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골목길엔 이미 차가운 서리가 낮게 가라앉아 있습니다. 젖은 옷자락 끝으로 스며드는 겨울 초입의 바람은 살을 에일 듯 서늘하지만, 당신의 신경은 온통 등 뒤에 닿은 미약한 온기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서하를 억죄어 온 사슬의 시발점이자, 회색빛 폭력의 냄새가 고스란히 배어 있는 그녀의 집 앞. 낡은 대문이 신경질적인 굉음을 내며 열리고, 기어코 마주하고 싶지 않던 이들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적반하장으로 소리를 지르며 서하의 손목을 강제로 낚아채려는 양부모의 거친 손길. 그 험악한 기세에 서하의 어깨가 눈에 띄게 허물어집니다. 그녀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당신의 코트 자락을 부서질 듯 움켜잡고 등 뒤로 숨어버립니다. 얇은 천 너머로 전해지는 서하의 숨소리는 서리 내린 들판에 홀로 남겨진 겨울 허브, 말라붙은 로즈메리의 쓰고도 시린 향을 품고 있습니다. 사시나무 떨듯 흔들리는 그녀의 가냘픈 몸짓이 당신의 등에 아프게 와닿습니다.

"비켜! 이 기집애가 감히 누굴 데리고 어디를 나돌아다녀!"

욕설과 고함이 골목을 메우지만, 당신은 대꾸하는 대신 그들의 앞을 단단히 막아서며 어깨를 넓힙니다. 무질서하게 쏟아지는 폭력적인 언사 속에서 당신을 지탱하는 것은 오직 차분하게 가라앉은 침묵과 외면하지 않겠다는 단호한 시선뿐입니다. 당신의 고요하면서도 매서운 눈빛이 상대의 눈동자에 닿자, 기세등등하던 양부모의 태도에 미세한 균열이 생기며 주춤거립니다. 침묵이 가장 단단한 방패가 되어 서하를 감싸 안는 순간입니다.

그녀는 얼마나 오랫동안 이 숨 막히는 추위 속에서 홀로 울고 있었던 걸까요? 왜 당신은 그녀가 보냈던 소리 없는 신호들을 더 일찍 알아차리지 못했을까요? 이 깊고 어두운 터널의 끝에서, 당신은 진정 그녀의 손을 잡고 따뜻한 봄으로 걸어 나갈 수 있을까요?

"당장 비키지 못해? 경찰에 신고하기 전에!"

양부모가 다시금 억센 손길을 뻗으며 당신의 어깨를 밀치려 합니다. 그 순간, 등 뒤에서 들려오는 서하의 과호흡 소리. 발작적인 떨림이 그녀의 온몸을 지배하며, 당신의 옷자락을 쥔 손끝에 핏기가 가시기 시작합니다. 그녀가 다시 깊은 공황의 늪으로 침잠해가고 있습니다.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습니다. 비좁은 골목길, 적의에 찬 눈빛들과 숨이 막힐 듯한 긴장감 속에서, 당신의 시선이 깊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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