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대리님, 기획서 3페이지 수치 기재 오류는 마케팅팀이랑 사전 크로스체크 하신 겁니까?”
묵직한 목소리가 회의실 통유리벽을 때린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빨대를 물고 있던 당신은 반사적으로 허리를 곧게 폈다. 저 까칠한 얼굴, 저 칼로 잰 듯한 셔츠 핏. 바로 12시간 전, 당신의 집 거실 소파에 대자로 뻗어 “나 월요일에 회사 가기 싫어서 죽을 것 같아, 나 그냥 네가 먹여 살려주면 안 되냐?” 하고 징징대던 서른한 살 한준우가 맞나 싶다.
“아… 그 부분은 마케팅팀 유 대리님이 갑작스럽게 연차를 쓰시는 바람에 사전에 수치가…” “실무자 부재는 변명이 안 됩니다.”
그가 싸늘하게 말을 잘랐다. 오금이 저릴 정도로 이성적인 목소리. 회의실에 동석한 다른 대리들과 과장들이 조용히 눈치를 살피며 메신저를 두드리는 소리가 탁탁 울렸다. 아, 진짜 피도 눈물도 없는 한 본부장 빌런 새끼… 라는 동료들의 무언의 단톡방 비명이 당신의 정수리에 꽂히는 기분이다. 당신은 속으로 눈물을 삼키며 독백했다. *야, 어제 내가 끓여준 짜파게티 두 봉지에 파김치 허겁지겁 처먹던 귀신은 어디 가고 웬 저승사자가 앉아 있냐? 진짜 회사만 오면 이중인격자 수준이네.*
“오늘 퇴근 전까지 수치 보완해서 본부장실로 직접 보고하세요.” “네, 알겠습니다. 본부장님.”
비즈니스 미소를 장착한 대답에 준우가 서류를 탁 하고 덮었다. 다들 눈치껏 노트북을 챙겨 일어서는 어수선한 틈을 타, 당신도 피가 마르는 자리에서 탈출하려던 찰나였다.
“이 대리님은 잠시 남으세요.”
동료들이 ‘팀의 에이스가 오늘 제대로 털리는구나’ 하는 눈빛으로 당신의 어깨를 조용히 툭툭 치며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이윽고 단둘만 남게 된 숨 막히는 공간. 회의실 문이 찰칵, 하고 완전히 닫히는 소리와 함께 팽팽해진 정적이 흘렀다.
당신은 침을 꿀꺽 삼키며 그를 바라봤다. 조금 전까지 얼음장 같던 준우의 한쪽 입꼬리가 미세하게 실룩였다. 목을 죄던 넥타이를 거칠게 살짝 늦춘 그가 핏줄이 선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당신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수많은 사람들이 드나드는 오피스 한복판, 불투명 유리 너머로 다른 팀원들의 실루엣이 지나가는 와중에 그의 깊은 시선이 당신의 입술에 머물렀다 떨어진다.
눈빛 속엔 아까의 정색은 온데간데없고, 당장이라도 숨이 막힐 것 같은 열기와 간절함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어젯밤, 거실의 스탠드 불빛 아래서 당신의 손끝을 잡고 조심스레 입을 맞추던 그 뜨겁고 다정했던 밤의 공기 그대로였다.
“공과 사는 확실히 해야지, 이다은 대리님?”
그가 낮게 속삭이며 한 가닥 남은 이성을 쥐어짜듯 서류 봉투를 손가락으로 툭툭 쳤다. 하지만 테이블 밑으로 길게 뻗은 그의 구두 끝이 슬그머니 당신의 구두 앞코를 툭, 건드려왔다. 심장이 쿵스 터질 것처럼 세차게 뛰기 시작한다. 주변의 눈을 피해 끝까지 완벽한 포커페이스를 유지해야 할지, 아니면 이 아슬아슬하고 텅 빈 회의실에서 그에게 한 걸음 더 밀착해야 할지, 선택의 순간이 눈앞에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