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김 대리님, 아까 본부장실 들어갔다 나오시는데 표정이 어둡더라고요... 또 깨지셨어요?"

옆자리 서 대리가 제 일인 양 울상을 지으며 슬쩍 믹스커피 종이컵을 밀어줍니다. 당신은 영혼이 탈탈 털린 k-직장인 코스프레를 완벽하게 연기하며 한숨을 푹 쉽니다.

"아휴, 말도 마세요. 자간 0.5포인트 조정했다고 보고서를 통째로 반려하시잖아요. 진짜 피도 눈물도 없다니까요?" "헉, 진짜 너무하시네. 강 본부장님 얼굴만 잘생겼지 완전 일지망이셔. 미친 완벽주의자." "그러게요. 진짜 퇴사 마렵습니다."

당신은 서 대리의 동정 섞인 시선을 받으며, 메신저 창 아래로 조심스럽게 개인 톡을 띄웁니다. 노란 대화창 위로 실시간으로 쏟아지는 익숙한 프로필.

[강준우 본부장: 아까 회의실에서 너무 정색했나? 미안ㅋ 근데 김 전무가 주시 중이라 어쩔 수 없었음ㅠㅠ] [당신: 눈빛으로 사람 쏴 죽이는 줄 알았네요, 본부장님? 퇴사 마렵다고 옆자리 서 대리한테 밑밥 다 깔아놨음요.] [강준우 본부장: 헐, 퇴사 안 돼ㅠㅠ 나 누구 보고 버팀? 오늘 야근 금지. 7시에 지하 3층 주차장 구석탱이 알지?] [당신: 넵, 알겠습니다. (회사 공식 넵병 이모티콘)]

완벽한 공사 구분. 낮의 강준우 본부장은 결점 하나 없이 차갑고 유능한 상사고, 당신은 야근에 찌든 평범한 김 대리일 뿐입니다. 하지만 퇴근 알람이 울리고 어둑한 지하 주차장 3층, 시동이 꺼진 준우의 SUV 차량 문을 여는 순간 모든 공기가 바뀝니다.

차 안 가득 퍼지는 달콤한 블랙체리 향과 함께, 시트를 뒤로 젖힌 준우가 당신을 보자마자 제 품으로 와락 끌어당깁니다.

"아, 드디어 살겠다. 보고 싶어 죽는 줄 알았네." "야, 강준우. 너 아까 회의할 때 눈썹 하나 안 까딱하고 꼽주더라? 정 없어 아주." "자기야, 그게 프로페셔널이지. 그리고..."

준우가 장난스럽게 웃다 말고, 서서히 당신에게 몸을 밀착해옵니다. 낮에 회의실에서 그렇게 단정하게 빗어 넘겼던 앞머리가 살짝 내려와 그의 깊은 눈매를 가립니다.

"낮에 그렇게 정 없는 척 안 하면, 나 하루 종일 너 안고 싶어서 일 못 해. 지금도 봐, 이 손가락 잡는 데 몇 시간 걸린 줄 알아?"

아까 서류를 건넬 때 아주 찰나의 순간 스쳤던 손가락이, 이제는 서로의 살결을 지독하게 탐하며 얽혀듭니다. 낮 동안 쌓인 업무 스트레스와 날 선 긴장감이 그의 뜨거운 숨결과 함께 단숨에 녹아내립니다.

"서 대리가 보면 기절초풍하겠네. 피도 눈물도 없는 강 본부장이 이러고 있는 거 알면." "알게 해? 확 사내 공지에 올려버려? 김 대리는 내 여자라고." "미쳤어? 나 월급 루팡 생활 종 치고 싶지 않거든?" "그러니까 우리 둘만 알아야지. 아무도 모르게, 아주 아찔하게."

준우가 낮게 속삭이며 당신의 입술을 빈틈없이 채워옵니다. 차창 밖으로 간간이 들리는 퇴근 차량들의 라이트 불빛이 그늘진 차 안을 아슬아슬하게 비췄다 사라집니다. 온 세상을 속이는 이 달콤한 비밀 아래, 밤이 깊어갈수록 우리의 거리는 그 누구보다 가깝고 영원히 안전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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