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흘 뒤, 청룡고등학교 본관 2층 소회의실 앞 복도.
우승의 단맛은 채 사흘을 가지 못했다. 벽보에 붙었던 붉은 낙인은 기어코 소집 통지서가 되어 강태성의 손에 쥐어졌다. 가계약 불이행과 항명. 최근식 감독과 그 배후의 스카우팅 카르텔이 짜 맞춘 얄팍한 올가미가 태성의 목을 조여 오고 있었다.
하지만 태성의 걸음걸이에는 망설임이 없다. 오히려 대리석 바닥을 딛는 오른발 끝에 실리는 감각은 그 어느 때보다 경쾌하고 단단하다.
"진짜 가볍네."
태성은 나지막이 중얼거리며 자신의 무릎을 내려다본다. 우림 경기장의 진흙탕 속에서 박만수의 살인적인 태클을 피해 꺾어 들어가던 그 순간. 머릿속을 때리던 영롱한 이펙트가 여전히 생생하다.
[무릎 내구도: 95.0% (사상 최고 수치 경신!)]
과거의 잔혹한 환상통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뼈마디를 짓누르던 묵직한 이물감 대신 터질 듯한 탄력과 에너지가 관절 사이에 가득 차 있다.
이 경이로운 대수복을 가능케 한 것은 시스템의 숨겨진 이자 법칙이었다. 단순한 패스가 아니다. 상대가 뼈를 부러뜨릴 기세로 달려드는 물리적 충돌의 극단적인 한계 모퉁이. 그 직전에 궤적을 비틀어 올리는 '극비의 기하학적 컷백'은 수명 충전 배율을 무려 3배로 증폭시키는 치명적인 열쇠였다.
그 무모해 보였던 도박이 결국 태성에게 완벽한 강철 무릎을 선사한 것이다.
게다가 박만수 그 머저리는 제 버릇을 개 주지 못했다. 경기 전에 습관적으로 스터드를 치켜들며 상대의 발목을 노리던 그 비열한 물리적 궤적. 이미 태성의 수치 분석기에 '치명적 파열 궤적'으로 고스란히 입력되어 있던 그 움직임을 역으로 이용해, 태성은 단 한 치의 접촉도 없이 박만수 스스로 제풀에 넘어져 퇴장당하게 만들었다.
완벽한 인과응보이자, 철저하게 계산된 승리였다.
"야, 강태성!"
복도 저편에서 다급한 발소리와 함께 익숙한 목소리가 들린다. 고개를 돌리자 숨을 헉헉거리며 달려오는 유진우의 모습이 보인다. 평소라면 훈련이 귀찮다며 라커룸 구석에 누워 있을 녀석이, 머리가 땀에 젖은 채 붉어진 얼굴로 서 있다.
태성이 상태창을 가볍게 활성화하자, 진우의 머리 위로 흐릿하게 점멸하는 고유의 파장이 보인다.
[A급 수용체 레이더: 동기화 완료]
게으른 천재의 껍데기 속에 숨겨져 있던 폭발적인 오프더볼 공간 침투 성향. 태성이 지옥 같은 패스로 억지로 끄집어내지 않았다면 평생 묻혔을 그 재능이, 이제는 완벽히 깨어나 태성의 발끝만을 갈망하고 있다.
"뭐냐, 유진우. 훈련 안 하고 왜 여기 있어?"
태성이 차갑게 쏘아붙이자, 진우는 억울하다는 듯 콧김을 뿜으며 품 안에서 두툼한 서류 뭉치를 꺼내 들었다.
"이거 보라고! 너 혼자 징계위 들어간다는 소리 듣고, 애들이 가만히 있을 것 같았냐? 여기 한 코치님이랑 우리 부원들 탄원서 전부 서명받아 왔어."
진우가 내민 종이뭉치 맨 위에는 '청룡고 축구부 일동'이라는 굵은 글씨와 함께, 삐뚤빼뚤하지만 힘 있게 눌러쓴 부원들의 이름과 지장이 빼곡하게 박혀 있었다. 맨 첫 줄에는 한정훈 수석코치의 정갈한 서명이 묵직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너 없으면 우리 다음 대회는 어쩌라고. 그리고... 솔직히 최근식 감독 그 영감이 억지 부리는 거 모르는 새끼 없어. 그러니까 쫄지 말고 들어가서 다 엎어버려. 뒤는 우리가 지키고 있으니까."
진우의 눈빛은 더 이상 태성의 폭언에 벌벌 떨던 약골의 그것이 아니었다. 태성이 이식해 준 괴물의 투지가 그의 눈동자에서 이글거리고 있었다.
태성은 가슴 저편에서 솟구치는 기묘한 열기를 느낀다. 동료란 결국 제 무릎을 갉아먹는 소모품일 뿐이라 믿었던 지독한 불신벽에 아주 미세한 균열이 가고 있었다.
"쫄긴 누가 쫄아."
태성은 진우의 손에서 탄원서를 낚아채듯 받아들었다. 두툼한 종이의 무게가 손바닥을 통해 온기로 전해진다.
"가서 밥값이나 해라. 다음 경기 때 발만 갖다 대도 골문 안으로 들어가게 찔러줄 테니까."
"말은 싸가지 없게 진짜... 꼭 살아서 나와라!"
진우를 뒤로하고, 태성은 소회의실의 육중한 참나무 문을 밀어젖혔다.
끼이익하는 불쾌한 마찰음과 함께 회의실 내부의 공기가 태성의 피부를 찌른다. 길게 늘어선 테이블 상석에는 최근식 감독이 팔짱을 낀 채 거만하게 앉아 있었고, 그 좌우로는 가계약 체결을 주도했던 대기업 후원 학부모 회장과 학교 재단 이사들이 험악한 표정으로 대기하고 있었다.
"강태성, 제시간에 왔군."
학부모 회장인 박 회장—박만수의 아버지가 안경을 치켜올리며 차가운 음성을 내뱉었다.
"우승 좀 했다고 눈에 뵈는 게 없는 모양인데, 여기가 어디라고 그렇게 당당하게 고개를 들고 들어와? 어른들의 지시를 우습게 알고, 정당한 계약마저 걷어찬 건 명백한 항명이다!"
사방에서 쏟아지는 싸늘한 시선과 가시 돋친 핑계들. 고작 열여덟 살의 고등학생이라면 그 압박감에 다리가 떨리고 눈물이 고였을 법한 상황이다.
하지만 회귀 전 EPL의 험난한 미디어 데이와 가혹한 압박 속에서 굴러먹던 태성에게 이들의 으름장은 유치원생의 앙탈보다 하찮게 느껴질 뿐이다.
태성은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가 테이블 맞은편의 의자를 직 그어 당겼다. 그리고 지시도 내리기 전에 털썩 걸터앉아 다리를 꼬았다.
"건방진 녀석...!"
재단 이사 중 한 명이 탁자를 탁 치며 소리를 질렀지만, 태성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오히려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테이블 중앙에 툭 던져 놓았다.
"항명이라뇨. 말을 똑바로 하셔야죠."
태성의 목소리는 낮고 침착했으나, 회의실 안의 그 어떤 고함보다 강렬한 무게감을 담고 있었다.
"제가 거부한 건 정당한 계약이 아니라, 최근식 감독님과 박 회장님이 뒤로 돈을 챙기기로 약속한 '불법 노예 계약'입니다."
"뭐, 뭐라고?!"
최근식의 얼굴이 순식간에 흙빛으로 변했다.
태성은 아랑곳하지 않고 스마트폰 화면을 톡 두드렸다. 화면 위로 재생 목록이 길게 늘어섰다. 지난 부경고전과 대진고전 전후, 최근식이 스카우터들과 만나 뒷돈을 요구하고 태성의 무릎 상태를 무시한 채 풀타임을 강제하겠다고 모의한 음성 녹취본의 목록이었다.
"이게 뭘 뜻하는지 잘 아실 텐데요. 특히 감독님실 서랍 가장 깊숙한 틈새에 끼어 있던 그 '대기업 스카우터 불법 뒷돈 거래 내역서'."
태성은 슬쩍 미소를 지었다. 5화에서 감독실을 뒤져 확보해 두었던 그 치명적인 비리 장부의 존재를 넌지시 흘린 것이다.
"그 원본과 도감증이 제 손에 있습니다. 제가 이걸 들고 바로 축구협회 공정위원회나 언론사 스포츠부로 걸어가면, 과연 누가 매장당하게 될까요?"
회의실 안이 찬물을 끼얹은 듯 괴괴해졌다. 박 회장의 얼굴이 붉다 못해 보라색으로 물들어가고, 최근식의 손가락이 사정없이 떨리기 시작했다.
태성은 그들의 파멸이 바로 코앞까지 다가왔음을 직감했다. 이 썩어빠진 학원 축구의 카르텔을 단번에 쓸어버릴 사이다 막타의 준비는 이미 완벽하게 끝났다. 이제 단 한 번의 격발만이 남았을 뿐이다.
잠시 동안의 정적을 깨고, 최근식이 갑자기 광기 어린 웃음을 터뜨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 하하하! 제법 머리를 썼구나, 강태성. 하지만 네가 착각하는 게 하나 있어."
최근식이 핏발 선 눈으로 태성을 노려보며 품 안에서 또 다른 서류를 꺼내 들었다.
"네가 무슨 수작을 부리든, 이 학교와 재단의 법적 권한은 나한테 있어! 당장 한 시간 뒤, 재단 이사회를 긴급 소집한다. 거기서 네놈의 선수 자격 박탈 및 영구 제명 가결을 확정 표결에 부칠 것이다!"
최근식의 비열한 폭탄 선언이 회의실 벽을 울렸다.
"협회에 찌르든 언론에 터뜨리든 마음대로 해봐! 그전에 네놈은 오늘부로 대한민국 축구계에서 영원히 제명될 테니까!"
최근식의 최후의 발악, 그리고 예상치 못한 초강수가 태성의 눈앞에 떨어졌다. 단 한 시간의 유예. 태성의 눈빛이 극도로 차갑게 침잠하기 시작했다.
"한 시간이라."
태성이 낮게 읊조린다.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간다. 당황할 것이라는 최근식의 예상과 달리, 태성의 얼굴에는 기묘한 여유가 흐른다.
"제 발로 무덤을 파 주시니 감사할 따름이네요."
"뭐라고?"
"기다려 보세요. 그 한 시간이 누구의 목줄을 끊어놓게 될지."
태성은 더 들을 가치도 없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선다. 참나무 문을 열고 나서는 그의 등 뒤로 최근식의 표독스러운 고함이 날아들었지만, 태성은 돌아보지 않는다.
복도로 나오자마자 태성은 스마트폰을 꺼내 빠르게 터치한다. 화면 너머로 수신호가 간다. 상대는 청룡고의 정식 임명을 앞두고 있던 한정훈 코치다.
- 태성아, 안 그래도 방금 연락 받았다. 이사회 소집 통보가 내려왔더구나. 최근식이 미쳤어. 아주 대놓고 판을 엎으려 드는군.
"예상했던 범위 안입니다. 코치님이 준비해 주셔야 할 게 있습니다."
태성의 목소리에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다. 무릎의 내구도가 95%에 달하는 지금, 그에게는 두려울 것이 없다. 완벽한 신체는 완벽한 자신감을 낳는 법이다.
"그동안 모아둔 재단 비리 장부와 최근식의 외화 밀반출 의혹 자료, 지금 바로 터트려야겠습니다. 그리고..."
태성이 복도 창문을 통해 학교 정문을 내려다본다. 이미 정문 앞에는 이른 아침부터 수상한 차량 몇 대가 대기하고 있었다. 단순한 취재진이 아니다. 태성이 미리 손을 써둔 해외 축구 전문 에이전시와 스포츠 전문지의 거물 기자들이다.
"손님들이 와 계십니다. 판을 키우시죠."
[딩동!] [돌발 퀘스트: 카르텔의 심장을 뚫어라! 가 활성화됩니다.] - 제한 시간: 50분 - 성공 기준: 이사회 표결 시작 전, 최근식의 모든 비리 혐의를 대외에 완전히 노출시키고 그의 행정적 권한을 무력화할 것. - 실패 패널티: 국내 리그 영구 제명 및 EPL 진출 지연. - 성공 보상: '강철 무릎' 최종 안정화 및 EPL 명문 구단의 '공식 이적 제안서' 강제 활성화!
눈앞에 붉게 점멸하는 시스템 창이 태성의 심장을 세차게 뛰게 만든다. 완벽한 보상. 그리고 완벽한 파멸의 기회. 태성은 주먹을 꽉 쥔다. 땀이 밴 손바닥이 차갑게 식어간다.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간다. 40분. 30분. 10분. 학교 본관 3층에 위치한 대회의실 앞은 이미 삼엄한 긴장감으로 가득 차 있다. 최근식의 호출을 받은 재단 이사들이 굳은 표정으로 속속 안으로 들어선다. 그들의 손에는 최근식이 미리 뿌려둔 '강태성의 항명 및 이중 계약 시도 보고서'가 들려 있었다.
"시간 됐다. 문 열어."
최근식이 비열한 미소를 지으며 이사장석 옆에 선다. 그의 눈은 이미 승리를 확신하고 있다. 아무리 천재적인 재능을 가졌어도 결국 고등학생일 뿐이다. 재단의 행정력과 어른들의 권력 앞에서는 한 줌의 먼지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주겠다는 태도다.
쿵! 대회의실의 육중한 문이 열린다. 최근식이 단상 앞으로 걸어나가 헛기침을 한다.
"이사장님, 그리고 이사 여러분. 청룡고의 명예를 실추시키고 지시를 불이행한 강태성 선수의 징계안을 발의하겠습니다. 본 선수는..."
"발의하기 전에, 이 손님들의 의견부터 들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회의실 뒤편에서 날카로운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이사들의 시선이 일제히 문가로 향한다. 그곳에 선 것은 강태성이었다. 그리고 그의 좌우로는 한정훈 코치와 유진우, 그리고 푸른 눈의 외국인 사내와 카메라를 든 기자들이 들이닥치고 있었다.
"너, 이게 무슨 짓거리야! 경비 안 부르고 뭐 해!"
최근식이 얼굴을 붉히며 소리를 지른다. 하지만 태성의 옆에 선 외국인 사내가 품 안에서 영문으로 작성된 묵직한 가죽 바인더를 꺼내 들자, 회의실의 공기가 순식간에 얼어붙는다.
사내의 가슴팍에 박힌 엠블럼. 붉은 바탕에 황금빛 대포가 그려진, 전 세계 축구팬이라면 누구나 아는 노스런던의 거함 '아스널 FC'의 공식 문양이었다.
"Nice to meet you. 저는 아스널 FC의 수석 스카우터, 헨리 켄트입니다."
유창한 영어와 함께, 동행한 통역사가 문서를 받아 이사장 테이블 위에 거칠게 내려놓는다.
"저희는 오늘 강태성 선수와의 '공식 이적 합의서'를 제출하기 위해 이 자리에 왔습니다. 이적료는 고교 선수 사상 역대 최고액인 500만 파운드(한화 약 80억 원)입니다."
"뭐, 뭐야...?"
최근식의 턱이 사정없이 떨린다. 이사들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80억. 고교 축구판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천문학적인 액수다. 그 순간, 태성이 한 걸음 더 앞으로 걸어나간다. 그의 손에는 스마트폰이 켜져 있었고, 화면에는 실시간으로 방송 중인 스포츠 뉴스의 라이브 스트리밍이 돌아가고 있었다.
[속보: 청룡고 최근식 감독, 대기업 입단 강요 및 불법 뒷돈 수수 의혹... 축협 긴급 감사 착수!]
뉴스 앵커의 다급한 목소리가 대회의실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는 순간, 최근식의 얼굴에서 핏기가 완전히 가셨다.
"감독님."
태성이 최근식을 내려다보며 차갑게 미소 짓는다.
"아직도 제가 대한민국 축구계에서 제명될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바로 그 순간, 최근식의 스마트폰이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액정에 선명하게 찍힌 발신인은 경찰청 지능범죄수사대였다. 회의실 안의 모든 이들이 숨을 죽인 채, 최근식의 손에서 힘없이 툭 떨어지는 스마트폰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