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험준하게 솟구친 암벽 사이로 칼바람이 울부짖는다. 당신이 유인한 사파 무리 수백 명이 협곡 입구를 가득 메운다. 횃불의 붉은 불빛이 기괴하게 흔들리며 어둠을 몰아내지만, 당신의 가슴속에 깃든 살기까지 몰아내지는 못한다.

"일부당경 만부막개(一夫當逕 萬夫莫開)라더니, 제 발로 죽을 자리를 찾아 들어왔구나!"

사파의 도두(刀頭)가 비열한 소리로 가가대소하며 도를 치켜든다. 그 뒤로 번뜩이는 흉기들이 숲을 이룬다. 하찮은 쥐새끼들이 호랑이의 아가리 속으로 들어온 줄도 모르고 기고만장할 뿐이다. 사제들을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킨 당신에게는 이제 거칠 것이 없다.

당신은 묵묵히 검자루를 잡는다. 기연으로 얻은 구천의 진기가 단전에서 솟구쳐 검신으로 흘러든다. 그 기운은 화산의 화사한 매화향이 아니요, 만물을 얼려 죽이는 혹한의 검기다.

"건방진 화산의 잔당 놈! 쳐라!"

포효와 함께 수십 명의 무리가 단숨에 짓쳐 들어온다.

서걱.

바람을 가르는 소리는 단 한 번이었다. 당신의 신형이 흐려진다. 검이 정면을 호선으로 가른다. 쾌(快)하고도 중(重)하다. 찰나의 순간, 가로막은 자들의 목줄기에서 붉은 선혈이 분수처럼 뿜어져 나온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쓰러지는 육신들.

검은 멈추지 않는다.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적들의 수급이 떨어진다. 단조로운 가락처럼 묵직하고 거침없는 검로다. 찌르고, 베고, 꺾는다. 군더더기 없는 동작 뒤에는 오직 죽음의 침묵만이 남는다. 수백의 추적대가 좁은 협곡 안에서 비좁게 엉키며 절규하기 시작한다. 포위망은 도리어 그들의 퇴로를 막는 올가미가 되었다.

"괴, 괴물이다! 화산에 저런 괴물이 있을 리 없다!"

도두의 눈에 핏발이 서며 검을 버리고 달아나려 한다. 하지만 당신의 신법은 이미 그의 등 뒤에 닿아 있다.

팟-!

차가운 검날이 그의 척추를 관통하며 뿜어낸 검기가 가슴을 짓이기고 사방으로 흩어진다. 협곡을 가득 메웠던 횃불들이 하나둘 바닥에 떨어져 꺼져간다. 흐르는 것은 붉은 피요, 쌓인 것은 사파의 시신이다. 홀로 대군을 궤멸시킨 참극의 현장.

검 끝에서 피 한 방울을 털어내며 당신은 심호흡을 한다. 이 참혹한 승전보는 곧 거센 바람을 타고 강호 전역으로 퍼져나갈 터다. 무너진 화산의 잔당이라 비웃던 이들이 '협곡의 사신'이라는 새로운 악몽 아래서 벌벌 떨게 되리라.

어둠이 내려앉은 협곡의 침묵 속에서, 당신은 피 묻은 검을 칼집에 쳐넣는다. 사제들을 구했고 적들을 도륙했다. 이제는 다음 행보를 결정해야 할 때다.

다음 화 계속 보기 →

댓글을 남기려면 로그인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