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대리, 요즘 회사 생활 참 다이내믹하지?"
마 이사가 특유의 끈적한 미소를 지으며 찻잔을 밀어놓는다. 찻잔에서 피어오르는 은은한 국화차 향기가 오히려 위를 쓰리게 만든다. 대기업 임원실의 가죽 소파는 쓸데없이 푹신해서,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사람을 기죽게 만드는 구석이 있다.
"아유, 이사님. 재미는요. 직장인이 다 똑같죠, 뭐. 월급날 빼고는 매일이 야근 지옥입니다. 이번 분기 KPI 맞추느라 마케팅팀 전체가 거의 반시체 상태거든요."
당신은 일부러 능청스럽게 웃어넘기려 애쓴다. 연차 높은 대리의 짬바를 담아 영혼 없는 미소를 날려보지만, 마 이사의 수평으로 찢어진 눈매는 여전히 차갑고 날카롭다.
"그래? 그런데 공사 구분 확실하기로 소문난 우리 한준우 본부장님이, 유독 한 대리 기안서에만 프리패스 도장을 쾅쾅 찍어주신단 말이지. 결재 라인 올라가는 속도가 거의 5G 고속도로 수준이던데?"
"그거야 제가 퇴근도 포기하고 기안서를 갈아 넣은 덕분이죠. 아시다시피 한 본부장님 반려 병 걸리신 분이잖아요. 사우들 사이에서 '반려 요정'이라고 불리는 건 아시죠? 저 진짜 눈물 흘리면서 고쳤습니다."
"그래? 그냥 소꿉친구 사이라서 눈감아주는 게 아니고?"
쿵. 심장이 바닥 저 너머로 툭 떨어지는 기분이 든다. 당신은 짐짓 허허실실 웃는 표정을 지우지 않으려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가 놓는다. 이 양반이 대체 어디까지 알고 떠보는 걸까.
"소꿉친구라니요, 이사님. 회사 오다가다 동창회에서 마주친 게 전부인 서먹한 사이입니다. 회사에서는 무서워서 사적으로 말도 못 붙여요."
"한 대리."
마 이사가 상체를 테이블 앞으로 쑥 숙인다. 나직하게 깔리는 목소리에서 장난기가 완전히 배제되어 있다.
"사우 내규 제32조, 윤리령 위반 조항 알지? 직속상관과 부하 직원 간의 '사적 특수 관계'로 처벌받은 전례들. 한 본부장이 이번에 차기 부사장 후보군에 올라 있는 건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팩트잖아. 그런데 이 타이밍에 이런 지저분한 사내 스캔들 찌라시 하나 돌면, 그 친구 인생이 어떻게 될 거 같아?"
"……."
"본부장 자리는커녕, 커리어 완전히 아웃이야. 아무리 유능해도 도덕성에 흠집 난 놈은 위에서 절대 안 쓰거든. 그러니까 한 대리가 알아서 처신해 줬으면 좋겠는데. 영리한 대리라 내 말뜻 아주 잘 알아들었을 거라고 봐."
귀가 앵앵 울린다.
'미친, 넷플릭스 오피스 드라마를 너무 많이 보셨나. 내 연봉이 오억쯤 되면 억울하지나 않지. 대출 이자 갚기도 벅찬 대리 나부랭이 하나 잡아서 준우를 통째로 흔들어 놓으시겠다?'
속에서는 천 불이 나고 머릿속은 복잡하게 꼬여간다. 며칠 전 밤, 제풀에 지쳐 내 어깨에 기대어 조용히 눈물을 흘리던 준우의 지친 얼굴이 생생하게 스쳐 지나간다. 그가 이 자리까지 오기 위해 얼마나 많은 밤을 고독하게 버텨왔는지 누구보다 잘 아는데, 내가 그의 날개를 꺾는 족쇄가 될 수는 없다.
마 이사의 비열한 미소를 빤히 바라보며, 당신은 바지 주머니 속에서 주먹을 꽉 쥔다. 선택의 갈림길이 머릿속에 이정표처럼 붉게 들어온다. 준우를 지키기 위해, 당신은 결단을 내려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