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폭우 속에서 치러진 연습 경기는 지옥 그 자체였다. 거센 빗줄기가 그라운드를 뻘밭으로 만들고, 귓가에는 과거 무릎이 박살 나던 그날의 파열음이 환청으로 휘몰아치던 순간. 태성은 기어이 상태창의 기하학적 선들을 쥐어짜 유진우의 발끝에 골을 배달했다.
경기가 청룡고의 승리로 끝난 직후, 벤치에서 흘러나오는 공기는 승리의 열기와는 전혀 다른 이질적인 썩은 내를 풍기고 있었다.
최근식 감독은 빗물에 젖은 얼굴을 닦아내지도 않은 채, 벤치 구석에서 탐욕스러운 눈빛으로 입가심을 하고 있었다. 그의 시선은 오롯이 태성의 무릎에 고정되어 있었다. 최근식의 손가락이 쥐고 있던 수첩 위를 거칠게 내달렸다.
[강태성 - 예선부터 결승까지 전 경기 풀타임 강제 기용. 계약금 극대화 대상.]
누런 이빨을 드러내며 씩 웃는 그 야만적인 미소와 펜촉이 종이를 찢을 듯이 짓누르던 그 기괴한 감촉을, 태성은 흔들리는 빗속에서도 똑똑히 포착했다. 자신을 갈아 넣어 사학 재단의 배를 채우고, 제 주머니에 두둑한 뒷돈을 쑤셔 넣겠다는 비열한 어른의 설계.
태성은 차갑게 굳어가는 안면 근육을 억누르며 축구화 스터드로 진흙을 짓밟았다.
***
다음 날 아침, 청룡고등학교 체육관 뒤편의 보조 훈련장.
밤새 비가 그쳤음에도 불구하고 공기는 여전히 눅눅하고 끈적했다. 이른 아침의 서늘한 안개가 잔디 위에 낮게 깔려 있었다. 태성은 왼쪽 무릎을 가볍게 굽혔다 폈다 하며 관절의 소리에 집중한다.
‘뻐근하다.’
회귀한 신체라 해도 과거의 트라우마가 새겨진 뇌는 여전히 미세한 환상통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태성이 천천히 숨을 내쉬며 허공을 응시하자, 반투명한 푸른빛의 상태창이 눈앞에 스르륵 펼쳐진다.
어제 경기 직후 정신이 없어 제대로 확인하지 못했던 보상 내역이 그제야 선명한 활자로 정산되기 시작한다.
띠링!
[경고: 극심한 환경적 요인(폭우) 및 트라우마 자극으로 인해 무릎 내구도가 일시적으로 위험 선에 도달했었습니다.] [시스템 정산 완료: 특수 상황에서의 어시스트 성공 보너스 적용.]
태성의 눈동자가 빠르게 굴러갔다. 눈앞에 떠오른 수치들이 그의 심장을 거세게 뛰게 만든다.
---------------------------------- [무릎 내구도 상태 장부] - 현재 내구도: 52% (▲ 17% 상승!) - 최근 획득 보너스: '사선(死線)의 컷백 어시스트' 성공 (기본 충전 5% × 충돌 직전 회피 배율 3배 = 15% 추가 획득!) - 일일 기본 회복 및 승리 보너스: +2% ----------------------------------
"3배……."
태성의 입꼬리가 소리 없이 올라간다.
단순히 안전한 공간에서 찔러주는 패스보다, 상대 수비수의 파괴적인 물리적 충돌이 발생하기 직전 극비의 기하학적 궤적으로 꺾어 들어가는 '컷백 어시스트'가 내구도 충전 배율을 무려 3배나 폭등시킨다는 장부의 규칙.
과거의 부상 공포에 짓눌려 수비수를 피하기만 했다면 절대로 알아내지 못했을 생존 공식이었다. 사선을 넘나드는 플레이야말로 이 망가진 무릎을 가장 빠르게 살려낼 수 있는 열쇠라는 역설.
태성은 자신의 오른쪽 허벅지를 강하게 움켜잡았다. 터질 듯한 근육의 긴장감이 손가락 끝을 타고 고스란히 전해진다.
"강태성! 멍하니 서 있지 말고 이쪽으로 와서 집합해!"
훈련장 한가운데서 째지는 듯한 고함이 울려 퍼진다. 최근식 감독이었다.
체육복 지퍼를 목 끝까지 채워 올린 최근식은 거만한 자세로 뒷짐을 진 채 선수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곁에는 초조한 표정의 한정훈 수석코치가 한 발짝 뒤처져 서 있었다.
태성이 천천히 걸어가 대열의 끝에 합류하자, 최근식의 뱀 같은 눈길이 곧바로 그에게 꽂힌다. 어제 벤치에서 보여주었던 그 탐욕스러운 시선 그대로였다.
"다들 주목해라. 다음 주부터 시작되는 전국대회 지역 예선 일정이 확정됐다."
최근식이 붉은색 결승판이 그려진 스케줄러를 흔들며 목청을 높였다.
"이번 대회는 우리 학교 재단에서도 아주 깊은 관심을 두고 있다. 특히 스카우터들이 대거 몰릴 예정이야. 그래서 전술의 핵심을 새로 짠다."
최근식이 슬금슬금 태성에게 다가왔다. 그의 몸에서 풍기는 퀴퀴한 담배 찌든 내가 바람을 타고 코끝을 찔렀다. 최근식은 태성의 어깨를 툭툭 치며, 겉으로는 격려하는 척하지만 뼈가 저릴 정도의 강한 악력으로 어깨뼈를 움켜쥐었다.
"강태성. 어제 보니까 폼이 아주 많이 올라왔더구나. 유진우 놈한테 찔러주는 패스도 제법 쓸 만하고 말이야. 그래서 이번 대회 모든 경기는 네가 중심이다."
태성은 대답 없이 최근식의 눈을 쳐다보았다. 최근식의 입술이 비열하게 뒤틀린다.
"예선 첫 경기부터 결승전까지, 너는 교체 없이 무조건 90분 풀타임이다. 알겠냐? 네가 경기 조율하고, 킬패스 찌르고, 경기 템포 다 지배해라. 벤치로 들어올 생각은 꿈도 꾸지 마."
"……."
"왜, 자신 없어? 청룡고 에이스라면 이 정도 혹사는 당연히 버텨내야지. 안 그래?"
주변에 서 있던 동료 선수들의 시선이 태성에게 쏠렸다. 유진우는 구석에서 안절부절못하며 태성의 무릎을 훔쳐보았고, 박만수는 팔짱을 낀 채 입길을 비틀며 비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거부할 수 없는 고압적인 환경. 고교 축구부라는 폐쇄적인 생태계에서 감독의 지시는 곧 법이자 생사여탈권이었다. 여기서 대들거나 거부하면 대학 진학은 물론이고 선수 생명 자체가 카르텔의 가위질에 잘려 나가게 된다. 최근식은 그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었기에, 대놓고 태성을 소모품처럼 부려 먹으려 드는 것이다.
태성은 내색하지 않고 고개를 까딱였다.
"알겠습니다, 감독님. 지시대로 뛰겠습니다."
"좋아, 역시 우리 에이스야. 훈련 시작해!"
최근식이 만족스러운 듯 껄껄 웃으며 돌아섰다. 하지만 태성의 머릿속 상태창은 이미 붉은색 경고등을 깜빡이며 실시간 시뮬레이션을 돌리고 있었다.
[분석: 90분 풀타임 연속 출전 시 예선 기간 내 예상 무릎 내구도 소모율 약 45%~50%] [위험: 경기 도중 급제동 및 방향 전환 횟수 증가 시 내구도 고갈로 인한 영구적 파열 위험 발생.]
'나를 완전히 갈아 마실 작정이군.'
태성은 차가운 침묵 속에서 어금니를 사려 물었다. 최근식의 머릿속 장기판 위에 자신이 얹혀 있다고 착각하게 놔둘 생각은 없다. 판을 흔드는 건 결국 말(馬)이 아니라 기사(騎士)니까.
***
오후 훈련이 끝나고 사위가 어둑어둑해질 무렵.
운동장 옆에 위치한 낡은 벽돌 건물 2층의 감독실. 태성은 훈련 일지를 제출하라는 한정훈 코치의 심부름을 빌미로 감독실 문 앞에 섰다. 노크하려던 태성의 손끝이 허공에서 멈췄다.
안에서 거친 대화 소리가 새어나오고 있었다.
"감독님, 이건 정말 힘듭니다! 태성이 무릎 상태를 아시지 않습니까? 어제 경기 후반에도 미세하게 절뚝이는 게 제 눈에 보였습니다. 그런 애를 어떻게 전 경기 90분 풀타임을 돌립니까? 이건 선수를 죽이겠다는 소리입니다!"
한정훈 코치의 절박한 목소리였다. 평소 순하고 우유부단하던 그가 이 정도로 목소리를 높이는 것은 극히 드문 일이었다.
뒤이어 들려오는 최근식의 목소리는 얼음장처럼 차갑고 잔인했다.
"한 코치, 네가 아직 배가 덜 불렀구나? 지금 재단 이사장님이 이번 대회 우승에 얼마를 걸었는지 알아? 대기업 후원금 들어오는 순간 내 자리도, 네 자리도 다 보장되는 거야. 강태성이 무릎이 깨지든 인대가 날아가든, 우승컵만 따오면 그만이야. 고교 졸업하고 망가지든 말든 우리가 무슨 상관인데?"
"감독님!"
"시끄러워! 한 번만 더 내 전술에 토 달면, 다음 달 재계약 서류에 네 이름은 없을 줄 알아. 당장 나가!"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발소리가 문 쪽으로 다가왔다.
태성은 재 빠르게 복도 옆 캐비닛 뒤편의 어스름한 그림자 속으로 몸을 숨겼다. 문이 열리며 한정훈 코치가 붉어진 얼굴로 걸어 나왔다. 그의 눈빛에는 분노와 함께 깊은 슬픔, 그리고 제자를 지켜주지 못했다는 자책감의 영혼이 깃들어 있었다.
태성은 캐비닛 틈새로 그 모습을 지켜보며 생각했다.
'한정훈 코치…… 이 사람은 진짜구나.'
더러운 학원 축구의 카르텔 속에서 유일하게 선수의 몸을 걱정해 주는 어른. 태성의 가슴속에 차갑게 얼어붙어 있던 인간불신의 장벽에 미세한 균열이 생기는 순간이었다. 진정한 조력자의 자질을 가진 사람을 마침내 찾아낸 것이다.
숨을 죽이고 기다리자, 이번에는 최근식이 통화를 하며 감독실 밖으로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아, 예, 이사님! 걱정 마십시오. 강태성 그 새끼, 제가 꽉 잡고 돌릴 테니까요. 예, 계약서대로 진행하시죠. 하하하!"
최근식의 발소리가 계단 아래로 완전히 사라진 것을 확인한 태성은 소리 없이 감독실 문을 열고 안으로 잠입했다.
어스름한 저녁 빛만 겨우 들어오는 어두운 감독실 내부. 퀴퀴한 종이 냄새와 먼지 냄새가 섞여 있었다. 태성은 주저 없이 최근식의 책상 뒤편, 반쯤 열려 있는 서랍 캐비닛으로 다가갔다.
회귀 전의 기억이 머릿속에서 경고음을 울렸다. 최근식은 항상 중요한 비밀 서류를 서랍 가장 깊숙한 틈새에 숨겨두는 버릇이 있었다.
태성이 손가락을 밀어 넣어 서랍 아래쪽의 이중 바닥 틈새를 더듬었다. 손끝에 거친 플라스틱 파일의 촉감이 걸렸다. 조심스럽게 꺼내 든 서류철의 표지에는 검은색 마커로 굵게 적혀 있었다.
[청룡고 축구부 중장기 발전 기획서 및 외부 이적 합의서]
서류철을 펼치자, 어둠 속에서도 상태창의 푸른 안광 덕분에 글자들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 [비밀 합의서 요약] - 대상자: 청룡고등학교 강태성 - 내용: 대기업 사학재단 지정 구단으로의 우선 협상권 부여 및 이적료의 40%를 최근식 감독 개인 수수료(뒷돈)로 배분. - 조건: 고교 전승 우승 및 대회 MVP 수상 (이를 위해 전 경기 의무 출전 및 혹사 계획 승인) ----------------------------------
태성의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자신의 미래를, 자신의 무릎을 단돈 몇 억에 팔아넘기기로 약속한 비밀 보장각서였다. 자신의 가혹한 선수 기용 혹사 계획 장부까지 완벽하게 도표로 정리되어 있었다.
"나를 소모품으로 쓰시겠다……."
태성은 스마트폰을 꺼내 한 페이지도 빠짐없이 무음으로 촬영하기 시작했다. 셔터가 눌릴 때마다 화면에 담기는 비리의 증거들이 그의 손안에 강력한 무기로 쥐어졌다.
회귀 전에는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뛰다가 무릎이 박살 나 버려진 소모품에 불과했지만, 지금은 달랐다. 상태창의 수식 데이터와 회귀자의 지혜로 무장한 태성에게, 최근식의 이 얄팍한 음모는 장기판 위에 빤히 들여다보이는 악수(惡手)에 불과했다.
"이 서류가 네 무덤이 될 거다, 최근식."
태성은 서류철을 원래 있던 서랍 틈새에 완벽하게 되돌려놓고 소리 없이 감독실을 빠져나왔다.
***
기숙사 방으로 돌아온 태성은 책상에 앉아 다음 전장의 일정표를 띄웠다.
화면에 떠오른 단어는 태성의 심장을 차갑게 얼어붙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전국대회 8강 및 준결승 일정 - 우림 경기장]
우림 경기장.
과거 태성이 빗속에서 상대 수비수의 거친 태클에 무릎 십자인대가 완전히 가루가 되어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던 바로 그 비극의 성지였다. 배수가 제대로 되지 않아 비만 오면 진흙탕으로 변해 유망주들의 무덤이라 불리는 천연 잔디 구장.
태성이 우림 경기장의 날씨 탭을 클릭하자, 상태창이 실시간 기상 예보 시스템과 연동되며 붉게 깜빡이기 시작했다.
[경고: 우림 경기장 일정 중 '비 예보' 감지됨.] [트라우마 필드 동기화 진행 중…… 무릎 내구도 추가 감쇄 위험도 80%]
"결국 여기서 붙는군."
태성은 주먹을 꽉 쥐었다. 피할 수 없는 전장이라면, 정면으로 돌파해 부숴버리는 수밖에 없다. 자신의 무릎 혹사 수치를 철저히 계산하고, 최근식의 압박을 역이용해 무릎 내구도를 최대로 충전할 수 있는 기하학적 컷백의 기회를 의도적으로 설계해야 한다.
그때, 책상 위에 놓여 있던 스마트폰이 징― 하고 날카로운 진동음을 울렸다.
태성이 화면을 터치하자, 축구계의 은밀한 소식통이자 회귀 전부터 알고 지내던 에이전트 선배로부터 메시지가 와 있었다.
[태성아, 방금 속보 떴다. 다음 주말 우림 경기장에 국내 최고 기업 구단 스카우터들은 물론이고, 최근 아시아 시장 눈독 들이는 EPL 명문 구단 아시아 총괄 디렉터까지 직접 내려간단다. 최근식이 너 무조건 쇼케이스 세우려고 눈 뒤집혀서 준비 중이라네.]
메시지를 읽는 태성의 눈빛이 예리하게 빛났다.
스카우터들이 총집합하는 무대. 자신이 전 세계에 이름을 알릴 최고의 기회이자, 동시에 최근식이 자신을 가장 잔인하게 쥐어짜낼 파멸의 덫이기도 했다.
그리고 곧이어, 화면 아래쪽에 기상청 앱의 실시간 업데이트 알림이 연달아 팝업되었다.
[알림: 다음 주말 우림 경기장 일대 기상 예보 변동.] [※ 주의: 단순 비 예보에서 '거대 폭우 심화 및 강풍 동반 대형 태풍 영향권'으로 격상.]
화면의 붉은빛이 태성의 무표정한 얼굴을 어둡게 비추었다.
과거 무릎이 완파되던 그날보다 훨씬 더 가혹한 폭우가 예고되고 있었다. 지옥의 전장이 소리 없이 입을 벌린 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