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락, 사락.
낙조의 붉은 볕이 교실 창틀을 넘어와 시험지 위로 길게 누웠다. 먼지 섞인 공기 사이로 사각거리는 샤프심 소리만이 가득한 방과 후의 고등학교 교실. 한서우는 서술형 평가의 마지막 문제, 유클리드 기하학의 평행선 공준을 증명하는 빈칸을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소년의 손끝에서 벼려진 수식들은 단순한 숫자의 나열이 아니었다. 그것은 공간을 정의하고, 세계를 잘라내어 평면에 고정하는 일종의 정교한 지도였다. 마지막 마침표를 찍으려던 그 찰나였다.
지우개 가루가 흩날리던 책상 모서리가 기괴하게 일그러졌다.
소리도 없었다. 공간의 종이가 반대로 접히듯, 시야가 90도로 꺾였다. 칠판에 적혀 있던 하얀 분필 글씨들이 살아 있는 유충처럼 꿈틀거리며 서우의 눈동자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쿵!
지독한 이명과 함께 등 뒤로 단단하고 차가운 감각이 부딪쳤다. 칠판 지우개의 냄새 대신, 코끝을 찌른 것은 수백 년 동안 묵은 석조 건물의 매캐한 이끼 향과 타오르는 마나의 오존 냄새였다.
"……!"
서우는 반사적으로 상체를 일으켰다. 손바닥에 닿는 것은 매끄러운 나뭇결이 아니었다. 고풍스러운 기하학적 마법진이 음각으로 새겨진, 거대하고 웅장한 대리석 바닥이었다. 고개를 들자 푸른빛을 머금은 거대한 고딕 양식의 돔 천장이 시야를 압도했다. 천장의 높은 스테인드글라스를 투과한 이질적인 자줏빛 석양이 넓은 연무장 전체를 붉게 적시고 있었다.
그리고 그 붉은 빛 속에서, 수십 개의 서늘한 은빛 궤적이 서우의 심장을 향해 짓쳐 들었다.
"움직이지 마라, 침입자!"
쩌렁쩌렁한 고함과 함께 쇠사슬이 부딪치는 마찰음이 사방에서 고막을 때렸다. 은백색의 전신 갑주를 걸친 기사들이 서우를 겹겹이 포위한 채 장검을 겨누고 있었다. 검끝에서 뿜어져 나오는 서슬 퍼런 살기가 뺨을 스쳐 지나갔다. 솜털이 꼿꼿이 일어섰다.
심장이 갈비뼈를 부술 것처럼 요동쳤다. 사기꾼처럼 정체가 들통나면 그 즉시 목이 잘릴 것이라는 공포가 척수를 타고 흘렀다. 고작 열여덟 살의 고등학생이 감당할 수 있는 풍경이 아니었다. 그러나 서우는 본능적으로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위기 상황일수록, 두려움을 감추기 위해 입꼬리를 끌어올리는 오랜 방어기제가 작동했다. 소년의 얼굴에 차갑고 오만한 미소가 서서히 번졌다.
"소환진의 중앙에 정확히 안착했군. 마력의 파동이…… 전혀 느껴지지 않아."
기사들의 뒤편, 무거운 가죽 장막을 걷어내며 한 사내가 걸어 나왔다.
단정하게 뒤로 빗어 넘긴 은발에, 먼지 하나 앉지 않은 검은색 제복을 입은 사내. 그의 가슴팍에는 판게아 황립 룬 아카데미의 최고 감시관을 상징하는 황금색 천칭 문양이 빛나고 있었다. 사내의 이름은 베르톨트. 편집증적인 질서의 수호자이자, 아카데미 내에서 가장 가혹한 심문관으로 알려진 존재였다.
베르톨트의 매서운 안광이 서우의 전신을 훑었다. 기사단이 뿜어내는 압도적인 마나의 장막 속에서도, 이 기묘한 검은 머리의 소년은 털끝 하나 흔들리지 않고 있었다. 아니, 오히려 조롱하는 듯한 미소를 머금은 채 자신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마나가 전혀 감지되지 않는 심연의 육신. 검은 머리칼과 밤하늘을 닮은 눈동자."
베르톨트가 품속에서 오래된 양피지 예언서를 꺼내 들었다. 그의 손가락이 예언서의 한 구절을 쓸어내렸다.
[태초의 마왕이 봉인에서 풀려날 때, 그는 마력의 흐름을 비웃으며, 세상의 어떠한 마나로도 그 존재를 측정할 수 없으리라. 그가 미소를 지을 때 인류의 질서는 모래성처럼 바스러지리니.]
베르톨트의 미간이 깊게 패였다. 예언서의 묘사와 서우의 신체 특징이 소름 끼칠 정도로 완벽하게 정합하고 있었다. 마나가 전혀 감지되지 않는 인간이란 이 세계에 존재할 수 없다. 오직 마력을 초월하여 삼켜버리는 절대적인 무(無)의 존재, 즉 태초의 마왕이 아니라면 설명이 불가능한 현상이었다.
"예언의 그 존재가 맞군."
베르톨트의 목소리에 서리가 내렸다. 그는 주저 없이 가죽 장갑을 낀 손을 들어 올렸다.
"기사단, 즉각 처단하라. 심장을 관통하고 머리를 베어내어, 그 부정한 영혼이 이 아카데미의 흙을 밟지 못하게 하라!"
"하앗!"
지시가 떨어지기 무섭게, 서우의 목과 가슴을 겨누고 있던 다섯 명의 정예 기사들이 동시에 검을 내뻗었다. 검신에 깃든 전청색의 마나가 대기를 찢으며 날카로운 파공음을 내질렀다.
피할 공간은 없었다. 퇴로도 없었다.
'죽는다.'
찰나의 순간, 서우의 뇌리가 차갑게 식어 내렸다. 극도의 위기 상황 속에서, 소년의 천재적인 수학적 두뇌가 폭발적으로 회전하기 시작했다. 이 세계의 마법사들이 마나를 순환시켜 기적을 부린다면, 마나가 전혀 없는 서우에게 존재하는 것은 오직 세상을 구성하는 물리적 법칙과 수식뿐이었다.
'마나가 없다고 해서, 이 공간의 좌표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야.'
서우의 세계가 변했다. 은빛 검날의 궤적, 기사들의 보폭, 연무장 대리석의 격자무늬가 3차원의 입체 좌표계로 분해되어 머릿속에 투사되었다. 유클리드 공간의 3차원 축($x, y, z$)이 소년의 시야 위로 겹쳐졌다.
다가오는 검날들의 속도는 초속 15미터. 궤적은 방사형.
'공간의 곡률을 뒤튼다.'
서우는 리만 기하학의 한 공식을 떠올렸다. 삼차원 공간의 한 점을 극점으로 삼고, 기사들이 찌르는 칼날이 지나가는 좌표의 체적을 강제로 축소한다. 마나가 전무한 서우의 손끝이 허공을 가볍게 퉁겼다. 그것은 마법의 영창이 아닌, 기하학적 증명의 선언이었다.
"증명 개시(Proof Start)."
서우의 뇌세포가 순식간에 과열되며 머릿속에서 날카로운 경고음이 울렸다. 전두엽이 가열된 프레스로 눌리는 듯한 극심한 단기 통증이 엄습했다. 하지만 소년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허공에 대고 손가락으로 정교한 나선형 궤적을 그렸다.
그 순간, 기적을 넘어선 궤변이 연무장 한복판에서 일어났다.
파키킹!
유리가 깨지는 듯한 기괴한 차원의 마찰음이 울려 퍼졌다. 서우의 심장을 향해 짓쳐 들던 은빛 검날들이, 서우의 몸에 닿기 직전 허공의 어느 보이지 않는 경계면에 가로막혔다.
아니, 가로막힌 것이 아니었다.
검날들이 지나가던 삼차원의 물리적 공간 자체가 극도로 얇은 '이차원 평면'으로 압착되고 있었다. 부피를 잃어버린 강철 검들은 입체로서의 강도를 유지하지 못했다. 은빛의 단단한 명검들이, 마치 종이 인형처럼 납작하게 구겨지며 가볍게 바스러져 내렸다.
쨍그랑! 쨍강!
부러진 철편들이 대리석 바닥으로 요란하게 흩어졌다. 기사들은 자신들의 손에 쥐어진, 자루만 남은 무기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마나의 폭발도 없었고, 어떠한 마법적 장벽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공간의 규칙 자체가 그들을 거부하고 무기의 존재 의의를 지워버린 것 같았다.
"이, 이게 무슨……!"
"내 마나가…… 검의 형상과 함께 소멸했다고?"
기사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들어갔다. 그들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지적 공포가 연무장을 지배했다. 화려한 화염이나 번개보다도, 소리 없이 물리 법칙 자체를 새로 써서 검을 부러뜨리는 이 기괴한 현상이 그들에게는 훨씬 더 압도적이고 공포스러운 재앙으로 다가왔다.
"허접하군."
서우는 타들어 가는 뇌의 고통을 억누르며, 낮고 차분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목소리가 떨리지 않도록 성대를 극도로 통제했다.
실제로는 전두엽이 찌르는 듯이 아파 당장이라도 머리를 감싸 쥐고 뒹굴고 싶었지만, 겉으로는 그저 미천한 인간들의 공격을 비웃는 절대자의 여유로운 미소를 유지했다.
"삼차원의 축조차 제대로 고정하지 못하는 철붙이로, 누구의 심장을 꿰뚫겠다는 건가."
그 오만한 일갈에 기사들은 주춤하며 뒤로 물러섰다. 베르톨트 역시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며 주먹을 꽉 쥐었다. 마나를 전혀 쓰지 않고 공간의 위상을 비틀어 검을 파괴했다. 이것은 마법의 영역이 아니었다. 세계의 인과율을 손가락 하나로 주무르는 신성 모독적인 권능, 예언 속 마왕의 힘이 틀림없었다.
우욱.
그때, 서우의 목구멍으로 뜨거운 액체가 역류했다. 고차원 연산의 대가였다. 뇌세포의 과부하로 인해 모세혈관이 터진 것이었다.
서우는 붉은 피를 입 밖으로 흘려보내면서도, 그것이 마치 대수롭지 않은 유희인 양 입꼬리를 올린 채 가볍게 침을 뱉듯 바닥에 흘렸다.
툭, 투둑.
서우의 입가에서 떨어진 붉은 핏방울이 연무장의 오래된 대리석 바닥, 그중에서도 고대 룬 문자가 새겨진 푸른 룬석 위로 떨어졌다.
그 순간, 기이한 반응이 일어났다.
본래 순수한 마나에만 반응하여 푸른 빛을 발해야 할 고대의 룬석이, 서우의 마나 제로(0) 상태의 피가 닿자마자 기분 나쁜 침묵 속에 붉은빛으로 변색되기 시작했다. 피가 스며든 자리부터 서서히, 마치 독액에 오염되듯 룬석의 푸른빛이 자줏빛을 거쳐 핏빛으로 물들어 갔다.
연무장 밑바닥에 흐르는 대지의 마나 흐름 자체가 서우의 혈액에 의해 강제로 왜곡되고 있는 것이었다.
베르톨트의 편집증적인 눈이 그 광경을 놓칠 리 없었다. 그의 눈동자가 격렬하게 흔들렸다.
'룬석을 오염시키는 피라니. 대지의 축복마저 거부하는 진정한 심연의 군주……!'
그것은 단순한 침입자가 아니었다. 이 아카데미의 존립, 나아가 제국 전체를 하룻밤 사이에 잿더미로 만들 수 있는 재앙의 씨앗이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이 괴물의 숨통을 끊지 못한다면, 인류에게 미래는 없었다.
스으윽.
베르톨트가 천천히 허리춤으로 손을 가져갔다. 그의 손끝이 감시관의 전유물인, 검은 마노가 박힌 거대한 대검의 손잡이에 닿았다.
연무장의 공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기사들이 숨을 죽였다. 베르톨트가 직접 검을 뽑는다는 것은, 상대가 제국의 존망을 흔들 정도의 대역죄인이거나 괴물이라는 뜻이었다.
서우의 등 뒤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뇌의 연산 한계는 이미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머릿속이 징징 울리며 단기 기억이 흐려지려 하고 있었다. 여기서 한 번 더 고차원 연산을 시도했다간, 정말로 뇌가 타버려 백치가 되거나 사망할 터였다.
'제발, 여기서 멈춰라. 더는 오지 마.'
속으로는 피눈물을 흘리며 비명을 지르고 있었지만, 서우의 눈동자는 여전히 얼음처럼 차갑고 고요했다. 그는 바닥에 떨어진 자신의 피를 구두 굽으로 가볍게 뭉개며, 베르톨트를 똑바로 응시했다.
"더 해볼 텐가?"
도발이었다. 죽음을 앞둔 인간의 허세가 아닌, 언제든 세상을 멸망시킬 준비가 되어 있는 존재의 자비로운 제안처럼 들리는 목소리였다.
베르톨트의 이마에 굵은 식은땀 한 줄기가 흘러내렸다. 사내의 심장이 기분 나쁜 경종을 울려댔다. 하지만 그의 광적인 질서주의는 공포보다 한 발 앞서 있었다.
서걱!
대기를 가르는 서슬 퍼런 소리와 함께, 베르톨트의 대검이 발도되었다.
눈 깜짝할 새였다. 은빛 장막을 찢고 나타난 차가운 강철의 감각이 서우의 목덜미, 그 얇은 피부 바로 위에 딱딱하게 밀착되었다. 검날에서 뿜어져 나오는 서늘한 기운에 서우의 목덜미에 소름이 돋았다. 아주 미세한 움직임만으로도 목줄기가 끊어질 듯한 일촉즉발의 거리.
베르톨트는 검을 쥔 손을 미세하게 떨며, 붉게 충혈된 눈으로 서우를 노려보았다.
"연극은 끝이다, 마왕."
낮게 가라앉은 베르톨트의 음성이 서우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그 목의 가죽을 찢고, 네놈의 머리통을 열어 그 부정한 뇌 속에 어떤 음모가 들어찬 것인지 직접 확인해주마. 지금 당장, 네놈의 진짜 정체를 밝혀라."
목을 조여오는 검날의 감각 속에서, 서우는 심장이 멎을 듯한 공포를 느끼며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살기 등등한 검날 끝에서, 소년의 검은 눈동자가 이채롭게 빛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