콰아아앙-!
투기장 천장을 뒤흔들며 폭발한 마력의 잔해가 자욱한 백색 먼지가 되어 쏟아졌다.
그 자욱한 낙진의 한가운데서, 세레나 폰 하르트가 무릎을 꿇은 채 비명을 질렀다.
"아, 아아아...! 내, 내 치천사의 눈물이...!"
그녀의 손바닥 위에 놓인 것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산산조각이 난 붉은 마도구의 파편들이었다.
아카데미 수석의 자존심이자 그녀의 가장 강력한 무구가, 오블리비언 블록의 반작용과 파수기 코어의 과부하 폭발에 휘말려 문자 그대로 가루가 되어 버린 것이다.
세레나가 핏발 선 눈으로 나를 노려보며 절규하는 바로 그 순간.
쿠우우웅-!
하늘이 핏빛으로 물들며, 거대한 마력의 격문이 우리들의 머리 위로 낙하했다.
파스스스!
공중에서 타오르며 내려앉은 종이 위에 새겨진 것은, 아카데미 의장 아드리안 베르네 교수의 독단 서명이 선명한 직인 표식이었다.
[경고: 아카데미 행정 의결회령 제404호 발효.] [낙제자 강제 정화 처분 비상령이 선포되었습니다.] [대상: 지하 슬럼가 거주 낙제생 전원 및 동조자.] [내용: 해당 구역의 오염도가 허용치를 초과함에 따라, 즉각적인 '정화(소탕) 작전'을 개시함.]
투기장에 갇혀 있던 300여 명의 낙제생들의 얼굴이 순식간에 흙빛으로 변했다.
"정화... 처분이라고? 우리를 그냥 여기서 다 죽이겠다는 소리잖아!"
"베르네 교수가 드디어 본색을 드러냈어! 미친 노인네가 진짜로 우릴 가축 취급하는구나!"
비명과 통곡이 사방에서 터져 나왔다.
세레나는 박살 난 마도구를 품에 안은 채, 나를 향해 이빨을 갈며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결계 너머로 퇴각했다.
"에단 리드... 너와 그 쓰레기들은 이제 공식적인 '폐기물'이다. 아카데미의 위대한 질서가 너희를 단죄할 것이다!"
그녀의 퇴장과 동시에 투기장의 외벽이 무너지며 지상으로 통하는 통로가 완전히 차단되기 시작했다.
퇴로는 오직 하나.
더 깊고 어두운 지하 슬럼가와 체펠린 유적탑 하층부뿐이었다.
* * *
"이런 젠장, 이거 완전 억까잖아!"
대피하는 낙제생들의 행렬 뒤에서 펠릭스가 머리를 쥐어뜯으며 소리쳤다.
"에단! 베르네 교수가 아예 법을 제멋대로 주무르고 있어! 이 비상령이 발효되면, 지상의 정규 감찰대와 마도 병기들이 지하 슬럼을 짓밟으러 내려올 거라고!"
"알고 있어. 그 늙은이 성격에 자기 계획이 틀어지면 바로 판을 엎어버릴 줄 알았지."
나는 턱을 괴고 뇌를 풀가동했다.
[현재 마력 오염 변이치: 72%]
심장이 뻐근하게 조여들고 있었다.
아까 투기장의 결계를 터뜨리기 위해 파수기 코어와 인과율을 억지로 비틀어 융합한 대가였다.
여기서 변이치가 100%를 찍는 순간, 시스템은 나를 '세계의 적'인 보스 몬스터로 규정하고 즉시 처단하려 들 터였다.
'진정해라, 에단 리드. 3인칭 시점으로 판을 봐. 이 게임을 수천 번 플레이한 고인물의 대가리는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거다.'
나는 품속에서 짤랑거리는 주머니를 꺼냈다. 펠릭스가 숨 가쁘게 건네주었던 제국 금화들이 가득 들어찬 주머니였다.
하지만 그냥 바치기엔 골드의 양이 턱없이 부족했다. 인과율을 개변하고 변이치를 억제하는 데 필요한 등가교환 비용은 상상을 초월하니까.
그렇다면, 시스템의 맹점을 찔러 '할인'을 받아야 했다.
나는 기억의 서랍을 미친 듯이 뒤적였다.
'체펠린 지하 유적탑 1층, 붕괴된 제단.'
빙의 첫날, 내가 위키 상태창을 켜고 탐사했던 그 낡아 빠진 돌덩어리 제단이 떠올랐다.
그 구석탱이에 각인되어 있던 고대의 예외 코드.
[오블리비언 블록(Oblivion Block)].
그것은 고대 신들이 시스템을 구축할 때 남겨둔 일종의 '리셋 오류'이자, 인과의 정합성을 일시적으로 마비시키는 백도어였다.
나는 즉시 1층 제단의 좌표를 향해 정신을 집중하고, 내 상태창의 위키 마법을 강제로 연동시켰다.
위잉-!
[고유 권능: '정밀 공략 위키'를 기동합니다.] [시스템 로그 분석 중...] [경고! 현재 인과율 개변 및 오염도 억제에 필요한 비용: 500골드.] [소지한 제물: 120골드. 대가가 부족합니다!]
"부족하겠지. 하지만 이걸 섞으면 어떨까?"
나는 허공의 파란 인터페이스 화면을 향해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1층 제단에 등록된 고대 문자 리셋 오류, 오블리비언 블록의 인과 정합성 미적용 구역을 현재 좌표로 강제 동기화한다."
[!!! 시스템 내부 충돌 발생 !!!] [고대 코드 '오블리비언 블록'의 기믹이 강제 활성화됩니다.] [인과율 연산 장치에 일시적인 세션 오류가 발생합니다.] [특수 효과 적용: 등가교환 비용 50% 감면!] [요구 비용 변경: 500골드 -> 250골드... 재연산 중... 최종 요구 비용 100골드!]
"오케이, 가성비 지렸고."
나는 가볍게 웃으며 펠릭스의 금화 주머니에서 정확히 100골드를 허공으로 던졌다.
스스스스-!
금화들이 황금빛 가루가 되어 상태창 안으로 빨려 들어갔고, 내 영혼을 옥죄던 보랏빛 오염의 사슬이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마력 오염 변이치: 72% -> 22%로 대폭 감소!] [영혼의 정화가 완료되었습니다. 마력의 흐름이 정상 궤도로 복구됩니다.]
막혔던 숨통이 단번에 트였다.
피어오르던 식은땀이 가시고, 온몸의 세포가 다시 활성화되는 짜릿한 쾌감이 척추를 타고 올라왔다.
"후우, 살겠네."
"에단? 갑자기 안색이 왜 이렇게 좋아진 거야? 너 방금 엄청난 양의 마력을 정화한 것 같은데...?"
펠릭스가 눈을 휘둥그레 뜨며 물었다.
"원래 천재들은 자가 치유 능력이 좀 뛰어나거든. 그보다 펠릭스, 아까 네가 준 그 보고서 말이야."
나는 펠릭스의 어깨를 툭 치며 낮게 속삭였다.
"베르네 교수가 가문 내부 금융망을 통해 누락시킨 비자금과 세금 탈루 보고서. 그거 지금 당장 쓸 수는 없지만, 우리가 지하를 완벽히 장악하는 순간 그 늙은이 목줄을 죄어버릴 최고의 단두대가 될 거야. 잘 간수해 둬."
펠릭스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역시... 너랑 손잡길 잘했군. 판을 짜는 스케일이 달라."
* * *
우리가 도착한 지하 슬럼가는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다.
지상에서 내려오는 철문들이 차례로 닫히고, 붉은색 경고 마법진들이 슬럼가 천장을 뒤덮고 있었다.
"우린 이제 다 죽었어..."
"감찰대가 내려오면 우린 무기도 없이 그냥 도살당할 거라고!"
300명이 넘는 낙제생들이 바닥에 주저앉아 절망을 토해내고 있었다.
평생을 아카데미의 '쓰레기'로 분류되어 멸시받던 이들이었다. 기가 죽을 대로 죽어 반항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상태.
나는 슬럼가 광장의 한가운데에 있는 깨진 석상 위로 올라섰다.
그리고 목소리에 마력을 실어 웅장하게 울렸다.
"다들 주목해라!"
사방이 순간적으로 조용해졌다.
낙제생들의 시선이 일제히 나에게 쏠렸다. 투기장에서 세레나의 마도구를 박살 내고 자신들을 구해낸 '괴물 낙제생' 에단 리드.
"지상으로 기어 올라가서 빌 생각은 버려라. 베르네 교수는 너희를 인간으로 보지 않는다. 그저 아카데미를 돌릴 마력 연료로 볼 뿐이지. 올라가는 순간 바로 마력 추출기에 처박힐 거다."
"그, 그럼 어쩌란 말이야! 우리 보고 정규군이랑 싸우라는 거야? 우린 마법도 제대로 못 쓰는 낙제생들이라고!"
한 학생이 울부짖었다.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무기 들고 싸우지 마라. 너희 같은 똥손들이 검이나 지팡이 들어봐야 정규 감찰대 1개 소대선에서 정리된다."
낙제생들의 얼굴이 더 어두워지려던 찰나, 내가 말을 이었다.
"대신, 삽과 곡괭이를 들어라."
"뭐...?"
"우린 여기서 청야 전술을 펼친다. 지하 2층으로 통하는 유적의 고대 통로를 막고, 그 앞의 슬럼가를 통째로 철옹성의 요새로 바꾼다."
나는 상태창의 위키 지도를 띄워 지하 2층의 고대 방어선 좌표를 머릿속으로 전송받았다.
"체펠린 유적 2층에는 과거 제국이 쓰던 고대 방어선 격벽 장치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마력 제어 권한만 활성화하면 지상의 그 어떤 마법으로도 뚫을 수 없는 절대 장벽이 되지."
나는 미카엘라를 바라보았다.
"미카엘라. 너의 그 무식할 정도로 굳건한 리더십이 필요할 때다."
미카엘라가 허리춤의 대검을 뽑아 들며 슬럼가 광장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녀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묵직한 오라가 낙제생들을 압도했다.
"나 미카엘라 드 브로이가 장담한다! 에단의 말대로 움직인다면, 그 누구도 너희를 소모품처럼 버리지 못하게 하겠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기사의 명예와, 약자를 짓밟는 아카데미 시스템을 향한 끓어오르는 분노가 담겨 있었다.
"칼을 쥘 수 있는 자는 나와 함께 경계를 서고, 마력이 조금이라도 남은 자들은 에단의 지시에 따라 방어벽을 구축해라! 더 이상 저 잘난 엘리트 놈들에게 도살당하는 가축으로 살고 싶지 않다면, 움직여라!"
그녀의 사자후에 낙제생들의 눈빛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체념으로 가득했던 눈동자에 생기가 돌고, 꽉 쥔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해보자... 어차피 죽을 거라면 발악이라도 해봐야지!"
"에단! 우리가 뭘 하면 되는지 명령만 내려줘!"
300여 명의 낙제생들이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나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들의 눈빛은 더 이상 패배자의 그것이 아니었다.
나를 자신들의 유일한 구원자이자, 이 보이지 않는 전쟁의 '진정한 총사령관'으로 인정하는 순간이었다.
[알림: 300여 명의 낙제생 군세가 당신을 지휘관으로 신임합니다.] [휘하 세력: '지하 해방 전선'이 임시 결성되었습니다.] [통솔력 스탯이 개방되며, 세력원들의 공동 마력망 동조율이 35% 상승합니다.]
* * *
작업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낙제생들은 슬럼가의 부서진 잔해와 바위들을 날라 지하 2층 입구에 거대한 바리케이드를 쌓았다.
나는 위키 상태창의 설계도를 바탕으로, 그들의 마력을 한곳으로 모으는 고대 기하학적 마법진들을 바닥에 그렸다.
"여기에 마력을 주입해라. 조금씩이라도 상관없어. 이 진이 완성되면 지상에서 쏘아대는 3서클 이하의 마법은 전부 흡수해서 방어벽의 동력으로 치환된다."
"우와, 진짜네? 마력이 빨려 들어가는 게 아니라 오히려 채워지는 기분이야!"
낙제생들이 감탄사를 터뜨렸다.
지하 슬럼가는 더 이상 죽음을 기다리는 무덤이 아니었다.
단 몇 시간 만에, 그곳은 기성 교수진의 불합리한 살수 명령에 맞서 싸울 수 있는 철옹성의 요새로 완벽하게 탈바꿈하고 있었다.
하지만 내 진짜 목적은 요새 방어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수비만 해서는 말라 죽을 뿐이다. 공격이 최선의 방어지.'
나는 요새의 후방, 즉 지하 2층 깊숙한 어둠을 내려다보았다.
공략 위키에 따르면, 이 지하 2층에는 과거 제국이 남겨둔 거대한 군사 자산이 잠들어 있었다.
[체펠린 지하 유적 2층: 제국령 격리 구역.] [이곳에는 과거 아카데미 설립 초기에 폐기된 '낙제 처분 군 격리 파수기' 50여 기가 봉인되어 있습니다.] [현재 아카데미 교수단은 이 파수기들의 통제권을 획득하여 낙제생 소탕 병기로 개조하려는 백도어 코드를 심어둔 상태입니다.]
"어림없는 소리."
나는 차갑게 웃었다.
베르네 교수가 저 파수기들을 깨워 우리를 몰살하려 한다는 것쯤은 이미 위키를 통해 다 알고 있었다.
"그 파수기들의 오작동 원동력... 내가 먼저 파훼해서 내 걸로 만들어주지."
나는 지하 2층의 어둠 속으로 천천히 발을 내디뎠다.
옆에는 검을 굳게 쥔 미카엘라와, 불안한 듯 주머니를 만지작거리는 펠릭스가 촉마석을 밝히며 나란히 따르고 있었다.
"에단, 이 안쪽의 마력 흐름이 심상치 않아."
미카엘라가 검을 비스듬히 쥐며 경계했다.
"그래, 아주 거대하고 눅눅한 철 냄새가 나는군."
펠릭스도 침을 삼켰다.
어둠 속에서, 거대한 강철의 실루엣들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높이 3미터가 넘는 거대한 인간형 마도 병기들.
온몸이 붉은색 녹과 고대 마법 문자로 뒤덮인 파수기들이 벽면에 거미처럼 매달려 있거나, 바닥에 거대한 비석처럼 늘어서 있었다.
그들의 가슴팍에는 붉은색 낙인 문양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아카데미가 낙제생들을 사냥하기 위해 강제로 덧씌운 '처분'의 낙인이었다.
"이게 바로... 베르네 교수가 숨겨둔 히든카드인가."
내가 파수기 중 하나의 제어반에 손을 올리려는 바로 그 찰나였다.
쿠구구구구궁-!
지하 2층의 바닥 전체가 격렬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단순한 지진이 아니었다.
지상 요새의 방벽이 무언가 거대한 물리적 충격을 받고 삐걱거리는 비명 소리가 이곳까지 흘러들었다.
"에단! 지상에서 감찰대의 선발대가 도달한 모양이야!"
펠릭스가 소리쳤다.
동시에, 우리 앞에 늘어서 있던 50여 기의 파수기들이 기괴한 마찰음을 내며 요동치기 시작했다.
치이이이익-!
그들의 가슴에 새겨진 붉은 낙인들이 피를 흘리듯 붉게 타오르며, 감겨 있던 차가운 강철의 안광이 일제히 번뜩였다.
스우우웅-!
지하 2층의 사방을 가득 채우는 붉은 안광의 물결.
수십 개의 붉은 눈동자들이 일제히 우리를 향해 조준되듯 고정되었다.
[경고!] [아카데미 상부의 강제 기동 명령이 하달되었습니다!] ['낙제 처분 군 격리 파수기'들이 일제히 폭주 상태로 눈을 뜹니다!] [식별 코드 분석: 타깃 '에단 리드' 및 지하 낙제생 전원. 즉시 말살 모드 가동!]
철컥, 철컥, 철컥!
거대한 철제 칼날들이 파수기들의 팔에서 튀어나오며 바닥을 긁는 소리가 지하 전체를 가득 메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