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후끈한 조명 열기와 가짜 피 냄새가 진동하는 세트장 구석, 메인 통로에서 밀려난 소품실 옆 가벽 뒤는 정전이라도 된 듯 어두컴컴하다. 대역 촬영을 마치고 가운을 걸친 채 대기실로 향하던 당신의 발걸음이 멈춘다. 합판 한 장을 사이에 두고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낮지만 너무도 명징하게 고막을 찔렀다.

"이번 주 촬영분부터 '아틀라스-V'를 메인으로 노출시킵니다. 홍 배우가 포셉을 잡을 때 카메라 앵글을 콘솔 풋스위치와 핸드피스 모니터에 정확히 바스트 샷으로 걸어주세요."

태성병원 정인형 이사장의 목소리다. 그리고 그 압력에 잔뜩 주눅이 든 채 복종하는 음성은 드라마 <골든 아워>의 제작 총괄, 박 CP였다.

"하지만 이사장님, 그 장비…… 지난주 내부 임상 세미나에서 지연성 혈관 파열 이슈가 나오지 않았습니까? 고주파 캐비테이션 주파수가 55.5kHz로 고정되어 있어서, 심장 대동맥 박리 면을 박리할 때 미세 천공이 발생한다는 보고서가 흘러나왔습니다. 만에 하나 촬영 중에라도 제어 소프트웨어 오류로 탄화 노이즈가 뜨면……."

"박 CP, 쓸데없는 걱정이 눈을 가리는군."

정인형의 음성에 서리가 내린다.

"식약처 임상 3상 데이터는 이미 우리 측 연구소에서 '기저질환에 의한 예측 가능한 합병증'으로 소명 완료했어. 드라마에서 그 장비가 심장 수술을 완벽하게 끝마치는 장면만 대중의 뇌리에 박히면 돼. 방영 직후 제조사 주가는 폭등할 거고, 태성병원은 아시아 독점 총판권을 쥐게 된다. 그 장비가 현존하는 최고의 초음파 미세 절삭기라는 걸, 이 드라마가 '증명'해 줘야 한단 말이다."

가벽 뒤에서 먼지 구덩이를 움켜쥔 당신의 손끝바닥에 날카로운 통증이 인다. 머릿속에서 아틀라스-V의 설계 구조가 빠르게 시뮬레이션된다. 초음파 진동을 이용해 조직을 절개하는 동시에 응고시키는 장비. 하지만 주파수 제어가 불안정하면 조직 단백질이 급격히 탄화되면서 미세 동맥벽에 '보이지 않는 괴사'를 남긴다. 수술 당시에는 멀쩡해 보여도, 환자가 중환자실로 실려 간 지 48시간 이내에 혈압이 상승하면 대동맥이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터져버리는 최악의 지연성 출혈 유발 기기.

의사로서의 본능이 온몸의 피를 거꾸로 솟구치게 만든다. 그것은 의료 기기가 아니다. 완벽하게 포장된 시한폭탄이자, 살인 병기다. 이들이 드라마라는 거대한 확성기를 통해 살인 도구를 혁신적인 신기술로 둔갑시키려 하고 있다.

발소리가 멀어진다. 밀담을 끝낸 두 사람이 각자의 방향으로 흩어지는 기척이 들린다. 심장이 갈비뼈를 터뜨릴 것처럼 가쁘게 뛰어댄다. 세트장의 화려한 네온사인 이면에 도사린 탐욕의 잔상이 어둠 속에서 번뜩였다.

이 거대한 음모의 톱니바퀴를 박살 내야 한다. 방치하면 드라마 방영과 동시에 수많은 환자가 수술대 위에서 소리 없이 죽어 나갈 것이다. 당장 손을 써야 한다. 정확한 물증을 잡거나, 적들의 내부 깊숙한 곳으로 균열을 내야만 한다.

찰나의 고민이 스친다. 확실한 증거를 확보하기 위해 촬영장 지하에 엄중히 보관된 아틀라스-V의 실제 기기와 구동 로그 데이터를 확보하러 움직일 것인가. 아니면 이 장비의 대대적인 홍보에 핵심 역할을 맡아 이권의 중심에 서 있는, 탐욕스러운 주연 남배우 홍준표에게 접근해 흔들 것인가.

선택의 시간은 길지 않다. 당신의 눈빛이 매섭게 가라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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