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대리님."
저 낮고 나긋나긋한 목소리에 섞인 칼날 같은 비즈니스 톤. 당신은 마른침을 삼키며 돌아섭니다. 20년 지기 소꿉친구이자, 밤에는 그렇게 다정하게 당신의 상처를 보듬어 주던 한준우는 지금 완벽한 '한준우 본부장'의 가면을 쓰고 있습니다.
"네, 본부장님. 말씀하십시오."
"방금 보낸 주간 보고서요. 오타가 세 개나 있더라고요. 사소한 수치 오류 하나가 전체 피티 신뢰도를 떨어뜨리는 거, 아시죠?"
"아... 죄송합니다. 수정해서 바로 다시 올리겠습니다."
"30분 내로 재컨펌 넘겨주세요. 퇴근 직전에 사람 피 말리지 마시고요."
팀원들의 시선이 모두 쏠린 가운데, 준우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차갑게 돌아섭니다. 당신은 속으로 오열합니다. *저 냉혈한 인간! 어젯밤엔 내가 악몽 꾸다 깨니까 머리칼 쓸어 넘겨주면서 '괜찮아, 내가 있잖아' 하던 그 다정 보스는 도대체 메타버스 속 아바타였단 말인가?*
"대리님, 너무 속상해하지 마요. 본부장님 원래 저렇게 공과 사 칼 같잖아."
옆자리 후배 민지 씨가 동정 어린 눈빛으로 어깨를 토닥입니다.
"아니에요, 민지 씨. 제 손가락이 살이 쪄서 오타를 냈네요, 뭐. 어휴, 월급값 해야죠."
가면을 쓰는 건 당신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내에선 그저 일 못해서 가끔 까이는 평범한 회사원 1일 뿐이니까요.
서류 수정 작업을 마치고 탕비실로 가는 복도. 무거운 문서 박스를 들고 걸어가는데, 저 멀리서 한 본부장의 긴 그림자가 복도를 가로질러 다가옵니다. 마주 오는 그의 표정은 여전히 무심하기 짝이 없습니다. 스쳐 지나가는 바로 그 1초의 찰나.
당신은 일부러 벽 쪽으로 바짝 붙어 길을 터주려 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넓은 어깨가 당신의 어깨를 가볍게 스치더니, 이내 정장 소매 아래로 뻗어 나온 그의 길고 곧은 손가락 끝이 슬그머니 당신의 손바닥 안쪽을 슥 긁고 지나갑니다.
아주 짧고 간지러운,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뜨거운 마찰.
그가 스치듯 지나가며 목소리를 바짝 낮춰 속삭입니다.
"이따 보자, 지안아."
그리고는 언제 그랬냐는 듯, 저 멀리서 걸어오는 김 부장님을 향해 완벽한 비즈니스 미소를 지어 보입니다.
"아, 김 부장님. 퇴근하십니까? 오늘 거래처 미팅은 잘 끝났고요?"
"어어, 한 본부장! 퇴근 전인데 담배나 한 대 태우러 가자고."
손바닥에 고스란히 남은 그의 손길 때문에 얼굴이 화끈 달아오릅니다. 심장이 사정없이 요동쳐 들고 있던 상자를 떨어뜨릴 뻔했습니다. 이건 사내 연애가 아니라 첩보 스릴러가 분명합니다.
드디어 오후 여섯 시. 시계 침이 퇴근 시간을 가리키자마자 사무실 전체에 팽팽한 눈치 게임이 시작됩니다.
'칼퇴냐, 눈치 야근이냐.'
후배들이 하나둘 짐을 싸는 와중에, 준우의 본부장실 안쪽 불빛은 꺼질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저 인간, 오늘 밤늦게까지 야근할 기세입니다. 당신의 손가락이 키보드 위에서 갈팡질팡 흐느낍니다. 이대로 퇴근해 버리면 집에서 편하게 보겠지만, 회사 안에서만 느낄 수 있는 이 아슬아슬한 긴장감이 온몸의 말초신경을 자극해 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