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야, 김 대리. 결재 올린 기획서 반려할 생각으로 들어왔는데, 오늘 기분이다. 결재 완료."

준우의 목소리에 당신은 기가 차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립니다.

"와, 한준우 본부장님? 공사 구분 칼같이 하신다더니 공적인 자리에 사심 대폭발이신데요?"

"사심은 무슨. 기획서가 워낙 완벽해서 그래. 오 부장 콧대 제대로 꺾어놓은 일등 공신인데 내가 감히 어떻게 태클을 걸겠냐."

탕비실 구석, 카누를 타던 동기 녀석들이 당신과 준우의 눈치를 살살 보다 조용히 빠져나갑니다. 이제 사내에서 두 사람의 사이를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그 누구도 감히 손가락질하지 못합니다. 압도적인 실적으로 이사회의 주둥이를 꾹 닫게 만들었으니까요.

"오늘 저녁은 메뉴가 뭡니까, 한 본부장님? 삼겹살에 소주 어때요?"

"콜. 대신 고기는 김 대리가 구워주는 걸로."

"웃기시네. 고기는 굽는 레벨이 높은 사람이 구워야죠. 고기 태워 먹는 본부장님은 가만히 계세요."

"이게 아주 남친 주먹구구로 다루네? 귀여우니까 봐준다."

바쁘게 굴러가는 화요일 오전의 사무실, 날아오는 사내 메신저로 당신과 준우는 실시간 연애 중입니다.

[준우]: 오늘 야근 금지. 칼퇴하고 집에서 넷플릭스 보면서 피자 먹자. [당신]: 딜. 피자는 파인애플 추가함? 토핑 빼면 나 내일부터 재택근무 신청한다. [준우]: 윽, 하와이안 피자라니... 취향 존중해 드림. 얼른 일 끝내고 집으로 오기나 해.

다음 날 아침, 요란하게 울리는 알람 소리에 눈을 뜨면, 눈앞에 아주 친숙한 화이트 셔츠 차림의 준우가 소매를 걷어 올리며 서 있습니다.

"김 대리님, 진짜 지각이야. 얼른 일어나."

"으음... 오 분만... 한 본부장님, 나 오늘 연차 쓰면 안 돼요? 몸이 찌뿌둥한데."

"본부장 권한으로 즉시 반려. 오늘 기획팀 미팅 있는 거 까먹었냐?"

"진짜 직장인 연애 킹받네... 메리트가 없어, 메리트가."

당신이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자, 준우가 피식 웃으며 침대 머리맡으로 다가와 이불을 살짝 걷어냅니다. 그리고 당신의 이마 위에 부드럽고 따뜻하게 입을 맞춥니다.

"출근길에 스벅 아바라 벤티 사이즈로 대기시켜 놓을 테니까, 오 분 뒤에 욕실 안 들어가면 진짜 물 뿌린다?"

"협박 수준 봐라, 진짜."

투덜거리면서도 당신의 입꼬리는 내려가질 않습니다. 20년 동안 흘렸던 눈물과 둘만의 아픈 상처들이, 매일 아침 함께 맞이하는 이 온기 가득한 침대 위에서 눈 녹듯 사라집니다.

"준우야."

"왜, 또 칭얼거리게?"

"아니. 그냥 평생 내 옆에 있으라고."

준우가 세상을 다 가진 듯한 미소를 지으며 당신의 손가락 사이로 제 손가락을 얽어매, 손을 꼭 맞잡아옵니다.

"당신이 원한다면 평생 발목 묶여 줄게. 자, 이제 얼른 씻어. 지각하면 시말서야!"

서로의 유일한 안식처이자 가장 든든한 파트너가 된 지금, 당신의 아침은 그 어느 때보다 찬란하고 포근하게 반짝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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