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본부장님, 방금 3분기 마케팅 예산안 결재 올렸습니다. 확인 부탁드립니다."

평소라면 "김 대리, 오타 또 풍년이네? 양심이 있으면 탕수육은 네가 사라" 하고 깐족댔을 준우였다. 하지만 지금 본부장실의 공기는 에어컨을 풀가동한 것마냥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결재판을 든 당신의 손끝이 뻣뻣하게 굳었다.

"수정할 부분 있으면 지금 바로 말씀해 주세요. 빛의 속도로 반려 버튼 누르셔도 무방합니다."

"김 대리."

"네, 본부장님."

"단둘이 있을 때까지 그렇게 로봇처럼 굴어야겠어?"

준우가 피식 헛웃음을 터뜨리며 결재판을 옆으로 밀어두었다. 그의 깊게 가라앉은 눈빛과 마주치는 순간, 당신의 뇌내 망상 회로가 에러를 일으키며 굉음을 냈다. 아, 이 눈빛 반칙인데. 저 쓸쓸해 보이는 얼굴을 볼 때마다 명치가 꽉 막힌 것처럼 아려온다.

"공과 사를 칼같이 구분하는 게 K-직장인의 참된 미덕 아니겠습니까. 월급 루팡 소리는 안 들어야죠."

"오늘 저녁에 야근 있더라. 정산서 맞출 거 많아?"

"아, 네. 대충 털고 퇴근하려고요."

"저녁, 나랑 같이..."

"아뇨! 저 오늘 다이어트 한답시고 원효대사 해골물 맛 나는 닭가슴살 쉐이크 챙겨왔거든요. 같이 먹자고 하면 본부장님 퇴사 마려우실 테니까 사양하겠습니다."

일부러 더 오버스럽게 쾌활한 척, 푼수 같은 대답을 쏘아붙였다. 속은 시커멓게 타들어 가는데, 입에선 가벼운 농담이 툭툭 튀어나간다. 전형적인 방어기제 발동이다. 준우가 책상 너머로 당신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의 눈동자에 서린 서글픔이 당신의 심장을 사정없이 찌른다.

"너 나 피하는 거 맞잖아."

"피하다뇨? 제가 감히 하늘 같은 본부장님을요? 저 올해 고과 잘 받아야 합니다. 성과급에 유체이탈한 제 통장 잔고가 시퍼렇게 눈을 뜨고 있어요."

"김혜진."

직급 대신 불쑥 튀어나온 본명이 가슴팍에 날카롭게 꽂혔다.

"그날 내가 했던 말, 없던 일로 안 돼. 20년 동안 친구랍시고 네 주변 맴도는 거, 그거 되게 뼈 깎는 중노동이었어. 기회 달라는 내 말이 그렇게 터무니없는 청구서처럼 무서워?"

"편하잖아요, 우리 사이."

당신은 짐짓 목소리 톤을 낮추고 본론을 꺼냈다.

"쌩얼에 무릎 나온 추리닝 입고 만나서 떡볶이 국물 튀겨가며 회사 욕해도 세상 편한 사이. 그 치트키 같은 우정을 굳이 깨고 연애를 하겠다고요? 만약에, 0.01%의 확률로 우리 헤어지기라도 하면? 그럼 난 연인도 잃고, 세상에서 날 제일 잘 아는 20년 지기 친구도 잃는 거예요. 그 리스크 감당할 만큼 내가 무모해 보여요?"

"난 이미 오랫동안 그 리스크 계산 끝냈어."

준우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큰 키가 드리우는 그림자가 당신을 부드럽게 압박해 왔다. 그의 체취가 훅 끼치자, 머릿속의 엑셀 수식들이 전부 깨지며 로딩 에러 문구만 깜빡거렸다.

"더는 친구인 척 네 연애사 상담해 주고, 네가 딴 놈 때문에 울 때 뒤에서 주먹 쥐고 서 있는 거 안 해. 아니, 못 해 이제."

"준우야."

"그러니까 피해망상 섞인 쉴드 치지 말고 대답해 줘. 진짜 나랑 여기서 끝내고 싶은 건지, 아니면..."

그의 쓸쓸하면서도 간절한 눈빛이 당신의 흔들리는 눈동자에 단단히 닻을 내립니다. 머리로는 이 사치스럽고 위험한 관계를 당장 잘라내야 한다고 소리치지만, 심장은 그의 손을 잡고 싶다며 비명을 지릅니다. 숨 막히는 침묵 속에서, 당신의 시선이 세차게 흔들립니다.

다음 화 계속 보기 →

댓글을 남기려면 로그인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