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지독한 쇳소리와 함께 거친 흙먼지가 시야를 가로막는다.

태성의 시야 우측 하단에서 붉은색 경고등이 미친 듯이 점멸한다.

[경고: 무릎 내구도 35.1%] [경고: 관절 부하 임계치 근접. 급격한 물리 충돌 시 영구적 손상 위험!]

시뻘건 경고 문구가 망막을 찌르는 것과 동시에, 전방에서 짓쳐 들어오는 박만수의 일그러진 얼굴이 육안에 박힌다. 박만수의 축구화 바닥, 시퍼렇게 날이 선 쇠 스터드가 태성의 디딤발인 왼쪽 무릎을 정확히 겨냥하고 있다.

고의다.

공을 걷어내려는 손짓이 아니다. 저 눈빛은 명백히 사람의 다리를 분질러 놓겠다는 악의로 가득 차 있다. 과거, 비 내리는 우림 경기장에서 뼈가 으스러지던 그 끔찍한 파열음이 환청처럼 귓가를 때린다.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폭포수처럼 흘러내린다.

‘여기서 부닥치면 끝이다.’

EPL의 잔디를 밟아보지도 못하고, 다시 한번 이 개천 같은 고교 운동장에서 축구 인생을 종쳐야 한다. 그것만큼은 죽어도 허락할 수 없다.

태성은 이를 악물었다. 턱관절이 으스러질 듯한 힘이 들어가며 입안에서 핏맛이 맴돈다.

뇌의 명령은 단 0.1초 만에 척수를 타고 내려간다. 무릎에 가해지는 하중을 최소화해야 한다. 정면충돌을 피하는 동시에 공의 소유권을 유지하는 유일한 탈출구.

태성의 눈에 상태창이 그려낸 기하학적 궤적이 입체적으로 떠오른다. 박만수의 슬라이딩 궤적은 붉은색 파멸의 선으로, 그리고 태성이 빠져나갈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은 가느다란 황금빛 실선으로 분기된다.

태성은 왼쪽 무릎을 축으로 삼아 도는 대신, 디딤발의 뒤꿈치를 가볍게 들어 올리며 몸의 중심을 허공으로 띄운다. 동시에 오른발 끝으로 공의 윗부분을 부드럽게 긁어 당긴다.

마르세유 턴의 변형. 그러나 지탱하는 다리의 부담을 완벽히 소거한, 오직 생존만을 위한 기하학적 회전이다.

스윽.

“어……?”

박만수의 입에서 멍청한 탄성이 새어 나온다.

태성의 몸이 허공에서 한 바퀴 매끄럽게 돌며 박만수의 태클 궤적을 한 끗 차이로 비껴간다. 쇳날 같은 스터드가 태성의 스타킹 깃을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가며 바람 소리를 낸다.

쿵!

바닥을 휩쓴 것은 박만수의 육중한 몸뚱이뿐이다. 제 속도를 이기지 못한 박만수가 운동장 모래바닥을 얼굴로 쓸며 사정없이 미끄러진다. 흙먼지를 잔뜩 뒤집어쓴 채 개처럼 처박히는 꼴이 볼만하다.

태성은 가볍게 잔디 위에 내려앉는다. 무릎에 가해진 충격은 제로에 가깝다.

[무릎 내구도: 35.0% (안정 유지)]

태성이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바닥에 대가리를 박고 신음하는 박만수를 내려다본다. 눈동자에는 한 줌의 온기조차 없다. 오직 극도의 경멸만이 서려 있을 뿐이다.

“바닥 청소는 청소부한테 맡기지 그래, 만수야.”

태성의 입꼬리가 차갑게 비틀어진다.

“축구화 신겨놓으니까 눈에 뵈는 게 없나 본데, 사람 다리 노릴 시간에 공 위치나 파악해. 멍청하게 흙이나 처먹지 말고.”

“이, 이익……! 강태성, 이 개새끼가!”

박만수가 얼굴에 흙을 잔뜩 묻힌 채 이를 갈며 일어서려 하지만, 이미 공은 태성의 발끝에서 떠난 뒤다.

태성의 시야에 들어온 또 다른 궤적. 페널티 박스 우측 모서리 부근, 상대 수비의 압박이 느슨해진 틈새로 아군 2진 공격수 오성식이 멍청하게 서 있는 모습이 보인다. 그곳으로 이어지는 초록색 패스 루트가 선명하게 활성화된다.

툭.

발목 스냅만을 이용한 간결한 아웃프런트 패스.

공은 회전을 먹으며 박만수의 머리 위를 가볍게 넘어 오성식의 발밑으로 자석처럼 빨려 들어간다. 수비수 세 명의 사이 공간을 정밀하게 쪼개고 들어간, 그야말로 컴퓨터로 계산한 듯한 궤적이다.

“와, 대박이다!”

벤치에 서 있던 한정훈 코치가 주먹을 불끈 쥐며 소리친다.

완벽한 오픈 찬스. 골키퍼와 일대일로 맞설 수 있는, 축구 선수라면 초등학생이라도 골을 넣을 수밖에 없는 황금 같은 기회다.

하지만.

“어? 어어?!”

패스를 받은 오성식의 몸짓이 눈에 띄게 굳어 있다.

자신에게 이렇게 완벽한 공이 올 줄 예상치 못했던 모양이다. 당황한 오성식이 둔탁하게 발을 뻗었지만, 공은 그의 발목을 맞고 투박하게 튀어 오른다. 트래핑 미스다.

“아, 저 머저리가!”

한정훈 코치의 탄식이 운동장에 울려 퍼진다.

튀어 오른 공은 상대 수비수의 가슴팍으로 정직하게 굴러갔고, 득달같이 달려든 상대 센터백이 가볍게 공을 걷어내 버린다. 역습 찬스가 허무하게 무산되는 순간이다.

오성식이 머리를 긁적이며 태성을 향해 멋쩍은 미소를 지어 보인다.

“미안, 태성아! 공이 너무 갑자기 와서!”

태성은 대답하지 않는다. 그의 눈동자가 겉잡을 수 없이 차갑게 식어 내린다.

‘미안하다고?’

가슴속 깊은 곳에서 끈적한 불신감이 끓어오른다. 과거의 망령이 귓가에 대고 속삭이는 것 같다.

‘봐라. 동료라는 놈들은 결국 다 저 모양이다. 네가 뼈를 깎아 가며 기회를 만들어줘도, 저놈들은 제 발로 기회를 걷어찬다. 결국 네 몸을 혹사시키는 건 저 무능한 놈들이다.’

불신벽이 두꺼운 성벽처럼 태성의 마음을 에워싼다.

남을 믿느니 차라리 내가 직접 해결하는 게 낫다. 과거에도 그랬다. 패스할 곳이 없어서, 동료들이 믿음직스럽지 못해서 자신이 직접 공을 몰고 끝까지 달렸다. 왕복 달리기하듯 필드를 종횡무진 누볐다.

그 결과가 무엇이었나.

데뷔도 하지 못한 채 휠체어에 앉아 은퇴 선언서를 읽어야 했던 잔혹한 결말이었다.

태성이 주먹을 꽉 쥔 채 앞으로 발을 내딛으려 한다. 혼자서 다 뚫어버리겠다는 독기가 전신을 지배하려 할 때, 상태창이 가차 없이 붉은 빛을 뿜어내며 경고를 날린다.

[경고: 플레이어의 단독 돌파 시도 감지.] [패널티 발동 예측: 무리한 스프린트 및 방향 전환 시 무릎 내구도 초당 1.5% 추가 감소.] [현재 내구도로는 90분 경기를 소화할 수 없습니다. 수치 10% 이하 도달 시 2단계 환상통 발생.]

머리가 지끈거린다.

이것은 시한부 장부다. 내가 직접 북 치고 장구 치며 필드를 지배하는 것은 자살 행위다. 아무리 압도적인 재능을 가졌어도, 무릎 수명이 다하면 그 즉시 끝장나는 한계가 발목을 잡고 있다.

‘내가 뛰면 무릎이 죽고, 저놈들에게 맡기면 경기가 죽는다.’

이 지독한 딜레마 속에서 태성은 마른침을 삼킨다. 이마를 타고 흐르는 땀방울이 눈으로 들어가 따갑게 찌른다. 어떻게 해야 이 무능한 놈들을 데리고 내 무릎을 보존하면서 승리를 쟁취할 수 있단 말인가.

그때, 상태창의 시스템 메시지가 다시 한번 눈앞을 가득 채운다.

[알림: 이타적 어시스트 성공 시 무릎 내구도 복구율 300% 적용.] [생존 제안: 무기력한 팀원들을 방치하면 플레이어의 수명은 빠르게 고갈됩니다. 동료를 ‘가공’하십시오. 그것이 당신의 무릎을 지키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동료를 가공한다.

그 문장이 태성의 뇌리에 번개처럼 내리꽂힌다.

그렇다. 내가 뼈가 빠지게 뛸 필요는 없다. 저 머저리 같은 놈들이 제 발로 뛰게 만들면 된다. 생각할 필요도 없이, 그저 발만 갖다 대면 골이 들어갈 수밖에 없는 완벽한 환경을 강제로 조성해 주면 된다.

스스로 빛나는 태양이 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놈들을 조종하는 지휘자가 되는 것이다.

말 한마디, 패스 한 번으로 필드 위의 모든 인간을 내 수족처럼 부리는 악마.

태성의 입술이 느리게 호선을 그린다. 눈빛에 가득했던 분노와 초조함이 싹 사라지고, 그 자리에 지독하리만치 계산적이고 냉혹한 지배자의 안광이 들어선다.

“어이, 오성식.”

태성이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오성식을 불렀다. 오성식의 몸이 움찔한다. 방금 전 태성이 보여준 살벌한 턴 동작과 박만수를 향한 폭언을 보았기에, 그의 목소리만 들어도 등골이 오싹해지는 기분이다.

“어, 어? 태성아.”

“다음번엔 내 패스 피하지 마라. 발목에 힘 풀고, 공이 오는 길목에 발만 대고 있어. 못 넣으면 그 발목 분질러 버릴 테니까.”

“……!”

농담이 아니다. 태성의 눈빛은 진짜로 그렇게 하고도 남을 만큼 서슬 퍼런 살기로 가득 차 있었다. 오성식은 꿀꺽 침을 삼키며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격하게 끄덕였다.

태성은 시선을 돌렸다. 이 밍밍하고 무능한 놈들 중에서, 내 패스를 가장 확실하게 받아먹고 내 무릎을 지켜줄 가장 강력한 ‘무기’가 필요하다.

그의 눈길이 그라운드 저편, 하프라인 부근에서 홀로 어슬렁거리는 한 사내에게 멈춘다.

청룡고의 또 다른 천재. 하지만 의지박약에 게으름뱅이로 낙인찍힌 공격수, 유진우다.

진우는 다른 동료들이 땀을 뻘뻘 흘리며 압박 타이밍을 잡는 와중에도, 허리에 손을 얹은 채 질겅질겅 껌을 씹고 있다. 훈련이 귀찮다는 기색이 온몸에서 풀풀 풍긴다. 187cm의 압도적인 피지컬과 탄력적인 탄성을 가졌음에도, 저 귀찮아하는 태도 때문에 제 기량의 반도 쓰지 못하는 놈.

태성의 시야에 진우의 상태창 정보가 흐릿하게 비친다.

[A급 수용체 레이더 - 유진우] [상태: 동기 부여 제로, 활동량 최하, 그러나 공간 침투 잠재력 S급] [특이사항: 완벽한 패스가 공급될 시 폭발적인 오프더볼 반응 가능성 존재]

‘찾았다.’

저 게으른 천재야말로 내 무릎을 대신해 뛰어줄 최고의 사냥개다.

태성은 천천히 진우를 향해 걸어갔다. 굴러온 공을 발끝으로 가볍게 툭툭 트래핑하며 다가가는 그의 발걸음에는 망설임이 없다.

진우는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태성을 힐끗 보더니, 여전히 껌을 씹으며 웅얼거리듯 말했다.

“왜 그러냐, 태성아? 나한테 공 주지 마라. 귀찮게 뛰어다니기 싫으니까.”

태성은 대답 대신 발끝에 얹혀 있던 공을 허공으로 가볍게 띄웠다. 그리고 오른발 날로 공을 강하게 내리찍었다.

퍽!

묵직한 타구음과 함께 공이 진우의 가슴팍을 향해 대포알처럼 날아갔다.

“윽?!”

진우가 미처 피할 새도 없이, 공이 그의 탄탄한 가슴팍에 정확히 박혔다. 묵직한 충격에 진우가 두어 걸음 뒤로 주춤하며 공을 간신히 받아안았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가슴을 문지르는 진우의 눈에 당혹감이 서린다.

“야, 너 미쳤냐? 갑자기 공은 왜 때려?”

태성이 진우의 코앞까지 다가선다.

태성의 키는 진우보다 조금 작았지만,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압도적인 중압감은 진우의 거구를 짓누르고도 남음이 있었다. 태성의 눈동자는 지옥의 가장 깊은 곳을 보고 온 사람처럼 차갑고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태성이 진우의 옷깃을 스칠 듯이 고개를 숙이며, 오직 두 사람만이 들릴 만한 목소리로 낮게 속삭였다.

“야. 너 오늘부터 내 노예 해라.”

“뭐……? 무슨 개소리야, 이게…….”

진우가 황당하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지만, 태성의 다음 한마디에 그의 숨통이 턱 막히고 말았다.

“가만히 서 있기만 해. 네가 귀찮아서 움직이기 싫어하는 그 자리에, 내가 자석처럼 공을 배달해 줄 테니까. 넌 그냥 발만 갖다 대서 해트트릭이나 해.”

태성의 입술이 악마처럼 비틀려 올라갔다.

“대신, 내가 준 공 놓치면 그날로 네 축구 인생은 지옥이 될 줄 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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