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야. 너 오늘부터 내 노예 해라."

태성의 목소리는 낮고 낮았다. 청룡고 운동장의 습한 바람을 타고 유진우의 귓가에 달라붙은 음성은 마치 지옥에서 갓 끌어올린 쇠사슬처럼 무겁고 차가웠다.

진우는 껌을 씹던 입을 멈췄다. 187cm의 거구가 미세하게 경직되는 것이 태성의 시야에 고스란히 들어왔다. 진우의 눈동자가 갈팡질팡 흔들렸다. 황당함과 불쾌함, 그리고 알 수 없는 위압감이 그 큰 체구를 짓누르고 있었다.

“뭐……? 무슨 개소리야, 이게…….”

진우가 헛웃음을 터뜨리려 입술을 비틀었다. 하지만 태성의 눈빛을 마주한 순간, 비틀어지던 입술이 굳어버렸다. 태성의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은퇴식 날 밤, 빗속에서 제 모든 것을 잃어버렸던 그 처절한 절망과 독기가 서린 눈동자. 고작 고등학생의 몸뚱이에서 뿜어져 나올 수 없는 깊은 어둠이 진우의 숨통을 졸랐다.

태성은 가슴팍에 공을 안고 있는 진우에게로 한 걸음 더 다가갔다. 흙먼지 냄새가 섞인 땀 냄새가 두 사람 사이의 좁은 공간을 채웠다.

“가만히 서 있기만 해. 네가 귀찮아서 움직이기 싫어하는 그 자리에, 내가 자석처럼 공을 배달해 줄 테니까. 넌 그냥 발만 갖다 대서 해트트릭이나 해.”

태성이 속삭였다. 차가운 입김이 진우의 뺨등에 닿는 것만 같았다.

“대신, 내가 준 공 놓치면 그날로 네 축구 인생은 지옥이 될 줄 알아.”

“하! 야, 강태성. 너 진짜 미쳤냐?”

진우가 참지 못하고 태성의 어깨를 밀쳐내려 손을 뻗었다. 그러나 태성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제자리를 지켰다. 오히려 진우의 손목을 낚아채듯 움켜잡았다. 무릎은 망가졌을지언정, 회귀하기 전 프로 무대에서 구르고 구르며 다져진 태성의 손아귀 힘은 고등학생인 진우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윽?!”

진우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뼈가 으스러질 듯한 통증이 손목을 타고 올라왔다.

“이거 안 놓냐? 미친 새끼가 진짜……!”

“잘 들어, 유진우.”

태성이 힘을 주어 진우의 상체를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진우의 커다란 덩치가 무력하게 앞으로 쏠렸다.

“상대 수비가 포백을 서든, 파이브백을 서든 상관없어. 내가 하프스페이스에서 볼을 잡고 왼쪽 어깨를 여는 순간, 넌 무조건 페널티 박스 오른쪽 모서리로 뛰어. 수비수 둘 사이의 간격은 찰나의 순간에 무조건 4.5미터 이상 벌어지게 돼 있어.”

“그걸…… 그걸 네가 어떻게 아는데?”

진우가 신음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태성의 눈동자 속에서 기이한 확신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내가 그렇게 만드니까.”

태성의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그것은 오만함이 아니었다. 철저한 계산과 실력에서 나오는 절대적인 확신이었다.

“내가 수비수 세 명을 내 쪽으로 끌고 들어갈 거야. 그럼 그 멍청한 놈들의 시선은 전부 나한테 쏠리겠지. 넌 그저 그들이 비워둔 뒷공간으로 비스듬히 45도 각도로만 꺾어 뛰어라. 딱 0.8초 뒤에 네 발밑으로 정확히 회전이 풀린 패스가 도달할 거다. 넌 그저 디딤발만 짚고 발등 얹어서 때리기만 하면 돼. 설명이 너무 어렵냐? 네 그 나쁜 대가리 수준에 맞춰서 말해준 건데.”

진우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자존심이 상해 미칠 것 같았다. 하지만 동시에, 머릿속에서 태성이 말한 궤적이 기하학적인 입체도형처럼 그려지기 시작했다. 축구를 시작한 이래, 그 어떤 지도자도 이토록 완벽하게 공간을 조각내어 설명해 준 적이 없었다.

태성이 진우의 손목을 툭 놓아주었다. 진우는 제 손목을 어루만지며 태성을 노려보았다.

그 순간, 태성의 시야가 푸른빛으로 물들었다. 진우의 머리 위로 투명한 상태창이 어른거리기 시작했다.

[A급 수용체 레이더 - 유진우] [상태: 동기 부여 제로, 활동량 최하, 그러나 오프더볼 공간 침투 잠재력 S급]

진우가 분을 참지 못하고 씩씩거리며 몸을 돌려 반대편으로 걸어가려 했다. 그가 첫발을 떼며 어깨를 틀어 휑한 공간으로 몸을 움직이는 찰나였다.

파앗!

태성의 망막 위에 뜬 유진우의 상태창에서 'A급 수용체 레이더'라는 글자가 붉고 푸른빛으로 격렬하게 점멸했다. 그의 발걸음 하나, 어깨의 기울기 하나가 필드 위의 수많은 빈틈과 실시간으로 연결되며 완벽한 '수용체'의 궤적을 그려내고 있었다.

‘이새끼 봐라.’

태성은 등 뒤로 흐르는 소름을 느꼈다. 진우 본인은 인지하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자신이 왜 그 게으른 플레이 스타일 속에서도 간간이 골을 넣을 수 있었는지. 그것은 본능이었다. 상대 수비가 가장 예측하기 힘든 템포로, 가장 위험한 공간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천부적인 오프더볼 감각.

다만 그동안은 그 감각을 자극해 줄 '진짜 미드필더'가 없었기에, 진우 역시 귀찮다는 핑계 뒤로 도망쳐 있었던 것뿐이다.

‘내 무릎을 대신해 뛰어줄 사냥개로 이보다 완벽한 놈은 없다.’

태성의 입안에서 검붉은 탐욕이 끓어올랐다. 이 녀석을 철저하게 조련해야 한다. 내 무릎 내구도를 보존하고, 더 넓은 무대로 나아가기 위한 가장 강력한 무기로 개조해야 한다.

“무슨 일이고, 너희들?”

그때, 거칠고 굵직한 목소리가 두 사람 사이의 팽팽한 대치를 깨뜨렸다. 청룡고의 한정훈 수석코치였다. 최근식 감독이 사학 재단 이사장들과의 골프 접대로 자리를 비운 틈을 타, 훈련 상태를 점검하러 나온 참이었다. 한 코치는 평소 최근식 감독의 선수 혹사 방식과 뒷돈 거래에 깊은 회의감을 느끼고 있었지만, 자리가 자리인 만큼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하는 유약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태성의 눈빛을 보는 순간, 한 코치의 가슴속에서도 묵직한 무언가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코치님.”

태성이 먼저 고개를 숙이며 예의를 차렸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에는 여전히 서늘한 기운이 남아 있었다.

“진우 녀석이랑 전술 훈련 좀 하려고 했습니다. 이 녀석, 다리가 너무 굳어 있어서 오늘 좀 기름칠을 해야겠습니다.”

“야, 강태성! 네가 뭔데 나한테 기름칠을 하네 마네……”

“진우야.”

한 코치가 엄한 목소리로 진우의 말을 가로막았다. 진우는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한 코치는 태성의 탄탄하게 굳은 눈빛과, 그 옆에서 씩씩거리는 진우를 번갈아 보았다. 게으르고 자존심만 센 진우를 통제할 수 있는 선수는 청룡고에 단 한 명도 없었다. 심지어 에이스를 자처하는 박만수조차 진우를 제멋대로 부리지 못했다.

그런데 지금, 갓 1군에 합류한 강태성이 유진우의 멱살을 잡고 흔들고 있다.

한 코치의 심장이 두근거렸다. 어쩌면 이 소년이 청룡고의 썩어빠진 판도를 바꿀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이한 예감이 들었다.

“태성이가 전술 훈련을 제안했다면, 진우 너도 군소리 말고 따라라. 요즘 네 활동량이 형편없다는 건 너도 알 텐데?”

“코치님까지 왜 이러십니까, 진짜……”

진우가 머리를 쥐어뜯으며 괴로워했다. 하지만 이미 판은 짜여 있었다.

“자, 3대 3 하프코트 미니 게임으로 간다. 진우 넌 페널티 박스 외곽에서 대기해.”

태성이 공을 발밑에 굴리며 지시했다. 그의 지시는 감독보다 더 명확했고, 군더더기가 없었다.

훈련이 시작되자마자 운동장의 공기가 달라졌다. 태성이 볼을 잡는 순간, 그의 눈앞에 투명한 기하학적 선들이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잔디의 마찰력, 바람의 방향, 수비수들의 미세한 무게 중심 변화가 숫자가 되어 뇌리에 박혔다.

“뛰어! 지금이야!”

태성의 날카로운 호령이 훈련장을 찢었다.

진우는 마지못해 몸을 움직였다. 수비수 두 명 사이의 비좁은 틈새로 몸을 구겨 넣는 순간이었다.

툭.

태성의 발끝을 떠난 공이 수비수의 가랑이 사이를 절묘하게 통과했다. 그것은 단순한 패스가 아니었다. 진우가 달리는 속도와 방향을 정확히 계산하여, 그가 발을 뻗는 바로 그 자리에 회전이 완벽하게 죽은 채로 멈춰 서듯 도달한 구질이었다.

탁!

진우가 반사적으로 발을 갖다 댔다. 공은 기분 좋은 파열음과 함께 골망 구석을 세차게 흔들었다.

“어……?”

진우가 멍하니 자신의 오른발끝을 내려다보았다. 방금 전의 감각은 생경했다. 자신이 공을 차 넣은 것이 아니었다. 태성의 패스가 너무도 완벽해서, 그저 발만 대고 있었는데 공이 알아서 골문 안으로 기어 들어간 느낌이었다.

“멍청하게 서 있지 마! 다시 뛰어! 이번엔 왼쪽 하프스페이스다!”

태성의 호통이 다시 터졌다.

“야! 거기가 아니잖아! 두 걸음 더 뒤로 빠져! 수비수 시선이 네 어깨에 닿는 순간 꺾으라고!”

악마 같은 지휘가 시작되었다. 태성은 진우의 일거수일투족을 통제했다. 조금이라도 타이밍이 늦거나 궤적을 벗어나면 가차 없이 폭언에 가까운 독설을 쏟아부었다.

“너 바보냐? 발목 각도가 그게 뭐야? 내가 공에 회전 다 죽여서 줬는데 그걸 홈런을 날려?”

“공이 굴러온 방향도 못 읽으면서 축구선수 타이틀 달고 싶냐? 그럴 거면 당장 짐 싸서 집으로 가!”

진우는 약이 올랐다. 평소라면 벌써 욕을 퍼붓고 운동장을 뛰쳐나갔을 터였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발이 움직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기가 막히게 받아먹는 '손맛'이 대단했다.

태성이 찔러주는 패스를 받을 때마다, 온몸의 세포가 짜릿하게 깨어나는 기분이었다. 무겁게만 느껴지던 187cm의 거구가 태성의 패스 궤적 위에서는 깃털처럼 가벼워졌다.

수비수 세 명이 자신을 가로막아도, 태성의 발끝에서 시작된 붉은 선은 기어코 진우의 발밑에 도달했다.

‘뭐지? 이 새끼 패스는 왜 이리 받기 편한 거야?’

진우의 눈빛이 서서히 달라지기 시작했다. 귀찮음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다음 패스를 갈구하는 사냥개의 눈빛으로 변해갔다. 그가 태성의 패스 맛에 완벽히 중독되어 가고 있었다.

한 코치는 운동장 한구석에서 그 광경을 보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게으름의 대명사였던 유진우가 땀을 비 오듯 흘리며 태성의 지시에 따라 미친 듯이 질주하고 있었다.

“저 녀석들…… 진짜 물건이네.”

한 코치의 읊조림이 바람에 흩어졌다.

* * *

사흘 뒤, 청룡고의 공식 대항전 당일.

우림 경기장의 라커룸은 습한 공기로 가득 차 있었다. 천장을 때리는 빗소리가 규칙적으로 울려 퍼졌다. 미세한 이슬비가 내리기 시작해 잔디가 축축하게 젖어 들고 있었다.

태성은 벤치에 앉아 자신의 무릎 보호대를 단단히 조였다. 귓가에 스치는 빗소리가 과거 무릎이 파열되던 그날의 환청을 자극하려 했다. 뚝, 부러지던 소리. 관중들의 비명.

태성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그의 시야에 붉은색 상태창이 떠올랐다.

[무릎 내구도: 35%]

아직 위험 수위다. 오늘 경기에서 반드시 압도적인 승리와 어시스트를 기록해 내구도를 충전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다음은 없다. 영구적인 은퇴급 부상이 언제 그의 다리를 집어삼킬지 모른다.

“야, 강태성.”

라커룸 문이 열리며 오늘 상대할 황룡고의 미드필더진이 지나가며 시비를 걸어왔다. 그들의 중심에는 청룡고의 에이스를 자처하는 박만수와 은밀하게 눈빛을 교환하는 상대 주전 미드필더, 최형우가 서 있었다.

“너 오늘 선발이라며? 무릎 병신이라 소문났던데, 경기 중에 울면서 나가지나 마라.”

“그러게. 잔디도 젖어 있는데 삐끗하면 아주 은퇴식이겠어? 하하하!”

상대 수비수들이 태성의 무릎을 힐끗거리며 비웃음을 흘렸다. 그들의 눈빛에는 대놓고 거친 태클로 태성을 담가버리겠다는 악의가 가득했다. 최근식 감독의 묵인하에, 박만수가 상대 팀에 미리 손을 써둔 것이 분명했다.

박만수는 라커룸 구석에서 그 광경을 보며 비열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하지만 태성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오히려 차갑게 식어 내린 눈동자로 그들을 올려다보았다.

“많이 짖어둬라.”

태성이 나직하게 읊조렸다.

“그라운드 위에서 숨도 못 쉬게 만들어 줄 테니까.”

축구화 끈을 강하게 조여 매는 태성의 손끝에 단단한 결의가 실렸다. 그의 뒤에서 유진우가 잔뜩 찌푸린 얼굴로, 하지만 이빨을 드러낸 사냥개처럼 태성의 뒤를 지키고 서 있었다. 유진우의 눈빛은 이미 태성의 혹독한 조련을 거쳐 완전히 굶주려 있었다.

“양 팀 선수들, 입장합니다!”

장내 아나운서의 목소리와 함께 경기장에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빗방울이 태성의 이마를 적시며 흘러내렸다. 젖어 든 잔디는 미끄러웠고, 무릎에 가해지는 압박은 평소보다 배로 무거웠다. 하지만 태성은 개의치 않았다. 그의 시선은 오직 그라운드 너머, 승리와 내구도 충전이라는 단 하나의 전리품만을 향해 있었다.

삐이익-!

주심의 날카로운 휘슬 소리가 빗물 머금은 그라운드를 갈랐다. 경기가 시작되었다.

태성이 중앙에서 볼을 터치하는 순간, 황룡고의 미드필더 세 명이 기다렸다는 듯 기세등등하게 태성을 둘러싸며 압박해 들어왔다. 거친 스터드가 잔디를 사정없이 파헤치며 태성의 무릎을 정조준하는 찰나였다.

“잡아! 저 새끼 다리 묶어버려!”

상대의 거친 숨소리와 짓밟을 듯한 기세가 태성의 코앞까지 육박했다. 사방이 막힌 감옥 같은 공간.

그 순간, 태성의 눈동자가 번쩍였다.

느려진 세계 속에서, 상대의 압박 그물망 사이로 붉은색 균열이 가지를 치며 뻗어나갔다.

[최적의 패스 궤적 상태창 활성화]

번쩍이는 붉은 균열의 패스 길이 활로처럼 전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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