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붉은 이끼 지대 안쪽에서, 지도교수단 아드리안 베르네의 암살 명령을 받은 전담 징벌관의 거대한 철퇴 실루엣이 드러난다.

피 비린내 섞인 지하 유적의 독소가 흔들리며 안개 속에서 묵직한 발걸음 소리가 울렸다.

쿵. 쿵.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바닥의 자갈들이 비명을 지르며 튀어 올랐다.

"가웨인 같은 애송이를 보낸 베르네 교수의 실책이군."

안개를 찢고 나타난 사내의 목소리는 쇠 긁는 소리처럼 거칠었다.

가슴팍에 아카데미 현인단의 붉은 낙인이 선명하게 박힌 강철 갑옷.

그가 성인 남성 몸통만 한 가시 철퇴를 어깨에 걸치며 이빨을 드러냈다.

징벌단 부단장, 바르토.

아카데미의 어두운 뒤처리를 전담하는 진짜 살수가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에단 리드. 그리고 미카엘라 드 브로이. 낙제자 즉결 처분령에 따라, 이곳에서 집행한다."

바르토가 철퇴를 슬쩍 내리치자, 바닥의 석판이 사방으로 갈라지며 파편이 튀었다.

지독한 마력의 압박감이 사방을 짓눌렀다.

옆에 선 미카엘라의 손이 검자루를 꽉 쥐며 하얗게 떨렸다.

"낙제자 즉결 처분이라니…… 학칙에 그런 가혹한 규정은 없다! 이건 명백한 사적 살인이다!"

미카엘라가 소리쳤지만, 바르토는 콧방귀를 낄 뿐이었다.

"규정은 현인단이 만든다. 낙제생의 목숨 하나쯤 소모품으로 처리하는 법안은 1분이면 통과되지."

그는 철퇴를 고쳐 잡으며 잔인한 미소를 지었다.

"어차피 10분 뒤면 이 구역 전체가 정화의 불꽃으로 타버릴 터. 너희의 사체조차 남지 않을 것이다."

숨이 막히는 압박감 속에서 미카엘라는 검을 뽑아 들려 했다.

하지만 나는 그녀의 어깨를 툭 치며 제지했다.

"미카엘라, 굳이 저런 무식한 쇳덩어리랑 힘자랑할 필요 없어."

"에단? 하지만 저 자의 마력은 최소 4성 이상이다. 정면 승부는 무리야!"

"누가 정면으로 싸운대?"

나는 가볍게 실소를 터뜨렸다.

내 눈앞에는 이미 화려한 홀로그램 스크린이 명멸하고 있었으니까.

[시스템 경고: 아카데미 상부의 강제 정화 프로토콜 '지옥의 정원'이 기동 중입니다.] [남은 시간: 08분 42초] [적대 대상: 징벌관 바르토 (LV.45)] [상태: 현인단의 특수 가호 '규율의 의복' 활성화 중 (물리/마법 피해 80% 감소)]

과연, 베르네 교수가 보낸 사냥개답게 완벽한 방어 대책을 두르고 왔다.

정면으로 들이받았다간 이쪽의 뼈가 먼저 가루가 될 게 뻔했다.

하지만 나는 수천 번 이 게임을 플레이한 고인물이다.

이 유적 1층의 모든 구석과 아카데미 학칙의 맹점까지 통째로 외우고 있는 몸이란 소리다.

'베르네 영감탱이가 학칙을 제멋대로 개정해서 날 죽이려 한다면.'

나 역시 학칙으로 그 목줄을 조여주는 게 인지상정이지.

나는 슬며시 고개를 돌려, 바르토의 등 뒤에 있는 반쯤 무너진 석조 제단을 바라보았다.

1화에서 미리 눈여겨보았던, 이끼에 뒤덮인 고대의 제단.

그곳에는 고대 문자가 조각되어 있었다.

[정밀 공략 위키 가동] [분석 대상: 체펠린 지하 유적탑 1층 '오블리비언 블록'] [정보: 고대 제단에 새겨진 문자 리셋 오류. 특정 주파수의 마력을 주입할 경우, 반경 10미터 이내의 모든 마력 법칙과 아카데미 시스템 서버의 동기화가 3초간 강제 리셋됨.]

바로 이거다.

1화에서 기연을 스캔할 때 발견해 둔 이 유적의 치명적인 시스템 오류.

이 '오블리비언 블록'을 활성화하면, 위키의 개변 비용을 절반으로 후려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한 가지 재미있는 짓을 할 수 있다.

"바르토 씨. 질문 하나 하죠."

나는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느긋하게 걸음을 옮겼다.

"죽기 전에 유언이라도 남기고 싶은 거냐?"

바르토가 비웃으며 철퇴를 들어 올렸다.

"아뇨. 아카데미 특별법 제14조 2항을 기억하시나 해서요."

"……뭐라?"

"‘지하 유적 및 아카데미 내부 장소에서, 교수단의 정식 허가증 없이 학생 혹은 임직원 간의 물리적 충돌을 유발하는 모든 행위는 사적 결투로 규정하며, 적발 시 유적 방어 시스템에 의해 즉각 배제된다.’"

나는 나직하게 읊조렸다.

바르토의 눈썹이 꿈틀했다.

"헛소리 마라. 나는 현인단의 정식 명령을 받고 움직이는 징벌관이다. 내 갑옷의 가호가 나를 아카데미 시스템의 관리자로 증명하고 있지!"

"그랬었죠. 3초 전까지는요."

나는 주머니에서 꺼낸 단 1골드를 튕겨 올렸다.

짤랑.

금화가 허공에서 회전하는 순간, 나는 위키의 개변 권능을 작동시켰다.

[개변 퀘스트: '오블리비언 블록'의 고대 문자 강제 가동] [원래 소모 비용: 제국 금화 10골드] [특수 조건 달성: 고대 제단의 리셋 오류 연동] [소모 비용 50% 감면 적용!] [최종 소모 비용: 제국 금화 5골드]

품 안의 금화 주머니에서 5골드가 빛의 입자로 지워졌다.

동시에, 바르토의 등 뒤에 있던 제단의 고대 문자가 푸른빛을 발하며 거꾸로 회전하기 시작했다.

우우우웅—!

공기가 진동하며 기괴한 공명음이 지하 슬럼가를 가득 채웠다.

바르토가 입고 있던 강철 갑옷의 붉은 낙인이 미친 듯이 점멸했다.

"이, 이게 무슨……?! 갑옷의 마력이 왜 역류하는 거지?"

"말했잖아요. 리셋이라고."

[인과율 개변 성공!] [‘오블리비언 블록’의 리셋 파동이 바르토의 ‘규율의 의복’ 가호를 강제로 일시 해제합니다.] [아카데미 시스템 서버와의 연결이 3초간 차단됩니다.]

그 3초면 충분했다.

아카데미의 방어 시스템은 이제 바르토를 ‘정식 징벌관’이 아닌, ‘무단으로 유적에서 사적 결투를 벌이는 불법 침입자’로 인식한다.

지이잉!

유적 천장에 설치된 고대 방어 마법진들이 일제히 붉은색으로 물들었다.

바르토의 머리 위로 수십 개의 마력 포격 조준선이 정렬했다.

"말도 안 돼! 내가…… 내가 침입자라고?! 으아아악!"

바르토가 황급히 철퇴를 휘두르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학칙을 위반한 자에게 내려지는 아카데미의 자동 방어 시스템은 가차 없었다.

콰아아앙—!

하늘에서 쏟아진 순백의 마력 광선 수십 줄기가 바르토의 신형을 그대로 관통했다.

어떠한 물리적 충돌도 없이, 단지 학칙의 모순을 찔러 유적 자체의 방어 기전을 가동시킨 결과였다.

먼지가 자욱하게 피어올랐다.

바르토가 서 있던 자리에는 그가 쓰러지며 남긴 거대한 철퇴와 잿더미만이 뒹굴고 있었다.

단 1g의 체력 손실도 없이, 4성의 강자를 한순간에 소멸시킨 완벽한 지능적 완승이었다.

옆에서 지켜보던 미카엘라는 턱이 빠질 듯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에단…… 너,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방어 시스템을 해킹한 건가?"

"해킹이라니요. 그냥 법을 잘 지킨 것뿐입니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바르토가 남긴 잿더미 속으로 걸어갔다.

그의 시체가 타버린 자리에서 반짝이는 무언가가 보였다.

[전리품 획득: 징벌단의 증표 (영웅 등급)] [전리품 획득: 고농축 마력 정수 2개]

"쏠쏠하네."

나는 전리품을 챙겨 주머니에 넣었다.

하지만 감탄하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귓가에 붉은색 경고등이 여전히 미친 듯이 깜빡이고 있었으니까.

[경고: 아카데미 상부의 강제 정화 프로토콜 '지옥의 정원' 기동 중.] [남은 시간: 05분 12초]

"미카엘라, 멍하니 있을 시간 없어. 뛰어."

"어, 어디로 가야 하지? 탈출구는 전부 봉쇄되었다고 했는데!"

"지상의 탈출구는 막혔겠지. 하지만 지하는 아니야."

나는 제단 옆의 무너진 석벽을 가리켰다.

오블리비언 블록의 리셋 파동으로 인해, 제단 아래 숨겨져 있던 비밀 통로의 잠금장치가 해제되어 있었다.

이곳은 지하 슬럼가 깊숙한 곳으로 연결되는 숨겨진 루트였다.

"이쪽이다."

우리는 붕괴하는 유적의 진동을 등 뒤로 느끼며 어두운 통로 안으로 몸을 던졌다.

***

쿠구구궁!

등 뒤에서 유적의 입구가 완전히 무너지며 먼지 구름이 뿜어져 나왔다.

지하 슬럼가의 외곽, 눅눅한 하수구 냄새가 풍기는 공터로 빠져나온 우리는 마침내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하아, 하아…… 살았군."

미카엘라가 검을 칼집에 넣으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녀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베르네 교수…… 낙제생들을 죽이기 위해 유적 1층을 통째로 날려버리다니. 정말 미친 노인네야."

"그게 그 영감의 '효율적인 질서'라는 거지."

나는 옷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며 차갑게 미소 지었다.

전체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하위 90%의 목숨 따위는 가축의 소모만큼이나 가볍게 여기는 자들.

그게 바로 이 아카데미를 지배하는 현인단의 본질이다.

"하지만 덕분에 베르네 교수는 가웨인과 바르토라는 핵심 수하 둘을 잃었지. 속 좀 쓰릴 거야."

나는 품 안의 '심연의 심장'과 전리품들을 만지작거렸다.

수확은 확실했다.

마력 오염 변이치를 억제할 자원도 충분히 확보했고, 아카데미 상부의 허를 찔렀다.

그때였다.

짝, 짝, 짝.

어두운 골목 모퉁이에서 나지막한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과연, 소문보다 훨씬 더 흥미진진한 구경거리였어."

그림자 속에서 한 사내가 걸어 나왔다.

단정하게 빗어 넘긴 금발에, 값비싼 실크 코트를 걸친 어울리지 않는 차림새.

손가락에는 화려한 보석 반지를 잔뜩 끼고 있는 사내.

펠릭스 발트.

훗날 대륙의 모든 유통망을 쥐고 흔들게 될, 그러나 지금은 지하 슬럼가에서 기회를 노리는 야심 찬 지하 상인이었다.

미카엘라가 경계하며 검자루에 손을 올렸지만, 나는 그녀를 제지했다.

"펠릭스 발트. 쥐새끼처럼 숨어서 구경하는 취미가 있는 줄은 몰랐는데."

"하하, 쥐새끼라니요. 저는 그저 유능한 사업 파트너를 찾고 있는 가난한 상인일 뿐입니다, 에단 리드 씨."

펠릭스가 우아하게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그의 눈빛은 탐욕과 경외심으로 번뜩이고 있었다.

"방금 그 징벌관 바르토를 제거하는 솜씨는 정말 예술이더군요. 마법도, 검술도 아닌 학칙의 모순을 이용해 유적의 방어 시스템을 조작하다니. 그런 정보는 제국 정보부에서도 모를 텐데 말입니다."

"정보가 곧 돈이고 힘이니까."

나는 차가운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그래서, 나한테 접근한 목적이 뭐지? 설마 베르네 교수에게 밀고라도 하려고?"

"천만에요!"

펠릭스가 손사래를 치며 과장된 몸짓을 해 보였다.

"그 융통성 없는 늙은이 밑에서 일해봤자 떨어지는 콩고물도 없습니다. 저는 더 크고, 확실한 노다지를 원하거든요. 예를 들면…… 에단 씨, 당신 같은 괴물과의 동맹 말입니다."

펠릭스가 슬며시 다가와 목소리를 낮췄다.

"당신은 정보와 무력이 있고, 저에게는 자금과 유통망이 있습니다. 우리가 손을 잡는다면, 이 지하 슬럼가뿐만 아니라 아카데미 하부의 거대 세력을 통째로 장악할 수 있습니다."

"자본 연합이라. 흥미롭군."

나는 입꼬리를 올렸다.

안 그래도 시스템의 '마력 오염 변이치'를 억제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막대한 금화가 필요했다.

혼자서 유물을 파는 것보다, 펠릭스 같은 유능한 유통업자를 끼는 편이 훨씬 효율적이다.

"하지만 동맹을 맺으려면 신뢰가 필요하지. 네가 나한테 제공할 수 있는 가치가 뭔지 증명해 봐."

나의 요구에 펠릭스가 씩 웃었다.

그는 품 안에서 붉은색 밀랍으로 봉인된 두꺼운 가죽 보고서를 꺼냈다.

"이걸 보시면 제 성의를 믿으실 겁니다."

그가 건넨 보고서를 받아 들자, 내 눈앞에 시스템 메시지가 조용히 떠올랐다.

[아이템 정보 분석 완료] [내용: 아드리안 베르네 교수의 은밀한 금융 누락 보고서 및 세금 탈루 장부] [위험도: 극상 (아카데미 기득권층을 파멸시킬 수 있는 치명적인 기밀)]

나는 장부의 첫 페이지를 넘겼다.

그 안에는 아카데미 상부가 낙제생들을 사역하여 얻은 마력 자원을 제국의 암시장에 밀수출하고, 그 자금을 세탁해 온 상세한 내역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베르네 교수가 수호하려던 '질서'의 추악한 민낯이 고스란히 담긴 증거물이었다.

"이건……."

미카엘라가 장부의 내용을 슬쩍 훔쳐보고는 얼굴을 붉히며 분노했다.

"이 자들이 정녕 아카데미의 지도자란 말인가?! 학생들을 사지로 몰아넣고 얻은 자금으로 자신들의 배를 불리고 있었다니!"

"놀랄 것도 없잖아."

나는 담담하게 장부를 덮었다.

이 세상의 기득권이란 원래 그런 법이니까.

펠릭스가 침을 꿀꺽 삼키며, 내 눈치를 살폈다.

그의 이마에 식은땀이 한 줄기 흘러내렸다.

"이 비밀 장부를 세상에 폭로하면, 우리는 베르네 교수와 현인단의 표적이 되어 당장 죽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펠릭스가 눈을 번뜩이며 은밀하고 잔인한 미소를 지었다.

"이걸 무기로 그들을 협박하거나 판을 흔든다면, 낙제자 구역 전체의 상권과 유적의 독점 유통권을 우리가 통째로 빼앗아 올 수 있습니다."

그가 내게 한 걸음 더 다가와 속삭였다.

"어떻습니까, 에단 씨. 이 미친 판을 짜고, 그 늙은이들의 목줄을 쥘 준비가 되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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