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우."
"어."
"너 내일부터 나 아는 척하지 마라. 정수기 앞에서도, 탕비실에서도. 메신저 답장도 딱 세 글자만 해. '넵', '확인', '감사' 끝."
당신의 으름장에 이준우가 편의점 캔커피를 만지작거리며 씁쓸하게 웃는다. 가로등 불빛 아래 비친 그의 얼굴이 어쩐지 평소보다 세 배는 더 야위어 보인다.
"다섯 글자는 안 되냐? '네, 알겠습니다' 정도로."
"협상 없어. 나 진짜 너 때문에 매일 아침 사직서 품고 출근하는 거 지겨워 죽겠다. 오늘 이사회 늙은이들 눈빛 봤지? 우리 둘이 복도에서 스치기만 해도 사내 감사팀에 감사 청구할 기세던데."
"알지. 내 목 날아가는 건 상관없는데, 네 인사고과에 흠집 나는 건 못 보지."
"본부장님, 그 오글거리는 멘트 백 점 만점에 오 점 드립니다. 제 인생의 최대 흠집은 이미 고등학교 때 너랑 짝꿍 된 순간부터 시작됐거든요?"
가슴속엔 눈물이 홍수처럼 넘실거리는데, 튀어나오는 말은 죄다 가시 돋친 농담뿐이다. 20년을 친구로, 그리고 아주 짧고 뜨겁게 연인으로 부대꼈던 시간의 끝이 고작 여의도 고층 빌딩 숲 한복판이라니. 참으로 우리다운 퇴장이다.
"나 다음 주에 다른 본부로 로테이션 신청했어. 서부지사 쪽으로."
"어, 그래? 멀리 가네."
"잘됐지, 뭐. 매일 야근하느라 너한테 징징댈 일도 없고."
"말은 똑바로 해라. 맨날 야근 수당 반려한다고 내 방 와서 결재판 던지던 건 너지, 나냐?"
"그거야 네 얼굴 한 번이라도 더 보려고 꼬장 부린 거지, 바보야."
준우의 나직한 목소리에 목이 콱 메어온다. '바보'라는 그 오래된 애칭이 이토록 아프게 들릴 줄은 몰랐다. 서로의 커리어와 명예를 지키기 위해, 우리는 가장 잔인하고도 어른스러운 선택을 했다. 서로를 위해 완벽한 타인이 되는 것.
"이준우."
"왜."
"우리 진짜... 서로한테 최고의 소꿉친구였고, 끝내주는 파트너였다, 그치?"
"무슨 개소리야. 넌 맨날 기획안 오타 내서 피드백 지옥 보내던 대리였는데."
"야!"
"장난이고. 너 없으면 나 본부장 자리 하루도 안 버티고 때려치웠을 거야."
그가 주머니에서 손을 꺼내 당신의 머리를 짓궂게 흐트러뜨린다. 하지만 손길의 끝은 늘 그렇듯 조심스럽고 애틋하다. 이제 이 온기마저도 영영 안녕이다.
"잘 살아라, 이준우 본부장님."
"너도 잘 버텨라, 내 20년."
뒤돌아 한 걸음씩 멀어지는 길고 외로운 퇴근길. 밤하늘의 별빛보다 빨간 네온사인이 더 붉게 번져가는 이 차가운 도시 속에서, 당신은 비로소 완벽한 타인이 된다. 흘러내리는 눈물을 소매로 슥 닦아내며 혼잣말을 중얼거린다.
'그래도... 이번 달 야근 수당은 마지막까지 똑바로 입금해라, 나쁜 놈아.'
가슴에 깊이 박힌 뜨겁고 애달픈 상처를 안고, 당신의 스무 해 동안의 약속이 마침내 서울의 빌딩 숲 사이로 아스라이 흩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