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비린 혈향이 코끝을 찌른다. 흑호채 채주의 처참한 시신 밑, 비밀스럽게 감춰져 있던 목함이 모습을 드러낸다. 당신은 허리를 숙여 그 안에서 붉게 물든 가죽 지전 한 장을 꺼내 든다. 단순한 장부나 비자금의 기록이라 여겼던 그것을 펼친 순간, 당신의 눈동자가 격렬하게 흔들린다.

지전에 선명히 찍힌 인장. 그것은 사도련의 암표가 아니었다. 중원의 대들보이자, 협의(俠義)의 수호자를 자처하는 '무림맹(武林盟)'의 황금빛 사자 인장이다.

서찰에 적힌 필체는 정갈하기 그지없으나, 그 안에 담긴 내용은 추악한 탐욕으로 얼룩져 있다. 화산파가 사파의 기습을 받아 참혹하게 무너지던 그 밤, 무림맹의 지원군이 끝내 당도하지 않았던 이유가 비로소 밝혀진 것이다. 사파의 침공 정보를 묵인하고, 오히려 화산의 배후를 차단하여 고립무원의 처지로 몰아넣은 자. 화산파의 비급과 영약을 나누어 갖기로 밀약을 맺은 배후.

그것은 다름 아닌 무림맹의 제2인자, 부맹주 독고성(獨孤成)이었다.

앞에서는 천하의 안녕을 논하고 뒤로는 음흉한 칼날을 품었던 구밀복검(COU MI FU JIAN, 口蜜腹劍)의 실체. 스승님이 피를 토하며 강호를 저주할 때, 의기를 방패 삼은 위선자들은 어둠 속에서 추악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가슴 깊은 곳에서 억눌린 분노가 화산(火山)처럼 치밀어 오른다. 화산파의 푸른 기상을 짓밟은 자들이 정파의 탈을 쓴 채 천하의 추앙을 받고 있었다니. 이빨이 맞부딪히며 으드득 소리를 낸다.

스승의 유해 앞에서 다짐했던 복수의 대상은, 눈앞의 사파 무리만이 아니었다. 당신의 손바닥에서 뿜어져 나온 차가운 진기가 가죽 서찰을 무섭게 구겨뜨린다. 검 끝이 바닥의 돌을 깊게 파고들며 매서운 검기를 흩뿌린다.

"위선자 놈들…… 가식의 가면에 검풍을 날려 주마."

마침 삼일 뒤, 무림맹 본산에서는 인근 문파의 수장들을 불러 모아 부맹주의 공적을 기리는 대축제가 열릴 예정이다. 독고성 역시 그 자리에서 무림의 정기(正氣)를 논하며 가식적인 훈계를 늘어놓을 터였다.

그들의 위선을 만천하에 까발리고 피의 대가를 치르게 할 기회가 눈앞에 있다. 하지만 상대는 거대한 무림맹. 섣부른 행동은 스스로를 사지로 몰아넣는 지름길이 될 수도 있다.

당신의 눈빛이 벼려진 칼날처럼 서늘하게 식어간다. 복수의 갈림길 위에서, 당신의 손끝이 자루를 강하게 움켜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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