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기 창고의 무거운 철문 틈새로 흘러나온 피비린내가 매장 안의 질척한 공기를 가득 채웠다. 바닥에 굴러 떨어진 분홍색 머리끈은 짓이겨진 살점처럼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민지의 머리끈. 중환자실에 격리되어 있어야 할 동생의 유품이 왜 이 기괴한 이계의 식도 아가리에서 기어 나왔는지 연산할 시간 따위는 주어지지 않았다.
*스스슥.*
깨진 유리벽 너머, 도화동의 인적 끊긴 밤거리를 메워 가던 어둠이 일제히 고개를 쳐들었다. 그것은 단순한 어둠이 아니었다. 점장 '공허'의 본질이자, 이 편의점이라는 도살 기계를 움직이는 거대한 심연의 무덤 안개였다. 안개는 살아 있는 유기체처럼 끈적하게 달라붙으며 편의점 내부로 침식해 들어왔다. 그 안개 한가운데에서, 은색으로 번뜩이는 거대한 낫날이 그 압도적인 형상을 온전히 부상시켰다.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귓가를 찌르는 것처럼 예리하게 울렸다.
"쿨럭!"
민우는 입안에 고인 검은 피를 바닥에 뱉어냈다. 액체 질소 가스로 얼어붙은 전신이 바늘로 찌르는 듯한 동상 통증을 비명처럼 내지르고 있었다. 왼쪽 하반신은 이미 감각이 소실되어 목석처럼 굳어 있었다. 대뇌 피질 일부가 타들어 가는 극심한 이염 통증은 그의 잔여 수명이 단 2시간도 채 남지 않았음을 가리키는 초읽기였다. 존재의 윤곽이 뚜렷해질수록, 저 심연의 낫날이 뿜어내는 살기는 오직 민우 한 사람의 목줄기만을 정조준하고 있었다.
거대한 낫날이 공간을 찢으며 목전으로 쇄도했다. 낫날이 스치고 지나가는 궤적을 따라 진열대들이 질척한 엿가락처럼 녹아내렸다. 호흡을 멈추고 체온을 낮추는 임시방편은 이제 통하지 않았다. 점장은 이미 침입자의 신원을 완벽하게 인지했다.
하지만 민우의 눈동자에는 공포가 없었다. 대신 얼음처럼 차가운 이성이 번득였다.
그는 품속을 뒤져 폐기 식품 보관함 하단의 이중 바닥에서 꺼내 두었던 반파된 녹음기를 움켜쥐었다. 2화에서 그가 숨겨두었던, 전임 근무자들의 피와 비명이 서린 유품이었다. 민우는 떨리는 손가락으로 재생 버튼을 눌렀다. 지지직거리는 노이즈 사이로, 점장 공허가 과거 알바생들을 기만하기 위해 내뱉었던 가짜 지령의 본래 목소리가 매장 안에 울려 퍼졌다.
[-근무자는... 매장 내의 모든 자산을... 보존해야... 하며...]
"멈춰."
민우가 쇳소리 나는 목소리로 뱉어냈다. 목구멍에서 솟구친 피가 입술을 타고 흘러내려 턱끝을 적셨다.
"근로계약서 제4조 2항. 그리고 야간 근무 매뉴얼 특별 조항이다. '점포 내부의 고객 및 거래 대상의 신체에 고의적인 훼손을 가할 시, 점주는 발생한 모든 물품 및 유기 자산의 손실을 전액 변상한다.' 기억하고 있겠지, 점장?"
쇄도하던 거대한 낫날이 민우의 코끝 고작 3센티미터 앞에서 거짓말처럼 멈추어 섰다. 낫날이 뿜어내는 습하고 비린 냉기가 민우의 속눈썹에 하얗게 서리를 얹었다. 허공을 부유하는 점장의 안개가 기괴하게 요동치며, 고막을 긁는 듯한 불쾌한 음성을 내질렀다.
[...인간... 벌레 같은 놈이... 감히 계약의 주체에게... 훈수를 두느냐...]
"훈수가 아니야. 등가교환의 법칙이지."
민우는 입꼬리를 뒤틀며 메마른 웃음을 지었다. 그의 손에 쥔 것은 자가 수술용 메스였다. 날카로운 칼날이 그의 왼쪽 팔목을 사정없이 그었다.
서걱하는 소리와 함께 끈적이는 붉은 피가 분수처럼 솟구쳐 바닥의 타일 위로 떨어졌다. 단순한 자해 행위가 아니었다. 민우는 다른 손으로 주머니 속에 들어 있던 것을 꺼냈다. 배후 적대자이자 점장의 앞잡이였던 박태식을 소멸시키고 빼앗은, 그가 늘 호주머니 속에서 조용히 만지작거리던 **검은 마개 열쇠**였다. 이 열쇠는 편의점 지하 깊숙한 곳에 위치한 영혼 수확 장부창을 여는 무기화 핵심 열쇠이자, 매장의 시스템에 직접 개입할 수 있는 마스터 키였다.
민우는 검은 마개 열쇠의 끝부분에 자신의 핏방울을 적셨다. 그리고 그것을 포스기 하단, 철판 뒤편에 숨겨진 특수 제어 홈에 밀어 넣고 강하게 돌렸다.
*철컥!*
기계음이 울리며 포스기 모니터가 붉은빛으로 점멸하기 시작했다. 화면 위로 역대 도살당한 알바생들이 새겨놓았던 특수 시그니처 마크들이 기하학적인 문양을 그리며 활성화되었다. 14화에서 완전히 해제되어야 할 탈출 해킹 프로토콜의 일부가 민우의 정밀한 연산 아래 강제로 인계된 것이다.
"나는 지금 이 매장의 '물건'을 구매하기 위해 대가를 지불하고 있는 고객이자 거래자다. 내 피와 수명이 곧 거래의 재화다. 매장 내에서 발생한 이 고의적인 출혈과 자산 손실은, 계약상 네가 100% 변상해야 하는 손괴 소송 권리로 등록된다. 공격해 봐라. 내 몸이 아주 조금이라도 더 훼손되는 순간, 이 편의점을 지탱하는 이계의 자동 도살 기계 결계 전체가 네 스스로의 계약 위반으로 인해 강제 해체될 테니까."
[이... 이이익...!]
공허의 음성이 찢어질 듯한 비명으로 변했다. 거대한 낫날이 사정없이 떨렸다. 당장이라도 민우의 목을 자르고 싶어 미칠 지경이겠지만, 스스로가 설계한 규칙의 고리가 점장의 목을 죄고 있었다. 인간의 영혼을 완벽하게 수확하기 위해 만든 '절대적인 계약의 완고함'이 역설적이게도 창조주인 고위 마물의 손발을 묶어버린 것이다. 이계의 지배자조차 규칙의 모순 앞에서는 일개 피고인에 불과했다. 정교한 규칙 공략이 만들어낸 완벽한 반차(返遮)이자 통쾌한 사이다였다.
민우는 낫날의 위협을 무시한 채, 마비된 왼쪽 다리를 끌며 구석으로 기어갔다. 진열대 잔해 아래에 쓰러져 있는 형체가 보였다.
흰 꽃을 든 임산부 괴담에 종속되어 영혼을 빼앗긴 채 움직이던 껍데기. 한소희였다.
그녀의 늘어진 머리칼을 거칠게 걷어 올리자, 허연 얼굴 위로 **왼쪽 눈가의 수술 흉터**가 가로질러 있는 것이 보였다. 3화에서 사유 동기화를 하던 도중 포착했던 그 흉터였다. 괴담의 일부가 되어 사라진 줄 알았던 전임 근무자이자 동료인 한소희의 본래 잔존 인격체 파편이 아직 저 육체 안에 고스란히 남아 있음을 증명하는 유일한 열쇠.
민우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소희의 멱살을 잡아채 안전지대인 포스기 안쪽으로 끌어당겼다.
"살... 살려..."
소희의 입술이 아주 미세하게 떨리며 뚝뚝 끊어지는 목소리를 뱉어냈다. 그녀의 눈동자가 초점을 잃은 채 흔들리고 있었다.
"죽... 기... 싫... 어..."
"닥치고 내 말 들어."
민우의 목소리는 차가웠다. 우정이나 동정 따위의 감정은 배제되어 있었다. 그는 철저한 계산기였다. 이 편의점이라는 도살 기계 본체를 완전히 파괴하기 위해서는, 매장의 시스템 제어 권한을 일부 나누어 가진 소희의 잔존 인격이 반드시 필요했다. 그녀를 구하는 것은 가장 효율적인 '기여 분대'의 구축일 뿐이었다.
"네가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내가 시키는 대로 저 마스터 키의 제어 권한을 유지해.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여기서 같이 고기반죽이 된다."
소희는 두려움에 몸을 떨면서도, 생존을 향한 본능적인 집착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손이 포스기 하단의 검은 열쇠를 움켜쥐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얽히며 비정상적이고 기괴한 형태의 상호 신뢰가 고착되는 순간이었다.
[감히... 감히 내 사육장에서...!]
공허의 절규가 매장 전체를 뒤흔들었다. 계약에 묶여 직접적인 가해를 할 수 없게 된 점장이 폭주하기 시작했다.
*콰르르르릉!*
편의점 바닥 일체의 구조판이 마치 거대한 늪지처럼 진흙빛으로 변하며 아래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진열대가 쓰러지고, 형광등이 깨지며 어둠 속으로 추락했다. 편의점이라는 공간 자체가 스스로를 파괴하여 침입자들을 매장하려는 최종 소멸 파괴 잠금 작동이 개시된 것이었다.
발밑의 타일이 완전히 무너지며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의 아가리가 아가리를 벌렸다. 민우와 소희의 몸이 허공으로 붕괴하는 바닥과 함께 사정없이 내려앉기 시작했다.
추락하는 어둠 속에서 중력은 무자비하게 작동했다. 허공으로 솟구친 잔해들이 서로 부딪치며 *서걱거리는* 파편 비를 뿌렸고, 무너져 내리는 콘크리트 벽면 사이로 *습하고 비린* 지하의 냉기가 뿜어져 나왔다. 민우는 추락하는 와중에도 한 손으로는 소희의 목덜미를 움켜쥐고, 다른 한 손으로는 붉게 점멸하는 포스기 본체를 놓치지 않았다. 바닥이 통째로 뜯겨 나간 매장 밑바닥은 어두컴컴한 식도의 입구처럼 시꺼먼 아가리를 벌리고 있었다. *질척한* 점액질이 벽면을 타고 흘러내리는 소리가 *스스슥* 고막을 스쳤다.
마비된 왼쪽 하반신이 추락의 가속도 때문에 허공에 무력하게 흔들렸다. 관절 마디마디가 삐걱거리는 기괴한 파열음이 귓가를 때렸고, 이대로 떨어지면 전신이 박살 나 즉사할 터였다. 살기 위한 연산 회로가 대뇌 피질 속에서 사납게 회전했다. 그 순간, 포스기 모니터 모서리에 묻어 있던, 정체 모를 전임자의 거무스름한 혈흔이 민우의 손가락 끝에 닿았다. *끈적끈적한* 감촉이 손끝을 타고 올라오는 순간, 민우는 망설임 없이 '잔존 사유 동기화'를 발동시켰다.
"아으으윽!"
머릿속에서 초고압 전선이 터지는 듯한 이염 통증이 몰아쳤다. 뇌세포가 하얗게 타들어 가며 시야가 붉게 물들었고, 이마 위로 *축축한* 식은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다. 잔여 수명이 기어이 마지막 한계선인 '1시간'으로 단축되는 파멸적인 경고음이 이명처럼 울려 퍼졌다. 그와 동시에, 어둠 속에서 꿈틀거리던 괴이한 존재들의 수많은 눈동자가 일제히 민우의 형상을 뚜렷하게 인지하기 시작했다. 그의 존재적 윤곽이 어둠 속에서 스스로 빛을 발하는 먹잇감처럼 선명해진 탓에, 저 먼 심연으로부터 기분 나쁜 웃음소리가 *스스슥* 번져 나갔다.
동기화된 의식 속에서, 낯선 전임자의 마지막 1분이 강제로 주입되었다.
*...사방이 온통 눅눅한 고기 벽이야. 배수관을 타고 흘러내리는 검은 피가 발목까지 축축하게 차올랐어. 저기, 저 어둠 속에 점장의 '영혼 연산로'가 존재해. 주간 매니저 박태식이 들고 다니던 검은 마개 열쇠... 그걸 제어반 왼쪽에 꽂고 오른쪽으로 세 번 돌려야 해. 그렇지 않으면 기계가 가동하면서 지상에 있는 계약자의 소중한 사람부터 영혼을 빨아들여 농축해 버릴 거야. 내 동생... 내 동생의 이름이 저 기계 계판에...*
"하아, 하아!"
눈을 뜨자 눈앞에 다가온 것은 지하 깊은 곳의 단단한 바닥이었다. 민우는 마지막 순간, 소희의 몸을 아래쪽으로 강하게 밀쳐내며 그녀의 육체를 완충재로 삼았다. *퍽!* 하는 둔탁한 파열음과 함께 소희가 짧은 비명을 지르며 바닥의 *질척한* 오물 더미 위로 굴러떨어졌다. 민우 역시 전신을 덮친 충격에 검은 피를 한 움큼 더 토해냈지만, 마비된 왼쪽 다리를 방패 삼아 치명상을 피했다. 부러진 뼈가 살을 뚫고 나올 듯한 극심한 고통 속에서, 입안 가득 고인 *비린* 혈액이 턱밑으로 뚝뚝 흘러내렸다.
그곳은 편의점의 지하 폐기 창고가 아니었다. 거대한 생명체의 위장 내부처럼, 사방의 벽면이 거무죽죽한 육벽으로 뒤덮여 *스스슥* 기괴하게 꿈틀거리고 있었다. 사방에서 흘러나오는 *눅눅하고* 비린내 나는 증기가 시야를 흐렸고, 바닥에 고인 정체불명의 액체는 발목을 붙잡듯 끈적하게 달라붙었다. 저 멀리 어둠 속에서, 거대한 강철 실린더 형태의 기계 장치가 웅웅거리며 작동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것이 바로 점장이 영혼을 농축 수확하기 위해 설계한 '자동 도살 기계'의 심장부였다.
민우는 바닥에 떨어진 스마트폰을 향해 손을 뻗었다. 액정이 기괴하게 일그러진 채, 도화 성심병원 중환자실의 실시간 CCTV 화면을 비추고 있었다. 화면 속 민지의 침대 밑바닥에서부터, 편의점 바닥과 똑같은 거무스름한 육벽의 *축축한* 촉수들이 뻗어 나와 민지의 가냘픈 몸을 고치처럼 감싸 안고 있었다. 그리고 심장부 기계의 붉은 모니터 위로, 기계적인 시스템 안내 문구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계약 이행률 99%. 최종 정산 금액 300,000,000원 대기 중.] [경고: 계약자 강민우의 수명 한계(1시간) 도달 시, 담보 자산 '강민지'의 영혼 농축 수확 프로세스가 즉시 개시됩니다.]
3억 원의 수술비는 처음부터 민우의 목숨뿐만 아니라, 동생 민지의 영혼까지 통째로 저당 잡은 피의 근로계약이었다. 떨리는 손으로 검은 열쇠를 쥔 민우의 등 뒤로, 무너진 천장 잔해 사이에서 다시 한번 점장의 거대한 안개 그림자가 *스르륵* 내려앉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