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 솔직히 말해봐. 본부장이 대리 앞에서 이렇게 질질 짜는 거, 직장 내 괴롭힘이지? 내 감수성에 테러한 거잖아."
콧물이 훌쩍거리는 소리와 함께 준우가 큭큭 웃었다. 눈가가 벌겋게 부어오른 주제에, 내 오피스텔 소파 쿠션에 얼굴을 묻고 있는 꼴이 영락없이 깨진 독에 물 붓다가 지친 K-직장인이다. 20년을 옆에서 봐온 얼굴인데도, 회사에서 '차갑고 철두철미한 한 본부장'으로 필터링을 한 번 거치고 나니 이 눈물이 왜 이렇게 가슴을 찌르는지 모르겠다.
"괴롭힘은 무슨. 야근 수당 청구할 거니까 눈물 닦아, 한준우."
"말만 해. 내 사비로 1.5배 쳐서 입금해 줄게. 계좌 불러."
"진짠가 보네. 원래 진짜 부자들은 이런 농담 안 하거든."
내가 건넨 티슈로 코를 팽 풀던 준우가 부스스 고개를 들었다. 늘 포마드로 꽉 짜여 있던 앞머리가 헝클어진 채 이마로 내려와 있었다. 그 모습이 꼭 고등학교 야자 시간 때 엎드려 자다 깨던 열여덟 살의 한준우 같아서, 나는 괜히 코끝이 찡해졌다.
"근데 진심인데, 나 아까 진짜 무서웠다?"
"뭐가. 투자 유치 실패할까 봐?"
"아니. 너한테 내 밑바닥 다 보여줘서, 네가 나 질려 할까 봐. 맨날 멋있는 척, 일 잘하는 척은 혼자 다 해놓고 사실은 밤마다 불안해서 약 없으면 못 자는 쪼다인 거 들통나서."
준우가 힘없이 웃으며 내 손가락을 꼼지락꼼지락 만져왔다. 차가워진 그의 손가락 끝에서 느껴지는 미세한 떨림에, 내 가슴속 깊은 곳에 꽁꽁 묶어둔 빗장이 풀컥 열리는 기분이 들었다.
"바보냐? 네가 쪼다면 난 상 쪼다다. 나 저번 주에 부사장님 메일에 '네' 대신 '넹'이라고 보낸 거 아직 이불킥 중이거든? 심지어 '넹!'도 아니고 '넹...' 이었어. 구걸하는 줄 아셨을 거야."
"큭... 미친, 진짜로?"
"진짜라니까? 그러니까 기죽지 마. 20년 동안 네 흑역사 내 뇌 하드디스크에 다 포맷 안 되고 저장되어 있으니까, 이제 와서 내외하지 말자고."
내가 짐짓 씩씩하게 웃으며 그의 손을 꽉 맞잡았다. 하지만 준우의 시선은 웃음기 가신 채 가만히 내 얼굴로 내려앉았다. 그의 깊고 어두운 눈동자에 오직 나 하나의 실루엣만 온전히 담겨 있었다. 매일 아침 출근길 지하철 지옥철에서 버티던 고단함도, 이달의 실적 압박도, 정글 같은 사내 정치의 피로함도 순간 거짓말처럼 하얗게 지워졌다.
"이모 대리."
"어, 한 본부장님."
"나 진짜 너 없으면 다음 달 KPI고 뭐고 다 내팽개치고 도망갔을 거야."
"본부장님이 사표 쓰면 대리인 나는 낙동강 오리알 되거든요? 무책임하게 굴지 마시죠."
"장난하는 거 아냐, 은수야."
준우가 나를 제 품으로 끌어당겼다. 익숙한 스킨 향 속에 섞인 체온이 생각보다 너무 뜨거워서 한순간 숨이 턱 막혔다. 그의 단단한 팔이 내 허리를 감아안았고, 나는 자연스럽게 그의 어깨에 뺨을 기댔다.
"나 평생 네 옆에서 버틸래. 네가 내 안식처 해줘. 나도 네 버팀목 할 테니까."
귓가에 닿는 그의 낮은 목소리가 귓바퀴를 간지럽히며 심장으로 곧장 내리꽂혔다. 이건 우정이 아니었다. 오랜 세월 동안 서로의 상처를 들여다보고, 메우고, 마침내 서로밖에 남지 않게 된 이 감정은 명백한 사랑이자, 구원이었다.
준우가 내 턱을 살짝 들어 올렸다. 고요한 거실, 창밖으로 번쩍이는 도심의 붉은 네온사인 불빛이 우리 위로 아스라이 흩어졌다. 굳게 닫혀 있던 경계선이 완전히 허물어지며 그의 입술이 내 입술 위로 부드럽게 겹쳐왔다. 숨이 얽히고, 서로를 갈구하는 손길이 짙어질수록 머릿속에 한 가지 현실적인 고민이 벼락처럼 스쳤다.
우리, 이제 진짜 내일 아침 출근길부터는 어떻게 해야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