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결투는 삼일 뒤 검 투기장이다. 너희 하찮은 고혈을 빠는 벌레들에게 진짜 서열의 무게를 알려주지."

세레나가 어금니를 깨물며 선언했던 그 오만한 선언이, 지금 로얄 판테온 아카데미의 중앙 검 투기장 상공에 청동 종소리처럼 무겁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정확히 사흘 뒤.

나는 관중석을 빼곡하게 메운 엘리트 학도들의 야유와 비웃음을 한 몸에 받으며 투기장 한가운데의 붉은 흙바닥을 밟았다.

"어이, 리드! 기어이 기어 나왔냐? 오늘이 네 제삿날인 줄은 알고 있지?"

"낙제생 쓰레기가 수석한테 개기더니 정신이 나갔군. 얌전히 슬럼가에서 똥이나 치우지 그랬냐!"

사방에서 쏟아지는 침 섞인 비난들.

귀가 따가울 지경이었지만, 내 입꼬리는 오히려 기분 좋게 나풀거렸다.

사흘 전, 온몸의 마력이 변이되어 괴물 딱지가 될 뻔했던 대위기는 이미 깔끔하게 청소 완료한 상태였으니까.

지하 유적 2층의 파수기를 때려 부수는 과정에서, 나는 1층 제단에 처박혀 있던 사기급 기믹을 기어이 끌어다 썼다.

이름하여 '오블리비언 블록'. 고대 문자가 리셋될 때 발생하는 시스템 오류의 틈새였다.

[시스템 경고: 인과율 개변 시 막대한 '마력 오염 변이치'가 발생합니다!]

[고대 문자 리셋 오류 '오블리비언 블록'의 맹점을 강제 적용합니다.]

[오류 간섭 성공! 등가교환에 필요한 마력 오염 변이치 및 골드 소모량이 즉시 50% 감쇄됩니다!]

덕분에 단돈 몇 골드와 쥐꼬리만 한 변이치만 지불하고 지하 2층의 파수기 코어를 통째로 뜯어낼 수 있었다.

지금 내 주머니 속에서 짤랑거리는 묵직한 코어의 감각이 그 짜릿한 승리의 증거였다.

"에단, 긴장 풀지 마. 세레나 저년은 진짜 살기를 품었어."

투기장 대기석 철망 너머로 미카엘라가 검자루를 꽉 쥔 채 나직하게 경고했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걱정이 가득했지만, 내 시선은 이미 딴 곳을 향해 있었다.

저 멀리, 귀족 전용 관람석 2층 창가에 앉아 싱글벙글 웃으며 수신호를 보내는 녀석.

지하 상단의 지배자이자 내 든든한 물주가 될 펠릭스 발트였다.

그가 손가락 세 개를 쫙 펴 보였다. 배당률이 무려 30배까지 치솟았다는 뜻이다.

내 승리에 슬럼가 주민들의 푼돈과 상단의 비자금까지 싹 다 긁어모아 올인해 뒀으니, 이번 한 판으로 땡겨올 골드가 벌써부터 머릿속에서 황금빛 소나기로 내리고 있었다.

"준비는 끝났어, 미카엘라. 넌 그냥 바깥에서 팝콘이나 뜯으면서 여론몰이나 잘해줘."

나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하며 투기장 중앙으로 걸어 나갔다.

마주 선 세레나 폰 하르트의 모습은 그야말로 '나 엘리트요'라고 온몸으로 광고하는 꼴이었다.

순백의 마법 코트를 정갈하게 차려입은 그녀의 가슴팍에는, 눈이 시릴 정도로 찬란한 광채를 뿜어내는 목걸이가 걸려 있었다.

그녀의 가문이 자랑하는 전설급 아티팩트, '치천사의 눈물'이었다.

"끝까지 허세를 부리는구나, 에단 리드."

세레나가 차가운 눈빛으로 나를 내려다보며 목걸이를 어루만졌다.

"네놈 같은 낙제생 벌레들이 아무리 발버둥 쳐 보았자, 타고난 혈통과 재능의 격차는 메울 수 없다. 오늘 이 자리에서 네놈의 그 더러운 야망을 뼈째로 으스러뜨려 주마."

그녀가 아티팩트를 쥔 손에 마력을 주입하자, 투기장 전체의 공기가 찌르르하며 고압 전류로 가득 찼다.

관중석의 학도들이 탄성을 터뜨렸다. 역시 수석의 위엄은 다르다며 침을 흘리는 꼴이 아주 가관이었다.

하지만 내 눈에 비친 풍경은 전혀 달랐다.

'어디 보자, 대기업 신제품이라더니 불량률이 얼마나 되는지 좀 볼까?'

나는 속으로 낄낄거리며 은밀하게 상태창을 호출했다.

[정밀 공략 위키 상태창 가동.]

[대상: 아티팩트 '치천사의 눈물' 상세 정밀 분석을 시작합니다...]

시야 가득 붉은색 픽셀 데이터가 세레나의 가슴팍을 중심으로 어지럽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초 뒤, 위키가 숨겨진 치명적인 진실을 텍스트로 띄웠다.

[분석 완료!] [장비명: 치천사의 눈물 (전설급)] [상태: 외관은 완벽하나, 내부 코어의 마력 순환각에 0.03도의 미세한 각도 균열(Cracking)이 존재함.] [치명적 약점: 고대 번개 속성 마법의 공명 주파수(432Hz)와 충돌할 시, 마력 제어 회로가 일시적으로 역류하여 자폭할 확률 99.8%.]

'심봤다.'

입안에 침이 고였다.

세레나 저 멍청한 계집은 자기가 들고 있는 무기가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인 줄도 모르고 아주 신이 나 있었다.

"시작해라, 심판."

세레나의 오만한 명령에, 투기장 중앙의 마법 장벽이 일시에 걷혔다.

"결투, 개시!"

심판의 선언이 떨어지기 무섭게, 세레나의 발밑에서 거대한 마법진이 푸른빛을 발하며 솟구쳤다.

"벌레는 벌레답게 기어라! [라이트닝 서지(Lightning Surge)]!"

콰르릉!

마치 하늘이 갈라지는 듯한 굉음과 함께, 수십 줄기의 초고압 번개 줄기가 나를 향해 사방에서 쏟아져 내렸다.

일반적인 낙제생이라면 저 비주얼에 쫄아서 오줌부터 지렸을 터였다.

하지만 수천 번 이 게임을 플레이한 내 고인물 영혼은 오히려 하품을 삼키고 있었다.

"미안하지만, 난 이미 네 패턴을 다 외웠거든."

나는 가볍게 스텝을 밟으며 번개의 궤적 사이를 종이 한 장 차이로 비껴갔다.

"어머나, 아슬아슬했네?"

"이, 이 쥐새끼 같은 놈이...!"

내 노골적인 도발에 세레나의 이마에 핏대가 솟았다.

그녀는 더 큰 마력을 끌어다 쓰기 위해 '치천사의 눈물'을 움켜쥐었다.

목걸이가 뿜어내는 푸른 뇌전의 밀도가 급격히 상승하며, 그녀의 주변에 거대한 폭풍이 몰아쳤다.

바로 이 타이밍이다.

나는 검을 비스듬히 눕히며, 위키가 가리키는 붉은색 '궤적 저격 포인트'에 시선을 고정했다.

[궤적 저격 보정 가동.]

[오블리비언 블록 버그를 적용하여 마력 소모를 차단합니다.]

검끝에 모인 극소량의 마력이 미세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정확히 432Hz의 공명 주파수였다.

"죽어라, 에단 리드!"

세레나가 광기에 찬 비명을 지르며 모든 마력을 폭발시키려던 그 찰나.

나는 제자리에서 용수철처럼 튀어 오르며 검을 가볍게 내찔렀다.

검끝이 닿은 곳은 세레나의 몸이 아니었다.

그녀의 가슴팍에서 찬란하게 빛나던 목걸이, '치천사의 눈물'의 정중앙이었다.

팅-!

유리잔이 깨지는 듯한 맑은 소리가 투기장에 울려 퍼졌다.

"무슨...?"

세레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녀가 미처 상황을 인지하기도 전에, 아티팩트 내부에 갇혀 있던 엄청난 양의 뇌전 마력이 갈 길을 잃고 역류하기 시작했다.

콰아아앙-!

"꺄아아아악?!"

고압의 번개 폭풍이 세레나의 손 안에서 그대로 폭발했다.

그녀가 그토록 자랑하던 전설급 마도구는 형체도 없이 산산조각이 나며 사방으로 튀었고, 폭발의 반동은 고스란히 그녀의 몸으로 전해졌다.

푸른 뇌전에 온몸이 지져진 세레나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날아갔다.

구르르릉!

투기장 바닥의 흙먼지를 온몸으로 쓸어내며, 그녀는 결투장 무대 아래의 진흙탕 구덩이 속으로 개처럼 처박혔다.

"커흑...! 쿨럭!"

화려하던 순백의 마법 코트는 검게 그을려 누더기가 되었고, 얼굴은 흙먼지와 피로 엉망진창이 된 채였다.

방금 전까지 서열의 무게를 운운하던 아카데미 수석의 몰골은 온데간데없었다.

정적.

투기장을 가득 메웠던 수천 명의 관중들이 단 한 명도 숨을 쉬지 못하고 얼어붙었다.

"어라? 전설급이라더니 내구도가 완전 중국산이네."

나는 검을 가볍게 털어내며 진흙탕 속에 처박힌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수석 누님, 서열의 무게가 생각보다 많이 가벼우신가 봐요?"

그 순간, 결투장 바깥에서 대기하던 미카엘라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목청을 높였다.

"보았는가! 이것이 바로 너희가 벌레라 부르며 착취하던 낙제생의 힘이다! 아카데미의 위선적인 서열은 오늘부로 끝났다!"

슬럼가에서 동원된 주민들과 낙제생들이 일제히 환호성을 지르며 투기장이 떠나가라 함성을 질렀다.

귀족 학도들의 얼굴은 사시나무 떨듯 떨렸고, 2층의 펠릭스는 이미 돈 자루를 양손에 쥐고 춤을 추고 있었다.

완벽한 사이다. 완벽한 승리였다.

그러나 세레나가 완전히 박살 난 마도구 조각을 부여잡고 피눈물을 흘리며 절규하는 그 순간.

투기장의 거대한 철문이 거칠게 열리며, 은색 갑옷을 입은 아카데미 감찰단 무리가 들이닥쳤다.

그들의 선두에 선 감찰관이 내 발치에 붉은 인장이 찍힌 양피지 서류를 거칠게 내던졌다.

"에단 리드. 의장 아드리안 베르네 교수의 독단 서명으로 발령된 비상령이다."

그의 차가운 목소리가 승리의 열기를 순식간에 얼려버렸다.

"낙제자 에단 리드를 아카데미의 질서를 어지럽힌 유해 분자로 규정, 즉시 '낙제자 강제 정화 처분 비상령'을 집행한다. 전원, 저 반역자를 구속해라!"

사방에서 들이닥치는 차가운 창날들.

나는 흙바닥에 떨어진 서류를 내려다보며, 천천히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결국 본체가 직접 움직이시겠다 이거지?'

진짜 전쟁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창날들이 내 목덜미를 겨누며 좁혀왔다.

차가운 강철의 감촉이 피부에 닿기도 전에, 내 뇌세포는 이미 초당 수백 번의 시뮬레이션을 돌리며 최적의 생존 루트를 탐색하고 있었다.

'아드리안 베르네. 이 질서 결벽증 늙은이가 결국 룰을 깨고 판을 엎으시겠다?'

예상 범위를 한참 벗어난 초법적 억까(억지 까기)였다.

하지만 이 구역의 가장 지독한 고인물은 바로 나였다.

나는 주머니 속의 '파수기 코어'를 만지작거리며 붉은색 상태창을 다시 한번 가동했다.

[정밀 공략 위키 상태창 임시 가동...] [대상: '낙제자 강제 정화 처분 비상령'의 마법 인장 분석...]

[분석 완료!] [인장 종류: 아카데미 최고 의결회 '현인단'의 절대 명령권 (강제력 등급: 상)] [우회 루트 발견: 아카데미 헌장 제7조 3항 '결투 승자의 권리'와 상충함. 공식 베팅 상단의 개입이 있을 시, 24시간 동안 신변 압수가 법적으로 유예됨.]

'역시, 구멍 없는 규율 법안은 존재하지 않지.'

나는 가볍게 실소를 터뜨리며 검자루를 쥔 손의 힘을 슬그머니 풀었다.

"잠깐. 그 더러운 쇠창 치우시지?"

내 당당한 태도에 감찰관의 눈썹이 꿈틀했다.

"어디서 낙제생 나부랭이가 감히 발악을..."

"발악이 아니라 팩트 체크야, 이 아저씨야."

나는 검지손가락을 까닥이며 투기장 2층의 펠릭스를 가리켰다.

"아카데미 헌장 제7조 3항. 공식 결투에서 승리한 자는 판돈의 정산과 상속 절차가 임페리얼 뱅크를 통해 완료될 때까지 그 어떤 사법 집행도 유예받는다. 맞지, 펠릭스?"

내 부름에 펠릭스가 기다렸다는 듯 양피지 뭉치를 흔들며 난간 아래로 소리쳤다.

"정확합니다, 에단 동업자님! 방금 세레나 영애의 2천 골드와 사설 도박판의 배당금 정산이 정식으로 제국 금융 조합에 등록되었습니다. 지금 에단을 체포하는 건 금융 조합의 자산을 불법 압류하는 것과 같습니다!"

금융 조합이라는 단어에 감찰관의 안색이 순식간에 흙빛으로 변했다.

제아무리 아카데미의 절대 권력이라 해도, 제국의 돈줄을 쥐고 흔드는 상인 연합의 심기를 대놓고 건드릴 수는 없었으니까.

"이, 이 하찮은 벌레들이 감히 법의 맹점을 파고들다니...!"

감찰관이 이를 갈며 검을 뽑아 들려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쿠구구구궁-!

투기장 바닥 깊은 곳에서부터 고막을 찢는 듯한 불길한 진동이 시작되었다.

단순한 지진이 아니었다. 발밑의 붉은 흙바닥이 보라색 마력 빛줄기로 뒤덮이며 거대한 기하학적 문양을 그리기 시작했다.

"뭐, 뭐야?! 땅이 왜 이래?!"

"마력이... 내 마력이 멋대로 빠져나가고 있어!"

관중석에 있던 수천 명의 낙제생과 일반 학도들이 가슴을 쥐어짜며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공기 중의 산소가 일시에 타버린 것처럼, 투기장 전체가 거대한 흡성대법의 도가니로 변해 가고 있었다.

내 눈앞의 시스템 창이 미친 듯이 붉은 경고등을 뿜어냈다.

[위험! 초저주파 마력 흡수 포진 '아르고스의 눈(Eye of Argus)'이 강제 구동되었습니다!] [아카데미 지하의 거대한 마력 발전기가 투기장 전체의 생명력을 동력원으로 빨아들이기 시작합니다.] [경고! 당신의 영혼에 기생한 '정화의 낙인'이 포진과 동조 반응을 일으킵니다!]

[마력 오염 변이치: 45%... 58%... 72%...]

식은땀이 목덜미를 타고 비 오듯 쏟아졌고, 심장이 늑골을 부술 것처럼 요동쳤다.

이 미친 베르네 교수는 처음부터 나 하나만 잡으려고 이 비상령을 내린 게 아니었다.

결투를 미끼로 투기장에 수천 명의 하위권 학생들을 몰아넣은 뒤, 통째로 마력을 제물로 바쳐 지하 유적탑의 동력원으로 쓰려는 '대규모 도축 작전'이었다.

"미, 미치광이 늙은이가... 드디어 미쳤군!"

미카엘라가 검을 뽑아 들고 장벽을 베어내려 했지만, 투기장 전체를 감싼 거대한 보랏빛 결계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으아아악! 살려줘! 문이 안 열려!"

출구로 달려가던 학생들이 결계의 전류에 튕겨 나가며 피를 토했다.

절망과 공포가 순식간에 투기장을 집어삼켰다.

이대로 10분만 지나면 여기 있는 모든 이들이 마력을 전부 빨린 채 미라가 될 판이었다. 물론 내 변이치도 100%를 돌파해 괴물로 변할 터였다.

"하하하! 베르네 교수님의 혜안이시다!"

감찰관이 광기 어린 미소를 지으며 결계 뒤편으로 물러섰다.

"낙제생 쓰레기들아, 아카데미의 미래를 위한 거름이 되는 것을 영광으로 알아라!"

그의 비웃음 소리 너머로, 보랏빛 마력의 소용돌이가 내 몸을 옥죄어 왔다. 숨이 턱 막히는 압도적인 파멸의 감각.

하지만 그 지옥 같은 절망 속에서, 내 입꼬리는 기괴할 정도로 비틀려 올라갔다.

'아드리안 베르네. 네가 아무리 완벽한 설계를 짰어도, 이 게임의 공략집을 통째로 외우고 있는 나한테는 그저 뻔한 패턴일 뿐이야.'

나는 품속에서 지하 2층에서 뜯어낸 '파수기 코어'를 천천히 꺼내 들었다.

이것과... 내가 가진 '오블리비언 블록'의 맹점을 융합한다면?

[돌발 퀘스트: '지옥의 도가니에서 살아남기'가 생성되었습니다.] [성공 보상: 아카데미 지하 제어권 획득 및 마력 오염 변이치 대폭 감소.] [실패 패널티: 영혼 소멸 및 세계의 억지력 작동.]

"다들 꽉 잡아라."

나는 터질 듯이 요동치는 파수기 코어에 내 마력을 들이부으며, 미친 듯이 폭주하는 상태창을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진짜 꼼수가 뭔지 지금부터 똑똑히 보여줄 테니까."

거대한 폭발의 빛이 우리를 집어삼키기 직전의 찰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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