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이이익!
코를 찌르는 역한 유황 냄새와 함께 붉은 안개가 바닥을 타고 기어왔다.
석벽의 이끼가 안개에 닿자마자 검게 타들어 가며 초콜릿처럼 녹아내렸다.
"에단! 뒤로 물러서! 이 안개는 마력 차단막도 뚫어버려!"
미카엘라가 검을 가로막으며 외쳤다. 그녀의 검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정의감 넘치는 몰락 기사 영애님답게 몸이 먼저 반응하는 건 가상하다만.
유감스럽게도 여긴 힘으로 밀어붙인다고 해결되는 곳이 아니다.
[경고: 금단의 구역 '붉은 이끼 지대'의 마력 독소가 급속도로 팽창합니다.] [접촉 시 초당 150의 지속 마법 피해 및 '마력 부패' 상태 이상 부여.] [현재 생존 확률: 3.4%]
머릿속에 떠오른 빨간색 경고창이 아주 요란하게 깜빡거렸다.
보통 유저라면 여기서 기겁하며 강제 로그아웃을 시도했겠지.
하지만 나는 수천 번 이 지옥을 들락날락한 고인물이다.
"미카엘라, 검 집어넣으시죠. 칼질로 연기를 썰어봤자 검만 녹아내릴 뿐입니다."
"하지만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우린 1분도 안 돼서 뼈도 못 추려!"
"누가 가만히 있는답니까? 내 사냥개가 되기로 했으면 주인의 지시를 믿어야죠."
나는 씩 웃으며 품 안에서 고대 금화 주머니를 꺼냈다.
짤랑거리는 금속음이 어두운 유적 안에 경쾌하게 울렸다.
이 독소 안개의 정체는 단순한 자연재해가 아니다.
아카데미 교수단이 하부 유적의 통제권을 유지하기 위해 심어둔 방어용 고대 식의 일종.
그렇다면 해법은 간단하다.
시스템의 허점을 찔러서 고대 식의 인과율 자체를 리셋해 버리면 된다.
"자, 어디 보자. 위키 켜 봐."
속으로 가볍게 중얼거리자 눈앞에 푸른 반투명 홀로그램 창이 팝업되었다.
[정밀 공략 위키 상태창을 가동합니다.] [대상: 체펠린 지하 유적탑 1층 - 붕괴된 제단]
시야가 온통 푸른빛의 정보 텍스트로 뒤덮였다.
이 유적탑의 설계 구조와 마력 흐름이 한눈에 들어오는 순간이었다.
내 시선이 가 닿은 곳은 제단 구석, 부서진 대리석 틈새에 숨겨진 고대 문자열이었다.
"거기 있었군."
그건 1화에서 내가 슬쩍 스캔해 두었던 바로 그 시스템의 구멍이었다.
고대 마법사들이 안전장치로 남겨둔 일종의 백도어 코드.
일명 '오블리비언 블록(Oblivion Block)'.
이 문자의 배열을 살짝만 비틀면, 유적 시스템은 현재 작동 중인 모든 방어 기믹을 '오류'로 인식하고 강제로 초기화한다.
"에단? 너 지금 뭘 하려는……."
미카엘라가 내 기행에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물었다.
"원래 시스템이라는 건 말입니다, 설계자의 오만을 털어먹으라고 존재하는 겁니다."
나는 제단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코앞까지 다가온 붉은 안개의 열기가 뺨을 훅 끼치며 태웠다.
피부가 따끔거렸지만, 내 손가락은 거침없이 붕괴된 제단의 문자열을 짚었다.
[위키 정보 개변을 시작합니다.] [인과율 개변 대상: '붉은 이끼 지대' 독소 방출식의 소유권 및 방향성] [적용 공식: 오블리비언 블록의 리셋 오류를 통한 제어권 해킹]
띠링!
[경고! 인과율 개변에는 막대한 대가가 따릅니다.] [현재 요구 비용: 제국 금화 10골드] [대체 비용 미지불 시 '마력 오염 변이치' 20% 상승!]
"10골드? 장난해? 누구 코에 붙이라고?"
내 사전에 정가 구매란 없다.
진정한 고인물은 시스템의 똥꼬까지 털어내는 법이다.
"오블리비언 블록의 문자 인덱스 3번과 7번을 교차 대입한다. 시스템 에러를 강제로 유도해."
[……!]
[오류 검출 중…….] [제단의 고대 문자 리셋 오류(오블리비언 블록)가 활성화됩니다!] [시스템 인과율 연산의 부하가 발생하여 개변 비용이 대폭 감소합니다.]
[최종 요구 비용: 제국 금화 5골드]
"그렇지. 반값 할인은 못 참지."
나는 주머니에서 정확히 5골드를 꺼내 제단 틈새로 밀어 넣었다.
제단 틈새가 황금빛으로 번쩍이며 금화들을 삼켜 버렸다.
동시에 내 머릿속에 시스템의 알림음이 경쾌하게 터졌다.
[5골드가 성공적으로 등가교환 제물로 바쳐졌습니다.] [마력 오염 변이치 상승률: 0%] [인과 개변이 완료되었습니다!]
쿠구구구궁!
갑자기 발밑의 대지가 거대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붉은 안개가 우리를 집어삼키기 직전, 제단 중앙에서 눈이 멀 것 같은 청색 광선이 뿜어져 나왔다.
치이이이익!
"어, 어라……?"
미카엘라가 멍청한 소리를 냈다.
우리를 덮치려던 붉은 안개가 기괴한 비명을 지르며 뒤로 밀려나고 있었다.
아니, 단순한 후퇴가 아니었다.
안개의 전파 방향이 완벽하게 '반전'되어, 저 멀리 붉은 이끼 지대의 본진을 향해 역류하기 시작한 것이다.
마치 필름을 되감듯 순식간에 시야가 투명하게 걷혔다.
"안개가…… 역류하고 있어? 마법 공식을 역방향으로 꼬아버린 건가?"
미카엘라가 제단과 나를 번갈아 바라보며 완전히 넋이 나간 표정을 지었다.
"말도 안 돼. 아카데미 상층부의 대마법사들도 이 유적의 식을 건드리는 건 불가능하다고 가르쳤는데……."
"그 양반들이 가르치는 마학이란 건 말이죠, 그냥 자기들 밥그릇 지키려고 만든 사기극입니다."
나는 콧노래목으로 제단 한가운데로 다가갔다.
안개가 걷힌 제단 중앙, 붉은 보석처럼 빛나는 결정 하나가 둥둥 떠 있었다.
[유물: '심연의 심장(하급)'을 획득하셨습니다.] [효과: 장착 시 마력 회복 속도 +30%, 정신계 디버프 면역] [시장 가치: 최소 150골드]
"꿀맛이네."
단돈 5골드로 150골드짜리 유물을 낚아챘다.
이게 바로 고인물의 창조경제다.
미카엘라는 내 손에 들린 심연의 심장을 보며 꿀꺽 침을 삼켰다.
"너…… 정체가 뭐야? 단순히 몰락한 리드 가문의 낙제생이라기엔, 네가 부린 기술은 제국 마탑의 장로들조차 기겁할 수준이야."
그녀의 눈동자에 나를 향한 경외심과 두려움이 복잡하게 뒤섞였다.
그녀가 평생 다져온 고결한 마학적 가치관이 내 손가락 까딱 한 번에 완전히 박살 난 결과물이다.
"말했잖습니까. 난 그냥 공부를 좀 열심히 한 낙제생이라고."
나는 유물을 주머니에 쑤셔 넣으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게다가 방금 그건 마법이 아니라 금융 치료입니다. 돈을 쓰면 세상이 참 편해지거든요."
"금융…… 치료?"
"기사님은 몰라도 됩니다. 자, 이제 길도 열렸으니 본격적으로 노다지를 캐 볼까……."
내가 걸음을 옮기려던 찰나였다.
쩌어어억-!
저 멀리 붉은 이끼 지대 안쪽, 안개가 걷힌 어둠 속에서 묵직한 마찰음이 들려왔다.
단순한 유적의 구동음이 아니었다.
피비린내와 함께 온몸의 보풀이 바짝 일어설 정도의 강렬한 살기.
스윽.
어둠 속에서 비정상적으로 거대한 그림자가 천천히 솟아올랐다.
그의 손에는 가시가 돋친 흉포한 철퇴가 쥐어져 있었고, 철퇴가 바닥을 쓸 때마다 불꽃이 튀었다.
"……아카데미의 전담 징벌관?"
미카엘라의 목소리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징벌관.
아드리안 베르네 교수의 더러운 뒤처리를 전담하는 냉혹한 암살 부대.
그 거대한 철퇴의 실루엣이 우리를 향해 천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낙제생 에단 리드, 그리고 미카엘라 드 브로이."
투구 너머에서 기계처럼 차가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규율 위반 및 유적 무단 점거. 즉결 처분 대상이다."
미카엘라가 다급하게 검을 고쳐 잡으며 내 앞을 막아섰다.
"에단, 도망쳐! 저자는 징벌관 중에서도 악명 높은 '강철의 궤적' 가웨인이야. 최소 3차 각성을 끝낸 괴물이라고!"
3차 각성이라. 레벨로 치면 최소 40 중반이라는 소리다.
이제 막 빙의해서 쪼렙 탈출하려는 나를 상대로 이딴 네임드를 보내다니.
베르네 그 영감탱이, 질서 결벽증이라더니 일 처리 하나는 더럽게 확실하군.
"도망치라고? 기사 영애님, 뒤를 좀 보시죠."
내가 턱끝으로 가리킨 퇴로는 이미 굳게 닫힌 철문과 붉은 안개의 잔해로 막혀 있었다.
애초에 도망칠 곳 따위는 없었다.
[정밀 공략 위키 상태창이 대상의 정보를 강제 스캔합니다.] [대상: 아카데미 전담 징벌관 '가웨인' (Lv.44)] [상태: 베르네의 지배 낙인(Geas) 작동 중, 전신 플레이트 아머 장착] [약점: 마력 흡입구의 역공학적 과부하, 좌측 무릎 관절의 미세한 균열]
위키가 즉각적으로 적의 치명적인 아킬레스건을 띄워 올렸다.
아무리 단단한 철벽이라도 고인물의 눈에는 그저 틈새투성이인 깡통일 뿐.
특히 저 녀석이 입고 있는 전신 갑옷의 마력 동력원.
그게 아주 맛깔스러운 먹잇감이었다.
"미카엘라. 저 무식하게 큰 철퇴를 한 번만 받아낼 수 있겠습니까?"
"미쳤어? 저걸 정면으로 받으면 방패고 검이고 전부 가루가 돼!"
"가루가 되기 전에 제가 끝내 드릴 테니 딱 3초만 버티세요. 기사 가문의 명예를 걸고 말입니다."
나의 뻔뻔한 도발에 미카엘라의 눈동자가 거칠게 흔들렸다.
하지만 그녀는 이내 입술을 깨물며 대검을 비스듬히 세웠다.
"……딱 3초다. 그 뒤에는 나도 장담 못 해!"
쿵!
가웨인이 대지를 박차고 날아올랐다.
거대한 철퇴가 공기를 찢는 굉음을 내며 미카엘라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쿠구구궁—!
미카엘라의 검과 철퇴가 충돌하며 사방으로 불꽃이 튀었다.
그녀의 무릎이 바닥에 처박힐 듯 꺾였고, 입술 사이로 핏방울이 흘러내렸다.
"1초."
나는 제단의 잔해 뒤로 빠르게 몸을 날렸다.
"2초."
시선은 오직 가웨인의 갑옷 등 뒤에 달린 흡입 밸브에 고정되어 있었다.
저 밸브는 유적의 마력을 흡수해 갑옷의 방어력을 극대화하는 장치다.
하지만 방금 전, 내가 오블리비언 블록으로 역류시킨 붉은 안개가 공기 중에 가득 차 있다면 어떨까?
"3초. 끝났습니다."
나는 허공에 손가락을 튕겼다.
[위키 개변 퀘스트: '마력 흡입구 역공학 과부하'를 발동합니다.] [소모 비용: 제국 금화 3골드]
짤랑!
품 안에서 날아간 3골드가 허공에서 빛의 입자로 분해되며 가웨인의 등 뒤로 스며들었다.
평민 세 가족의 석 달 치 생활비가 단 1초 만에 공중분해 되는 순간이었지만, 전혀 아깝지 않았다.
[인과율 개변 성공!] [가웨인의 동력 갑옷이 역류한 '붉은 이끼 독소'를 강제 흡입합니다.]
치이이이익—!
"끄아아악?!"
가웨인의 투구 틈새로 비명과 함께 붉은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강력한 맹독 안개가 갑옷 내부의 마력 회로를 직격한 것이다.
스파크가 사방으로 튀며 가웨인의 거구가 힘없이 무릎을 꿇었다.
철퇴가 바닥에 떨어지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이, 이게 무슨…… 비겁한 짓을……!"
"비겁하다니요. 이건 효율적인 자원 재활용이라고 하는 겁니다."
나는 가웨인의 목덜미로 다가가 주머니에서 단검을 꺼내 들었다.
확실하게 숨통을 끊어 변수를 박멸하는 것. 그것이 고인물의 철칙이다.
스윽.
단검을 치켜든 순간.
가웨인의 가슴팍에 박혀 있던 붉은 마도 통신구가 기괴한 빛을 발하며 스스로 작동했다.
스스스스…… 지리릭!
통신구 너머에서, 소름 끼치도록 차분하고 우아한 노인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역시 내 예상을 뛰어넘는구나, 에단 리드."
아드리안 베르네 교수.
아카데미의 절대적인 지배자이자 질서 결벽증의 화신인 그가 직접 통신을 걸어온 것이다.
- "가웨인마저 무력화할 줄은 몰랐다만, 상관없다. 낙제생들을 위한 새로운 법안이 방금 현인단을 통과했거든."
불길한 예감이 등줄기를 타고 서늘하게 흘러내렸다.
- "지하 유적탑 1층의 전면 폐쇄 및 '소독' 처분이 결정되었다. 10분 뒤, 저주받은 불꽃이 그곳의 모든 생명체를 태워 없앨 것이다."
지리릭!
통신이 뚝 끊기고, 사방의 벽면에서 붉은 경고등이 미친 듯이 회전하기 시작했다.
[경고: 아카데미 상부의 강제 정화 프로토콜 '지옥의 정원'이 기동합니다.] [남은 시간: 09분 59초] [탈출구가 완벽하게 봉쇄되었습니다.]
미카엘라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내 입꼬리는 오히려 기괴할 정도로 비틀려 올라갔다.
"10분이라. 베르네 영감탱이, 판을 아주 크게 벌여 주시는군."
나는 품 안에서 방금 획득한 '심연의 심장'을 꺼내 들며 나직하게 읊조렸다.
"그렇다면 이 유적 자체를 통째로 해킹해 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