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운전대를 잡은 손가락 끝에 붉게 피가 돌 때까지 힘을 준다. 내비게이션의 목적지도 없이, 그저 동쪽으로, 동쪽으로 달렸다. 마침내 엔진 소리가 잦아들고 닿은 곳은 붉고 파란 지붕들이 옹기종기 엎드린 동해안의 한적한 어촌 마을이다. 차창을 내리자 왈칵 밀려드는 것은 서늘한 갯바람과 쌉싸름한 바다의 온도다. 늦가을의 바다는 가쁜 숨을 몰아쉬는 거대한 푸른 짐승처럼 일렁이고 있다.
보조석에 앉은 서하는 미동도 없이 창밖을 보고 있다. 그녀의 가녀린 실루엣은 겨울을 온몸으로 마주하기 시작한 해변의 마른 갈대 군락처럼 위태롭게 흔들린다. 당신은 차를 세우고 그녀의 손을 잡아 모래사장으로 이끈다. 발끝에 스치는 모래언덕 밑자락에는 이 척박한 염분의 땅에서도 끈질기게 살아남은 메마른 갯메꽃 줄기들이 엉켜 있다. 비록 생기 넘치던 분홍빛 꽃은 진 지 오래지만, 거친 모래를 단단히 움켜쥔 그 뿌리에서는 진하고 쓸쓸한 흙내음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른다. 그 강인한 생명력이 어쩐지 서하의 단단한 내면을 닮았다고 생각하며, 당신은 그녀의 곁바짝 다가선다.
"바다야, 서하야."
당신의 목소리에 서하가 천천히 고개를 돌린다. 차가운 갯바람에 발갛게 언 그녀의 뺨이, 오랫동안 감추어 두었던 서러운 속살처럼 드러난다. 그녀의 눈동자에 일렁이는 하얀 포말을 바라보며 당신은 가슴속에 고여 드는 질문들을 삼킨다.
*우리는 정말로 도망쳐 온 것일까? 이곳에서는 그 가혹했던 기억들이 우리를 찾아내지 못할까? 상처투성이인 너를 품에 안고, 내가 감히 너의 구원이 될 수 있을까?*
서하는 아무런 말이 없다. 파도가 부서지는 서늘한 마찰음만이 두 사람 사이의 무거운 침묵을 대신 메울 뿐이다. 당신은 주머니 속에서 따뜻한 온기가 남아 있는 유자차 캔을 꺼내 그녀의 조그만 두 손에 쥐여 준다. 달콤하면서도 알싸한 유자의 향꽃이 바람에 실려 두 사람 사이에 포근하게 번진다. 서하는 캔의 온기를 가만히 느끼며, 아주 조심스럽게 먼 수평선으로 시선을 던진다. 그 고요하고 깊은 눈빛 속에 스쳐 지나가는 찰나의 해방감, 그리고 이내 뒤따르는 짙은 불안감의 그림자를 당신은 놓치지 않는다.
꺼두었던 휴대폰은 주머니 속에서 무겁게 침묵하고 있지만, 당신들은 안다. 이 작고 아늑한 모래성이 파도 한 번에 쓸려나갈 임시방편의 은신처에 불과하다는 것을.
"정우야."
서하가 마침내 얼어붙은 입술을 열어 당신의 이름을 부른다. 바람에 흩날리는 검은 머리카락 사이로, 떨림을 지워내려는 듯 꼿꼿한 눈동자가 당신을 곧게 응시한다.
"여기 있으면... 다 잊을 수 있을까?"
그녀의 단호하면서도 애처로운 질문이 허공에 흩어진다. 더 멀리 도망쳐 둘만의 세상을 지어 올릴 것인가, 아니면 이 따스한 온기를 품고 다시 그 지옥 같던 현실로 걸어 들어가 사슬을 끊어낼 것인가. 다음 발걸음을 내딛기 전, 차가운 바닷바람이 두 사람의 옷깃을 세차게 흔들며 지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