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오후 4시 반. 영혼의 탈곡기가 사정없이 돌아가는 고통의 시간입니다. 기획서 반려 크리티컬을 맞고 좀비처럼 터덜터덜 탕비실로 들어선 당신. 카누 미니 두 봉지를 종이컵에 탈탈 털어 넣는데, 등 뒤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립니다.

"당 떨어졌어, 송 대리?"

흠칫 놀라 돌아본 당신의 눈앞에 완벽한 ‘본부장 한준우’의 슈트 핏을 한 준우가 서 있습니다. 결재판을 옆구리에 끼고 슬쩍 다가오는데, 퇴근 후 보던 어깨보다 회사에서 보는 어깨가 배는 넓어 보입니다.

"어머, 본부장님. 결재판 들고 오신 거 보니 혹시 또 반려인가요? 저 지금 카누 탈 기운도 없으니까 기획서 피드백은 메신저로 해주시죠."

"누가 일 얘기 한대? 그리고 여기 사각지대야. 카메라 안 보여."

"안심은 무슨. 기획서 오타 낸 거 사장님 귀에 들어갈까 봐 염통이 쫄깃한데, 본부장님이 여기까지 밀고 들어오시면 제 수명은 단축됩니다?"

"아까 회의실에선 왜 나 쳐다보지도 않았어?"

준우가 한 걸음 더 쓱 다가옵니다. 은은하고 묵직한 우디 향의 스킨 냄새가 탕비실 특유의 인스턴트 커피 향을 단번에 지워버립니다. 이 와중에 맞춤 슈트가 너무 잘 어울려서 넋을 잃을 뻔한 정신을 가까스로 붙잡습니다.

"공사 구분 똑바로 하라고 칼같이 구신 게 누군데요. 아까 회의실에서는 아주 눈빛으로 저 해고하시는 줄 알았습니다?"

"그거야 김 상무 눈도 있고, 전무님도 계셨으니까 그렇지."

"그럼 저도 눈치껏 행동해야죠. 안 그래요?"

"그래도 너무하잖아."

그가 기어이 당신이 들고 있는 커피 잔 바로 앞까지 다가와 앞을 불쑥 막아섭니다. 좁은 정수기 옆 공간에 당신을 가두듯 가깝게 서서 얼굴을 훅 들이밉니다. 어릴 적 골목길을 같이 뛰어놀던 소꿉친구가 맞나 싶을 정도로 낯설고 뜨거운 눈빛입니다.

"회사라고 해서 너무 남처럼 보지 마, 서운하니까."

"남이라뇨. 하늘 같은 본부장님이시라 감히 눈도 제대로 못 마주치는 중이거든요?"

"눈 피하지 말고 똑바로 봐."

"싫은데요. 여기 회사거든요?"

"그러니까. 나 지금 대리님한테 봐달라고 사정하는 중이잖아."

"어우, 목소리 좀 낮춰요!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그래요?"

"지수야, 라고 부르고 싶어 미치겠는 거 참는 대가로 이 정도 엄살은 받아줘야지."

"본부장님, 진짜 반칙이에요."

"그러니까 더 애타네."

한 손으로 당신 옆의 싱크대 상판을 짚은 그가 스르륵 상체를 숙이며 깊게 눈을 맞춰옵니다. 숨소리마저 섞일 듯한 찰나의 순간, 고요한 탕비실 안의 온도가 순식간에 달아오릅니다. 당신은 마른침을 삼키며 그의 깊은 눈동자를 응시합니다.

다음 화 계속 보기 →

댓글을 남기려면 로그인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