 사나운 기세가 사방을 압도했다. 장인의 분노는 실체적인 압박이 되어 공방의 열기를 더했다. 그러나 제갈휘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은 이미 차가운 수식과 기하학적 선으로 가득 차 있었다.

우우웅.

머릿속 시냅스가 또다시 과열을 일으켰다. 관자놀이가 찢어질 듯한 두통이 밀려왔다. 그 대가로, 그의 영혼 한구석에 남아 있던 현대의 기억 한 조각이 바스러져 내렸다. 대학 시절, 비 내리는 캠퍼스에서 동기들과 함께 나누었던 시시콜콜한 농담과 웃음소리. 그것들이 하얗게 탈색되어 영구히 소실되었다.

상실의 감각은 차가웠다. 하지만 제갈휘는 그 상실감을 손익계산서의 지출 항목 정도로 무심히 치부했다. 대신 그의 뇌리에는 완벽한 물리적 인과관계만이 정교하게 들어찼다.

"열팽창 계수가 상이한 물질이 고온에서 마찰할 때, 내부의 응력 집중점은 불균일한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파열하오. 이것은 금속 피로의 법칙이지요. 아무리 겉면을 매끄럽게 깎아낸들, 내부의 불순물이 뭉친 이 지점을 해결하지 못하면 소용없소."

제갈휘가 손가락 끝으로 구체의 특정 지점을 짚었다.

"이곳에 미세한 공기 주머니와 불순물이 뭉쳐 있소. 기계식 장갑 인형의 관절로 쓰여 매 분 수백 번씩 고압 증기의 힘을 받으면, 이 부위부터 열이 축적될 것이오. 결국 반 나절도 버티지 못하고 칼날 같은 균열이 뻗어 나가며 관절 자체가 폭발하겠지."

"헛소리! 내 눈으로 보지 않는 한 그따위 궤변은 믿지 않는다!"

백무결이 코웃음을 쳤다. 무인들의 검리와 장인의 감각에 의존하는 그에게, 눈에 보이지 않는 내부의 균열 따위는 그저 젊은 서자의 말장난으로 보였다.

제갈휘는 묵묵히 구체를 가마 옆의 고열로 달구어진 석쇠 위에 올렸다. 그리고 고압 증기 파이프의 배출구를 구체의 표면에 직접 연결했다.

"그렇다면 직접 눈으로 확인해 보시오."

치이이이익!

섭씨 수백 도에 달하는 과열 증기가 한철 구체를 사정없이 때렸다. 백무결은 팔짱을 낀 채 비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천하의 한철이 고작 증기 따위에 변형될 리 없다는 확신이었다.

일 각(一刻)이 채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탁.

작지만 명확한 파열음이 공방에 울렸다. 백무결의 눈동자가 급격히 흔들렸다.

완벽했던 한철 구체의 표면 위로, 마치 검날에 베인 듯한 날카로운 금이 선명하게 갈라져 나오고 있었다. 제갈휘가 손가락으로 짚었던 바로 그 지점이었다. 금방이라도 터질 듯 붉게 달아오른 균열을 보며 백무결은 아무런 말도 잇지 못했다. 그의 자부심이 철저히 조각나는 순간이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가. 내 눈으로도 보지 못한 결함을 자네가 어찌 안단 말인가?"

"눈이 아니라 성리(性理)를 보았기 때문이오."

제갈휘가 식어가는 구체를 집게로 집어 올리며 덤덤하게 말했다.

"아무리 뛰어난 장인이라도 고대의 야철 기술로는 금속 내부의 미세한 기포와 밀도 차이를 완벽히 제어할 수 없소. 부품의 마찰과 마모는 고대 무인들이 말하는 '정교함의 쇠퇴'가 아니오. 철저히 통제되지 못한 물리 법칙의 결과일 뿐이지."

백무결은 참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자신의 기술적 한계를 이토록 정밀하게 난도질당해 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이내 그의 눈에 기묘한 갈망이 서렸다.

"그렇다면 해결책이 있단 뜻인가? 이 빌어먹을 마모와 균열을 막을 방법이?"

제갈휘는 대답 대신 공방 구석에 놓인 수조로 걸어갔다.

그의 뇌리는 빠르게 회전했다. 사천의 척박한 토양에서 나오는 물은 석회질이 가득한 경수(硬水)였다. 게다가 백골지야에서 사용하는 가마의 연료에는 유황 성분이 다량 함유되어 있었다.

'수조에서 유황과 한철 가루가 이질적으로 결합하여 석화 현상을 일으키던 물리 현상.'

지난날 가마를 처음 점화했을 때 발견했던 기이한 현상이었다. 고온의 물속에서 유황 가루와 한철의 미세한 찌꺼기가 결합하자, 마치 시멘트처럼 단단한 석회질 앙금이 형성되어 수조 바닥을 뒤덮었었다.

보통의 장인들이라면 그것을 단순한 찌꺼기로 치부하고 버렸을 터였다. 하지만 제갈휘의 머릿속에서는 전혀 다른 공식이 유도되고 있었다.

칼슘과 황산염이 결합하여 형성되는 석고상(石膏狀) 물질. 이것을 역으로 이용한다면?

"마찰 부위에 침투하는 미세한 불순물과 수분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면 되오. 쇠와 쇠가 직접 맞부딪치는 것이 아니라, 그 사이에 완충 지대를 만드는 것이지."

제갈휘가 붓을 들어 도면 위에 거침없이 선을 그어 나갔다.

"사천에서 흔히 나는 황석(黃石)을 다공성 구조로 가공하고, 그 내부를 자성을 띤 한철 가루와 유황 앙금으로 채워 넣소. 이것을 증기와 윤활유가 이동하는 관로 중간에 덧대어 놓는 것이오."

백무결이 도면을 들여다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돌을 쇠붙이 기계 사이에 끼워 넣겠다고? 작동을 방해할 뿐이네만."

"바보 같은 소리. 황석 필터는 불순물을 흡착하는 여과 장치요. 자성을 띤 한철 가루가 윤활유 속의 철가루를 잡아두고, 황석의 미세한 구멍들이 유황의 불순물과 석회 성분을 걸러내어 석화 현상을 유도하오. 즉, 마모를 일으키는 주범들을 이 필터 한 칸이 스스로 굳어지며 모두 흡수하는 것이지."

이것은 기계적 정밀도를 올리기 위해 수천 번 메질을 하는 무식한 방식이 아니었다. 시스템의 구조적 보완을 통해 내구성을 비약적으로 상승시키는 마도 공학적 해법이었다.

백무결은 제갈휘의 설명을 들으며 심장이 세차게 뛰는 것을 느꼈다.

"이 필터만 갈아 끼우면, 관절부의 마모를 막을 수 있다는 뜻이군. 쇠를 새로 깎을 필요 없이, 돌덩이 하나만 갈아주면 된다니……."

"그렇소. 기계의 연속 작동 시간을 최소 열 배 이상 늘릴 수 있소."

제갈휘의 명령에 따라 백무결과 인부들이 분주히 움직였다.

백골지야 계곡에서 채굴한 황석을 격자 모양으로 정교하게 깎아내고, 자성 한철 분말을 채운 가착(假着) 필터가 마침내 고압 압착 기계의 관절 연결부에 장착되었다.

쿠구구구궁!

수차가 돌며 증기 보일러가 고압의 증기를 뿜어냈다. 거대한 무쇠 피스톤이 상하 운동을 시작했다.

이전 같았으면 마찰열로 인해 벌겋게 달아오르고 쇳가루를 뿜어냈을 관절부였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황석 필터가 설치된 연결부로 흘러드는 윤활유는 맑고 투명했다. 마찰로 발생하는 미세한 쇳가루들이 황석 필터 내부에서 자성에 이끌려 단단히 흡착되고 있었다.

한 시간, 두 시간, 반 나절이 지나도 기계는 흔들림 없이 부드럽게 구동되었다.

"성공이오……! 쇠가 타들어 가지 않아!"

백무결이 어린아이처럼 환호성을 질렀다.

무인들이 검의 예리함과 기의 주입에만 매달릴 때, 제갈휘는 철저한 물리적 차단과 여과 장치라는 토착 해결책으로 기계의 한계를 극복해 낸 것이다.

그때, 공방의 굳게 닫힌 철문이 열리며 맑은 발소리가 울렸다.

화려한 비단 옷자락을 펄럭이며 등장한 인물. 제갈설명이었다. 그녀는 평소의 여유로운 미소 대신, 극도로 진지한 눈빛으로 공방 내부를 가득 채운 증기 기계들을 응시했다.

"과연 소문이 사실이었군요."

제갈설명의 시선이 밤낮없이 가동되며 규격화된 나사와 기어 부품을 쏟아내는 압착 기계를 향했다. 대량의 철제 부품들이 일정한 규격으로 쏟아지는 광경은 무림의 어떤 장인 집단에서도 볼 수 없는 기적이었다.

"이 정도의 생산 속도라면 사천 전체의 병기 시장을 흔들고도 남습니다. 휘 공자, 당신은 정말 괴물이군요."

제갈설명의 목소리에는 경외와 함께 철저한 장사꾼으로서의 탐욕이 섞여 있었다. 그녀에게 제갈휘는 이미 단순한 가문의 서자가 아니었다. 무한한 부를 창출해 낼 수 있는 가장 완벽한 황금 거위였다.

제갈휘는 기계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건조하게 말했다.

"장사꾼이 빈손으로 오지는 않았을 텐데."

"물론입니다."

제갈설명이 품 안에서 향나무로 장식된 보관함을 꺼냈다. 그 안에는 붉은 인장이 선명하게 찍힌 계약서가 들어 있었다.

"사천 전역에서 유통되는 유황의 칠 할을 독점할 수 있는 유통 보장 계약서입니다. 관아의 세무 감찰을 우회할 수 있는 가문 명의의 특별 통행증도 포함되어 있지요. 이 모든 비밀을 철저히 보장해 드리는 대가로, 저는 이 백골지야에서 생산되는 부품의 독점 판매권을 원합니다."

제갈휘는 계약서를 받아들여 만물성리분개로 훑어보았다. 종이의 재질, 잉크의 성분, 그리고 계약서 조항 사이에 숨겨진 미세한 법률적 사각지대까지 그의 뇌리에서 계산되었다.

탈세와 독점. 대명률의 허점을 정교하게 파고든 완벽한 장사꾼의 계약이었다.

"손익이 합당하군."

제갈휘가 자신의 인장을 꺼내 계약서 위에 꾹 눌렀다.

철컥.

연맹의 도장이 찍히는 소리가 공방의 증기 소음에 묻혔다. 제갈설명의 입꼬리가 만족스럽게 올라갔다. 이로써 백골지야의 마도 기술 영지는 탄탄한 자금줄과 원료 공급망을 동시에 확보하게 되었다.

그러나 승리의 여운은 길지 않았다.

쾅!

바깥에서 거친 굉음과 함께 쇠붙이가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백골지야를 지키던 가문의 무사들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는 소리가 계곡의 반향을 타고 전해졌다.

"무슨 일인가!"

백무결이 한철 도끼를 치켜들며 소리쳤다.

공방의 철문이 거칠게 부서지며 먼지 속에서 일단의 무리가 걸어 들어왔다. 그들의 가슴팍에는 사천당문(四川唐門)을 상징하는 푸른 연꽃 문양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그들의 중심에 선 깡마른 체구의 사내, 당천악의 파견 집사장이 오만한 미소를 지으며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의 손에는 황실 관아의 붉은 직인이 찍힌 서류가 들려 있었다.

"제갈세가의 서자 제갈휘는 듣거라!"

집사장이 서류를 높이 흔들며 엄숙하게 외쳤다.

"네놈은 가문의 영지 내에서 황실 허가 없이 대량의 유황을 초가공하고, 사천당문의 독점 무기 제조권을 침해하였다. 이에 당문과 대명 관아의 이름으로, 백골지야의 모든 자산과 기계 설비에 대한 소유권 가압류를 선포하노라!"

차가운 바람이 부서진 문틈으로 불어닥쳤다.

제갈설명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고, 백무결의 도끼가 부르르 떨렸다. 그러나 제갈휘의 눈동자는 여전히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처럼 가라앉아 있었다.

그의 시선이 집사장의 손에 들린 가압류 서장을 향해 고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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