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 진짜 살 것 같다. 회사 탈탈 털고 탈출 성공!"
현관문을 닫자마자 준우가 앓는 소리를 내며 넥타이를 거칠게 풀어헤쳤어. 늘 완벽하게 세팅되어 있던 머리가 헝클어지는데, 그 모습이 왜 이렇게 직장인 자아 탈곡기 돌린 것처럼 처량하고 귀여운지.
"야, 하준우 본부장님. 넥타이 그렇게 팽개치면 내일 아침에 다림질하느라 곡소리 난다?"
"알 게 뭐야. 지금 회사 일 하나도 안 중요해. 아, 싹 다 기안 반려시키고 싶다."
"권력 남용 오지네. 얌전히 와서 캔맥주나 따시죠, 본부장님."
내가 맥주 캔 두 개를 따서 건네자, 준우는 소파에 길게 누워 있던 몸을 벌떡 일으켰어. 낡은 원룸, 칙칙한 형광등 아래에서 편의점표 매운 닭발을 펼쳐놓은 이 초라한 식탁이 지금 우리에겐 5성급 호텔 디너보다 훨씬 아늑해.
"근데 너 오늘 오후 회의 때 나한테 서류 건네면서 손끝 스친 거 알아?"
"어? 그랬나? 정신없어서 기억도 안 나는데."
"나 그때 심장 멎어서 숨질 뻔했잖아. 회의실 테이블 밑으로 네 손 콱 잡아버릴까 봐 얼마나 애국가를 속으로 불렀는지 아냐?"
"오바는. 아주 그냥 직진 기관차 납셨네. 사내 연애 들키면 아웃인 거 본부장님이 제일 잘 아시면서?"
"알지, 아는데…."
준우가 맥주를 들이켜더니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어. 그리고는 당연하다는 듯 내 옆자리로 바짝 밀착해 앉았지. 20년 동안 '야', '너' 하며 어깨동무하던 그의 손이 슬그머니 내 볼을 감싸 안았어.
"이렇게 둘만 있으니까 진짜 살 것 같다. 매일 회사에서 '네, 본부장님', '검토해 보겠습니다, 이 대리님' 이딴 로봇 같은 소리만 하다가."
"왜, 네가 마케팅팀 박 과장 눈초리 피해서 결재판 뒤로 윙크할 때 난 진짜 간 떨어지는 줄 알았거든? 눈치 더럽게 없는 박 과장이어서 다행이지, 다른 사람 같았으면 벌써 블라인드에 글 올라갔어."
"그거 윙크 아니고 눈에 먼지 들어가서 그런 건데? …는 뻥이고, 진짜 꼬시고 싶어서 환장하는 줄 알았다."
"들켰네, 주책바가지 하 본부장."
"주책이어도 좋아. 너랑 이렇게 연인 딱지 붙이고 마주 앉아 있는 게 꿈같아서 그래. 나 진짜 오랫동안 참았단 말이야. 네가 나 선 넘는다고 밀어내면 그냥 평생 남보다 못한 사이 될까 봐, 매일 밤 혼자 소주 까면서 지옥 갔다 왔다고."
준우의 목소리에 장난기가 싹 가시고 묵직한 진심이 들어찼어. 퇴근 후 지친 기색이 역력한 생얼인데도, 그의 반짝이는 눈동자는 나를 세상에서 제일 소중한 공주님처럼 담아내고 있었지.
"우리 앞으로 어떻게 할까? 회사에서는 철저하게 모른 척하되… 퇴근하고 나서는 매일 이렇게 붙어 있을까? 아니면 그냥 주말에 확 명동 한복판에서 손잡고 걸어 다녀?"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아이처럼 해맑게 웃는 준우를 보며, 내 마음속에서도 뜨거운 감정이 울컥 솟구쳐 올랐어. 평생 얘를 외롭게 혼자 두지 않겠다는 확실한 다짐이 서는 순간이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