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부장님, 아까 점심때 김 부장님이 '요즘 젊은이들은 공사 구분을 못 해'라며 혀를 차시던데요. 저희 이러고 있는 거 걸리면 당장 내일 아침 사내 게시판 스크롤 1위 찍습니다?"
당신은 일부러 대수롭지 않다는 듯 아이스 아메리카노 컵을 만지작거리며 장난스레 대꾸합니다. 터질 것 같은 심장 소리를 숨기려 목소리 톤을 일부러 하이텐션으로 가다듬으면서 말입니다.
하지만 준우의 반응은 평소와 다릅니다. 늘 허허실실 네 장난을 받아주던 소꿉친구의 얼굴은 간데없고, 잔뜩 날이 선 뜨거운 눈빛이 당신을 꼼짝달싹 못 하게 묶어둡니다.
"한해수, 너 지금 장난치고 싶어?"
"장난은 무슨... 나 지금 완전 진지해요. 오늘 제출해야 하는 기획서 결재판이 아직 내 모니터에 떠 있단 말입니다. 야근 수당도 안 나오는 이 지긋지긋한 포괄임금제 직장인의 슬픔을 본부장님이 아세요?"
"해수야."
그가 한 걸음 더 다가옵니다. 좁은 탕비실 안, 맥심 모카골드 상자 냄새 사이로 그의 묵직한 우디 향 향수가 훅 밀려들어 옵니다. 평소 퇴근하고 소주잔 기울이던 그 '이준우'가 아니라, 잘 재단된 수트를 입은 낯선 남자의 실루엣이 당신을 압도합니다.
"나 지금 네 상사로서 여기 서 있는 거 아니야."
"그럼요? 20년 지기 동네 친구로서?"
"친구라는 껍데기 쓰고 너 보고 있는 거, 나 이제 한계라고."
준우의 낮고 갈라진 목소리가 탕비실 벽면에 부딪혀 잘게 흩어집니다. 그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리는 걸 보는 순간, 당신의 가벼운 방어기제도 뚝 멈춰 섭니다.
"준우야..."
"업무 협조니, 소꿉친구니 핑계 대면서 네 주변 서성거리는 것도 이제 진절머리 나. 네 퇴근길 걱정하는 척 데려다주고, 아플 때 약 사다 주면서 '우린 친구니까' 하고 자위하는 거... 진짜 미칠 것 같아."
그가 당신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하지만 단단하게 움켜잡습니다. 그의 손바닥에서 전해지는 열기가 얇은 블라우스 원단을 뚫고 고스란히 살을 에우듯 퍼집니다.
"나한테 기회를 줘. 20년 동안 참아온 내 감정, 이제 더는 안 숨겨. 너한테 남자로 서고 싶어."
"너 갑자기 왜 이래? 우리 이러다 평생 쌓아온 우정도, 회사 생활도 다 망가지면..."
"망가져도 상관없어. 난 너랑 더는 친구 안 해."
준우의 흐트러진 앞머리 사이로 보이는 뜨거운 눈빛이 가깝게 내려앉습니다. 퇴근 시간 이후의 고요한 사무실, 등 뒤의 유리창 너머로 야근하는 옆 부서의 모니터 불빛들이 아스라히 번집니다. 심장이 갈비뼈를 뚫고 나올 것처럼 쿵쾅거리기 시작합니다. 20년의 견고한 벽을 단숨에 깨부순 그의 고백 앞에서, 당신의 이성이 사정없이 대지진을 일으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