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태성아, 수고했다. 다음 우림 경기장 결승전은 네 축구 인생 모태가 될 거다!"

경기가 끝난 뒤, 최근식 감독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기자들을 대동하고 태성의 앞을 가로막았다.

카메라 플래시가 사방에서 터져 눈이 시렸다. 사방을 가득 채운 기자들의 마이크가 태성의 턱밑까지 들이밀어졌다. 최근식은 태성의 어깨를 으스러져라 움켜쥐며 카메라를 향해 가식적인 미소를 지어 보였다. 태성의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제자의 영광을 축하하는 척하면서도, 최근식의 손가락 끝은 태성의 어깨뼈를 사정없이 파고들고 있었다. 도망치지 말라는 경고이자, 철저한 압박이었다.

"감독님 덕분입니다."

태성은 짧게 내뱉고는 어깨를 틀어 최근식의 손아귀에서 벗어났다. 카메라 불빛 너머로 보이는 최근식의 눈빛에는 독기가 서려 있었다.

기자들이 물러간 뒤, 태성이 안내받은 곳은 운동장 지하에 위치한 어두운 미팅룸이었다.

웅웅거리는 노후한 에어컨 소리만이 방 안의 무거운 침묵을 깨우고 있었다. 방 한가운데 놓인 길쭉한 유리 테이블 위에는 이미 몇 장의 서류가 올려져 있었다. 테이블 상석에는 최근식 감독이 팔짱을 낀 채 앉아 있었고, 그 좌우로는 말끔한 정장 차림의 사내 둘이 버티고 서 있었다. 국내 굴지의 대기업 구단 스카우터 간부들이었다.

최근식이 턱짓으로 맞은편 의자를 가리켰다.

"앉아라."

태성은 말없이 의자를 끌어당겨 앉았다. 가죽 의자가 삐걱거리는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스카우터 중 머리가 희끗한 사내가 품에서 만년필을 꺼내 서류 위에 툭 올려놓았다. 서류 맨 위에는 '우선 협상권 및 프로 입단 가계약서'라는 굵은 글씨가 박혀 있었다.

"강태성 군. 청룡고의 에이스로서 활약이 대단하더군."

사내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으나 눈빛은 사냥감을 노리는 맹수처럼 번뜩였다.

"우리 구단은 자네의 가능성을 높이 평가하고 있네.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바로 성인 무대에 데뷔할 수 있는 파격적인 조건이지. 최근식 감독님과도 이미 이야기가 끝난 사안이네. 여기 서명만 하면 자네 미래는 보장되는 거야."

최근식이 거들었다.

"태성아, 대기업 구단이다. 고등학생 신분으로 이런 제안을 받는 건 하늘의 별 따기야. 쓸데없는 고집 부리지 말고 사인해라. 내가 다 너 잘되라고 판 깔아준 거니까."

태성은 서류로 시선을 내렸다.

상세 조항들이 눈에 들어왔다. 계약 기간 5년에 연봉은 신인 최저 수준. 게다가 '구단 및 감독의 지시에 따른 의무 출전 조항'이 독소 조항으로 빽빽하게 박혀 있었다. 선수의 몸 상태나 무릎 부상 여부와 상관없이, 구단이 원하면 언제든 경기에 나서야 한다는 노예계약이나 다름없었다. 최근식이 스카우터들에게 뒷돈을 받고 자신을 통째로 팔아넘기려는 속셈이 훤히 보였다.

"사인해라. 시간 없다."

최근식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사내들은 팔짱을 낀 채 태성을 내려다보며 사방에서 숨 막히는 압박감을 조성했다. 고작 열여덟 살짜리 고등학생이라면 이 위압감에 눌려 눈물을 흘리며 펜을 잡았을 터였다.

하지만 태성의 영혼은 이미 산전수전을 다 겪은 프로의 그것이었다.

태성은 펜바라기처럼 올려진 만년필을 가만히 바라볼 뿐, 손을 뻗지 않았다.

정적.

방 안의 모든 공기가 얼어붙은 듯 굳어졌다. 벽에 걸린 낡은 벽시계의 초침 소리만이 째깍, 째깍 방 안을 울렸다.

"태성아. 내 말이 안 들리냐?"

최근식의 미간이 좁아졌다.

태성은 대답하지 않았다. 변명도, 분노도 표출하지 않은 채 오직 싸늘한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저 고개를 들어 최근식의 눈을 똑바로 응시할 뿐이었다. 짙은 어둠이 깔린 태성의 눈동자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오히려 상대를 꿰뚫어 보는 듯한 기괴한 침착함이 서려 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초조해지는 쪽은 최근식이었다. 열여덟 살짜리 꼬맹이에게서 느껴지는 압도적인 위압감에 숨이 턱 막힌 까닭이다. 최근식의 이마에 굵은 힘줄이 툭 불거졌다. 쥐고 있던 만년필을 부러뜨릴 듯 움켜쥔 손끝이 하얗게 질려 들어갔다.

'이 새끼가 감히 나를 똑바로 쳐다봐?'

최근식의 눈꺼풀이 미세하게 떨렸다. 스카우터들 역시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침묵이 칼날이 되어 그들의 목을 겨누고 있었다.

그 침묵 속에서 태성은 조용히 자신의 시야 한편에 떠 있는 상태창을 띄웠다.

[위잉―] [무릎 내구도 장부 (Knee Durability Ledger)] - 현재 내구도: 55%

[특수 정산 이력] - 직전 경기 '기하학적 컷백 어시스트' 성공 (상대 수비 충돌 직전 발동) - 위험도 가중치 배율: 3.0배 적용 (기본 충전량 5% × 3 = 15% 충전 완료) - 효과: 무릎 관절부 미세 손상 복구 및 윤활액 강제 분비.

태성의 입꼬리가 보이지 않게 미세하게 호선을 그렸다.

단순한 패스보다 상대의 물리적 충돌 직전 시도하는 극비의 기하학적 컷백이 수명 충전 배율을 무려 3배로 증가시킨다는 독특한 이자를 마침내 공식적으로 확인한 순간이었다. 이것이 그가 이 수렁 같은 학원 축구에서 살아남아 EPL로 가기 위한 절대적인 열쇠였다. 무릎 내구도 55%. 아직 갈 길이 멀었지만, 살아남을 구멍은 확실하게 뚫렸다.

"야, 강태성!"

결국 조바심을 참지 못한 최근식이 테이블을 탁 치며 몸을 일으켰다. 그의 입에서 험한 폭언이 터져 나오기 직전이었다.

"어른이 말하면 대답을 해야 할 거 아냐! 머리 피도 안 마른 놈이 어디서 눈을 그따위로 뜨고……!"

그 순간, 태성이 가볍게 오른손을 뻗었다.

그리고 테이블 정중앙, 서류 옆에 놓여 있던 자신의 스마트폰을 톡톡 두드렸다. 화면이 켜지며 붉은색 녹음 표시가 선명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00:14:32 - 녹음 중]

최근식의 말이 딱 멈췄다. 그의 입이 어정쩡하게 벌어진 채 굳어버렸다.

"이, 이게 무슨……."

스카우터들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핏기가 가셨다. 사색이 된 그들이 황급히 의자를 뒤로 밀며 일어섰다.

태성이 나직하고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대한축구협회 공정위원회 규정 제18조 기밀 유지 의무. 그리고 표준 계약서 작성 지침 제5조. '본 계약 체결 전 협상 단계의 어떠한 정보도 제3자에게 누설할 수 없으며, 미성년 선수를 상대로 한 강압적 환경 조성을 금한다.' 어기면 어떻게 되는지 잘 아시지 않습니까?"

태성의 손가락이 녹음 화면 위를 부드럽게 쓸었다.

"감독님께서 저를 방으로 불러 대기업 구단과의 가계약 서명을 강요하시며 폭언을 하신 이 녹음본. 이게 협회 공정위원회와 언론사에 넘어가면 어떻게 될까요? 특히 대기업 구단 이미지에 아주 큰 타격이 갈 텐데요."

"너, 너 이 새끼……!"

스카우터 한 명이 이빨을 갈며 태성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하지만 그의 눈동자는 이미 극심한 공포로 흔들리고 있었다. 고등학생 녀석이 이런 법적 조항과 규정을 꿰뚫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정식 에이전트 동행 없는 미성년자와의 독점 계약 시도는 원천 무효입니다. 게다가 이 강압적인 분위기까지 증명된다면, 두 분은 물론이고 감독님 역시 지도자 자격 정지 처분을 피하기 어려우실 겁니다."

태성의 어조는 담담했기에 오히려 잔혹하리만큼 강력한 설득력을 지녔다.

"돌아가십시오. 결승전이 끝나기 전까지 제 몸값을 헐값에 넘길 생각은 버리시는 게 좋을 겁니다."

스카우터들은 더 이상 머무를 이유를 찾지 못했다. 그들은 쫓기듯 서류 가방을 챙겨 미팅룸을 빠져나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거칠게 울렸다.

홀로 남은 최근식은 부들부들 떨며 태성을 노려보았다. 당장이라도 주먹을 휘두를 기세였지만, 태성의 스마트폰에서 돌아가는 녹음기 표시가 그의 팔을 묶어놓고 있었다.

"너…… 후회하게 될 거다. 내 밑에서 축구 계속할 수 있을 것 같아?"

"결승전 우승컵이 필요하신 건 감독님 아니십니까?"

태성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차갑게 쏘아붙였다.

"제가 쓰러지면 감독님 자리가 먼저 날아갈 겁니다. 절 혹사시키고 싶으시다면, 최소한 제가 뛸 수 있는 무대는 만들어 놓으셔야죠."

최근식을 뒤로한 채, 태성은 미팅룸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복도 모퉁이에는 안절부절못하며 서성이고 있던 한정훈 수석코치가 서 있었다. 한 코치는 태성이 무사히 나오는 것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다가왔다.

"태성아! 괜찮냐?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별일 없었습니다, 코치님."

태성은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한 코치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에는 흔들림 없는 확신이 서려 있었다.

"코치님. 다음 결승전이 열리는 우림 경기장 잔디 상태를 확인하셔야 합니다. 배수 대책이 전혀 안 되어 있는 구장입니다. 비가 오면 진흙탕이 될 게 뻔합니다. 수중전 대비 스터드와 잔디 다짐 대책을 지금부터 수립해 주십시오."

"어? 우림 경기장? 갑자기 그건 왜……."

"결승전 날, 반드시 비가 올 겁니다."

태성의 단호한 예언에 한 코치는 멍하니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태성의 주위로 풍기는 묘한 압도감이 그를 지배하고 있었다.

"알았다. 내가 장비 담당이랑 상의해서 단단히 준비해 두마."

"부탁드립니다."

태성은 한 코치를 지나쳐 락커룸으로 향했다.

그의 시선이 창밖의 흐릿한 하늘로 향했다. 무릎에서 느껴지는 미세한 트라우마의 환상통이 벌써부터 욱신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태성은 피할 생각이 없었다. 오히려 그 지옥 같은 빗속에서, 자신을 쾡한 눈으로 바라볼 박만수와 최근식의 음모를 완전히 박살 내버릴 작정이었다.

그리고 시간은 빠르게 흘러, 마침내 결전의 날이 밝았다.

쿵―!

결전의 날 아침, 우림 경기장의 철문이 열리는 육중한 소리와 함께 하늘에서 시커먼 먹구름이 소용돌이치며 사나운 장댓비가 잔디 위로 쏟아지기 시작했다!

투두둑, 투두두둑!

대지를 찢을 듯한 기세로 떨어지는 빗줄기가 경기장 스탠드의 천막을 사정없이 두들겼다. 배수구가 막힌 그라운드는 이미 발목까지 찰랑이는 거대한 늪으로 변해 있었다. 진흙과 잔디가 뒤엉킨 비린내가 코끝을 찔렀다.

태성이 한 걸음, 발을 내딛는 순간 오른쪽 무릎 깊숙한 곳에서부터 벼락 같은 통증이 뻗어 올라왔다.

아드득.

어금니가 맞물리며 깨지는 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과거, 바로 이 경기장에서 무릎 뼈가 산산조각 나며 들렸던 그 끔찍한 파열음이 환청이 되어 뇌리를 헤집는다. 온몸의 털끝이 쭈뼛 서는 극심한 트라우마의 환상통.

[위잉―!] [특수 디버프: '트라우마 필드' 효과 극대화!] [경고: 추위와 습기로 인해 무릎 내구도 자연 감쇄 속도가 2배로 증가합니다.] [현재 내구도: 55% -> 52%]

눈앞에 붉은색 경고창이 어지럽게 명멸했다.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수명이 깎여 나가는 지옥 같은 전장. 태성은 덜덜 떨리는 오른발 끝에 억지로 힘을 주어 진흙바닥을 짓눌렀다.

"춥다, 추워……! 태성아, 진짜 이 빗속에서 게임을 뛰라고? 공이 굴러가기는 하겠냐?"

옆에서 유진우가 어깨를 잔뜩 웅크린 채 덜덜 떨고 있었다. 평소의 게으른 천재답게 벌써부터 경기를 포기하고 싶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태성이 차가운 눈빛으로 진우를 돌아보았다.

그 순간, 태성의 시야에 기묘한 빛이 들어왔다. 비바람이 몰아치는 와중에도, 진우의 머리 위로 흐릿한 청색 아이콘 하나가 주기적으로 점멸하고 있었다.

[A급 수용체 레이더 (호응도 45% - 점멸 중)]

진우의 게으른 플레이 스타일 속에 숨겨진 폭발적인 오프더볼 침투력. 오직 태성의 패스 상태창에만 감지되는 그 정밀한 레이더가 빗속에서도 푸른 안개처럼 빛을 발하고 있었다.

태성이 진우의 젖은 덜미를 거칠게 움켜잡았다.

"진우야."

"어, 어? 왜, 왜 그래? 눈빛 무섭게……."

"오늘 내 패스는 눈으로 보고 받을 생각 하지 마라."

태성의 목소리가 빗소리를 뚫고 진우의 귓전에 꽂혔다.

"몸이 먼저 반응해야 살 거다. 네가 서 있어야 할 자리는 내 발끝이 결정하니까, 넌 그냥 뒤도 돌아보지 말고 뛰어."

"야, 야! 앞도 안 보이는데 어떻게 뛰냐고!"

진우가 비명을 질렀지만, 태성은 대답 대신 녀석을 밀치고 그라운드 중앙으로 걸어 나갔다.

저 멀리 대진고의 선수단이 입장하고 있었다. 맨 앞줄, 거구의 수비수 박만수가 스파이크 스터드를 바닥에 드르륵 긁으며 걸어왔다. 그의 사나운 눈빛이 태성의 무릎으로 향했다. 이미 경기 전부터 태성의 다리를 부러뜨리겠다고 공언하고 다녔던 녀석이다.

동시에 태성의 상태창에 붉은색 가이드라인이 그어졌다.

[위험: 상대 플레이어 '박만수'의 치명적 파열 궤적 감지!] [예상 태클 진입 각도: 15도 내외 (무릎 측면 강타 확률 80%)]

박만수가 어깨를 으쓱이며 비열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강태성. 오늘 몸조심해라? 빗길이라 미끄러워서 발이 깊게 들어갈지도 모르거든."

그 뒤편, 가림막이 쳐진 벤치 밑에서 최근식 감독이 팔짱을 낀 채 이쪽을 지켜보는 모습이 보였다. 그의 입가에는 비열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계약서 협박 사건으로 앙심을 품은 그는 이미 대진고 측에 묵시적인 합의를 건넸을 터였다. 태성이 부상으로 쓰러지든 말든, 오늘 이 경기에서 몸뚱이를 완전히 갈아 넣게 만들겠다는 추악한 탐욕이 빗방울 사이로 비쳤다.

사방이 적이었다.

트라우마를 자극하는 하늘의 폭우, 무릎을 노리는 라이벌의 살인 태클, 그리고 자신을 소모품으로 버리려는 감독의 음모까지.

삐이이이―!

주심의 날카로운 휘슬 소리가 폭우가 쏟아지는 우림 경기장의 상공을 가르며 울려 퍼졌다.

대진고의 선축으로 시작된 전반전. 공이 뒤로 흐르는가 싶던 찰나, 박만수가 미친개처럼 진흙탕을 박차고 태성을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그의 스파이크 스터드가 정면으로 빛을 받으며 번뜩였다.

볼의 흐름과는 전혀 무관한, 오직 태성의 오른쪽 무릎만을 정밀하게 겨냥한 슬라이딩 태클의 궤적.

[경고! 극도로 위험한 물리적 충돌 경로 진입!] [충돌까지 남은 시간: 1.5초!] [피해 예상치: 무릎 내구도 40% 즉시 감소 및 십자인대 파열!]

붉은색 경고등이 태성의 시야를 피처럼 붉게 물들였다. 피할 것인가, 맞설 것인가. 사방을 가득 메운 관중들의 비명 같은 함성 속에서 박만수의 진흙투성이 몸뚱이가 태성의 다리를 향해 맹렬하게 미끄러져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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