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진짜 김 상무 입을 확 꿰매버리든가 해야지. 무슨 PPT 보고서를 당일 밤 10시에 컨펌을 해? 미친 거 아니야, 진짜?"
도어락이 지익, 철컥 열리는 소리와 함께 지옥의 야근이 드디어 끝났어. 11시 반 퇴근이라니, 이건 근로기준법을 대놓고 비웃는 수준이지. 당신은 구두를 대충 발로 차서 벗으며 준우의 오피스텔 거실로 인체 부품처럼 무너져 내려. 거실 불도 켜지 않은 채, 소파 위로 엎어진 당신을 향해 준우가 무거운 한숨을 뱉지.
"야, 이 대리. 살아 있냐?"
"본부장님, 퇴근 후엔 이 대리라고 부르지 마시죠. 직장 내 괴롭힘으로 신고하기 전에."
"미안하다. 입에 붙어서 그래. 오늘 진짜... 멘탈 개박살 나는 줄 알았네."
막 타온 캔맥주 두 캔이 탁자 위에 놓이는 소리가 들려. 준우가 어둠 속에서 소파 밑바닥에 주저앉아. 늘 포마드로 칼같이 세팅되어 있던 앞머리가 헝클어져 이마를 덮고 있어. 낮의 그 오만하고 완벽한 한준우 본부장은 어디 가고, 그냥 뼈마디가 유난히 도드라진 스물아홉의 불쌍한 K-직장인만 남았네.
"한준우, 너 왜 그래? 어디 아파?"
"아니. 그냥... 사직서 존나 마렵다."
"구라 치지 마. 너 아까 단톡방에서 김 상무가 시비 걸 때 손 떨고 있더라. 내가 다 봤거든?"
그 말에 준우의 어깨가 딱딱하게 굳어지더니, 캔맥주를 따지도 못하고 만지작거리기만 해.
"…티 많이 났냐?"
"어. 대박 많이 났어. 너 비상구 계단에서 숨도 제대로 못 쉬던데. 공황장애 그런 거야?"
"아니, 그냥... 강박 같은 거."
준우가 피식 웃는데, 그 웃음 끝이 잘게 떨려.
"나 사실, 매일 아침 눈뜰 때마다 무서워. 내가 조금이라도 완벽하지 않으면, 회사에서 내 자리 같은 건 내일 당장이라도 치워질 것 같아서. 우리 아빠 회사 부도나고 무너지던 거 너도 봤잖아. 난 그렇게 안 되려고 이 악물고 버티는데... 밤마다 숨이 안 쉬어져. 내가 여기서 주저앉으면, 나한테 뭐가 남지? 20년 동안 눈치 보면서 공부하고 일한 거 말고, 내 진짜 껍데기 아래엔 뭐가 있냐고."
어둠 속에서도 준우의 뺨 위로 툭, 투둑 떨어지는 투명한 눈물이 선명하게 보여. 늘 남부러울 것 없는 최연소 본부장으로 살며, 속은 문드러져 가고 있었던 거야.
"너랑 있을 때만 겨우 숨이 쉬어져, 이 대리... 아니, 은수야. 나 요즘 진짜 미칠 것 같아. 내일 아침이 안 왔으면 좋겠어."
준우가 얼굴을 감싸 쥐고 소리 죽여 흐느끼기 시작해. 이 완벽주의자 울보 녀석을 어쩌면 좋을까. 가슴이 꽉 막힌 것처럼 아려오는데, 한편으로는 우는 모습이 너무 마음에 밟혀서 코끝이 찡해져.
"야, 울지 마. 니 피 같은 맞춤 명품 셔츠에 눈물 자국 다 남는다, 바보야."
장난스럽게 던져보지만, 당신의 목소리도 이미 파르르 떨리고 있지. 2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서로의 가장 찌질하고 아픈 밑바닥을 지켜봐 준 우리. 회사에서는 철저한 상사와 부하 직원 구도를 연기하지만, 이 어두운 방 안에서만큼은 그저 서로의 상처를 제일 잘 아는 유일한 안식처일 뿐이야.
준우가 고개를 들어 촉촉이 젖은 눈으로 당신을 올려다봐. 애처롭게 흔들리는 그 눈빛이 당신의 심장을 사정없이 흔들어 놓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