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이튿날 아침, 정명전 전조 마당은 얼어붙은 서리보다 더 차가운 침묵으로 뒤덮여 있었다.

붉고 푸른 관복을 입은 조정 대신들이 마당 양옆으로 늘어섰고, 그 한가운데에는 밧줄에 묶인 우의정 류성룡이 거친 흙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밤샘 국문으로 인해 그의 입술은 트고 허연 버짐이 피었으나, 눈빛만큼은 기묘할 정도로 고요했다.

그 맞은편에 선 송익필의 안색에는 승리자의 오만함이 가득했다. 그의 뒤편으로 장정 네 명이 붉은 가죽 끈으로 봉인된 커다란 나무 궤짝 서너 개를 무겁게 내려놓았다.

"전하! 영변 기지에서 류성룡이 사사로이 군비를 횡령하고, 법도를 어겨 축재한 은과 사가 장부가 이 안에 들어 있나이다!"

송익필이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궤짝을 가리키며 고함을 질렀다. 그의 목소리는 정명전의 높은 처마를 타고 사림들의 가슴을 찌르듯 앙칼지게 울려 퍼졌다.

"조종조의 법도를 어기고 천한 야철 장인들을 모아 군수를 사유화하더니, 결국 이리 추악한 은닉 자금을 모아 조정을 농락하려 하였습니다. 이 실증을 보고도 우의정을 비호하신다면, 전하께서는 묘당의 신료들과 사직의 공론을 잃으실 것이옵니다!"

대간들이 일제히 엎드리며 흙바닥을 손바닥으로 쳤다.

"우의정의 목을 베어 사직을 바로잡으소서! 군기시를 폐쇄하시어 패도의 싹을 자르소서!"

용상에 앉은 이연은 턱을 괴고 그 광경을 내리보았다. 그의 눈동자는 깊고 어두웠다. 어떤 감정도 드러나지 않는 무표정한 얼굴이었으나, 손끝은 어좌의 용두를 천천히 두드리고 있었다.

"류 우상."

이연의 낮고 가라앉은 목소리가 마당을 갈랐다.

"저들이 들이민 궤짝과 장부가 보이는가. 경은 저 안에 든 것이 정녕 영변의 군수 기지에서 유출된 은이라 생각하는가?"

류성룡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왕을 올려다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공중에서 얽혔다. 류성룡은 왕의 눈빛 속에 담긴 차가운 확신을 읽었다. 그것은 4화 전, 깊은 밤 편전에서 왕이 자신에게 나직하게 속삭였던 법리적 구상과 정확히 일치하는 눈빛이었다.

'법이란 베는 자의 손길에 따라 아군을 지키는 방패도, 정적을 멸하는 가차 없는 도끼도 되는 법이오.'

류성룡이 마른침을 삼키며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갈라졌으나 단단했다.

"전하. 송 진사가 가져온 저 은 궤짝들과 장부는 영변의 군수 기지에서 유출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조정의 법도를 참칭하여 사리사욕을 채우려 한 자들이 급조해 낸 위조품에 불과하옵니다."

"위조라니!"

송익필이 눈을 부릅뜨며 나섰다.

"이 장부에는 영변 야철지에서 생산된 신형 조총의 부품 수량과, 이를 외방에 밀매하여 거둬들인 은의 액수가 일목요연하게 적혀 있소! 감히 대전에서 거짓을 고해 죄를 모면하려 드는가!"

"그렇다면 송 진사."

이연이 가볍게 손짓을 했다. 내관 한 명이 쟁반 위에 놓인 주칠을 한 박달나무 조각 하나를 받쳐 들고 계단을 내려갔다.

"저 궤짝 안에 든 조총 부품과 은을 꺼내어, 이 '눈금 전 조각'과 대조해 보아라."

송익필의 미간이 좁아졌다.

"눈금 전 조각…… 이라 하심은 무엇이옵니까?"

"군기시 별제 박진국이 철산과 영변 야철지의 장인들에게 배포한 표준 규격 도구다. 문맹인 도공과 야철장들이 자구 하나 읽지 못해도 오차 없이 1치 2푼의 총열 약실을 깎아내도록 과인이 친히 고안해 하사한 물건이지."

이연의 목소리에는 묵직한 힘이 실려 있었다.

"영변에서 정식으로 주조된 공무(公物)라면, 총열의 규격과 탄자의 지름이 정확히 이 1치 2푼의 박달나무 눈금과 일치해야 한다. 만약 송 진사가 가져온 궤짝 속 물건들이 영변에서 유출된 진품이라면, 단 1푼의 오차도 없이 맞아떨어질 터."

내관이 궤짝을 열고 그 안에서 거칠게 깎인 조총의 신(총열 부품)과 탄자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박달나무 조각을 조총 약실의 홈에 밀어 넣었다.

딱, 꺼칠한 소리가 나며 조각이 약실 안으로 쑥 들어가 버렸다. 규격이 너무 넓어 헐거웠던 것이다. 다른 부품 역시 눈금 전 조각의 선과 맞지 않고 비뚤어져 있었다.

"이, 이것은……."

송익필의 안색이 순간 하얗게 질렸다.

"오차가 무려 2푼이 넘는구나."

이연이 차갑게 비웃었다.

"명나라 세작들이 조총의 정밀도를 떨어뜨리기 위해 가죽 자를 사용해 사보타주를 획득하려 했던 조잡한 위조의 흔적이, 송 진사가 들이민 물증에서 그대로 나타나는구나. 영변의 장인들은 이 눈금 전 조각이 없으면 쇳물을 붓지도 못하거늘, 저 조잡한 철물이 어찌 영변의 제철소에서 나왔단 말이냐? 저것은 도성을 드나드는 밀무역상들이 사적으로 주조한 조잡한 사철(私鐵) 무기다."

"전하! 비록 무기의 규격이 다를지라도, 이 장부에 적힌 유황과 은의 거래 내역은 분명……!"

송익필이 다급하게 장부를 펼쳐 들려 했다. 그러나 류성룡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밧줄에 묶인 몸을 꼿꼿이 세우며 소리쳤다.

"전하! 신 류성룡, 이제야 저 장부와 은의 출처를 명백히 깨달았나이다! 저 장부에 적힌 은의 유통 경로와 사가 토지의 목록은, 영변의 군수 기지가 아니라 서인 가문들이 사적으로 소유한 경기와 충청 일대의 '사유 영지'에서 발생한 불법 은닉 자금의 흐름이옵니다!"

"무슨 망발을 하는 것이냐!"

송익필의 목소리가 뒤집어졌다. 조정 대신들 사이에서 웅성거림이 파도처럼 번져 나갔다.

류성룡은 이연의 눈빛을 받으며, 목소리에 공력을 실어 경국대전의 자구를 읊조리기 시작했다. 4화에서 왕이 자신에게 주입했던, 사대부들의 명줄을 끊을 그 치명적인 법리였다.

"《경국대전》 형전(刑典) 사치조와 호전(戶典) 전제(田制)의 예외 조항에 이르기를, 사대부가 국가의 허가 없이 사유 영지 내에서 야철을 하거나, 군수 자원인 유황과 숯을 대량으로 사장(私藏)하고 유통하는 행위는 '국가 비상시 사치 및 불법 무기 제조의 예외적 몰수 대상'이라 명시되어 있나이다!"

류성룡의 눈이 형형하게 빛났다.

"전하께서 이미 도성에 '궁중 근검령'을 선포하시어 유황과 초석의 민간 유통을 금하셨거늘, 저 장부에 적힌 것은 송익필을 비롯한 서인 중신들이 자신들의 가문 영지에서 몰래 유황을 캐내어 왜구와 여진에 밀매하고, 그 대가로 받아 챙긴 은의 명세서이옵니다! 즉, 송 진사가 들이민 저 은 궤짝은 류성룡의 죄를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은닉해 둔 불법 사치 자금을 영변의 장부로 둔갑시켜 가져온 자승자박의 증거이옵니다!"

"이, 이 무슨……! 전하, 저 자가 미쳐 날뛰는 것이옵니다! 저 은은 가문의 정당한 사유지에서 나온 재산이옵니다!"

송익필이 다급하게 변명하려 했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덫의 밧줄을 스스로 목에 감는 행위였다.

"정당한 사유지라?"

이연이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그의 장포 자락이 용상 계단을 쓸며 가라앉았다.

"송 진사 스스로 인정하였구나. 저 은의 출처가 서인 사대부들의 가문 사유 영지라는 것을."

"전하, 그것이 아니오라……!"

"경국대전은 명백히 이르고 있다."

이연의 목소리가 벼락처럼 대전 뜰을 때렸다.

"국가 비상시에 사대부의 가문 영지에서 유황, 초석 등 화약 원료를 무단으로 굴착하거나 이를 은닉할 시, 해당 영지는 전량 국고로 귀속되며 가문의 재산은 사치 금지령 위반으로 자동 몰수조치한다! 게다가 송 진사가 가져온 장부에는 그 사유 영지의 위치와 은의 액수가 고스란히 적혀 있지 않은가!"

전조 마당이 일순간 지옥 같은 침묵에 빠져들었다.

송익필을 따르던 서인 대간들의 얼굴이 하나둘씩 흙빛으로 변해 갔다. 자신들의 밥줄이자 가문의 기반인 영지와 산림이, 송익필이 가져온 장부 한 장 때문에 통째로 국고에 몰수당할 위기에 처한 것이다.

"이 장부에 적힌 충청도 서천의 야산과 경기도 여주의 영지는 누구의 소유인가?"

이연이 장부를 받아 쥐며 차갑게 읊조렸다.

"우의정 심의겸의 가문 영지이군. 홍문관 교리 이산해의 사촌 명의의 산림도 있고. 송 진사, 경이 아주 훌륭한 고발장을 작성해 왔구나. 이 영지들은 오늘부로 경국대전의 사치 몰수 조항에 의거, 전량 국고로 몰수한다!"

"전하!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심의겸이 대열에서 뛰어나와 바닥에 머리를 찧었다. 그의 이마에서 붉은 피가 흘러내려 서리를 붉게 물들였다.

"소신들은 정녕 몰랐나이다! 송익필이 우의정을 모해하기 위해 소신들의 가문 영지 장부를 도용하여 위조한 것이옵니다! 저희 가문은 아무런 관련이 없나이다!"

"전하, 송익필의 광증이 조정을 어지럽혔나이다! 우의정 류성룡은 무죄이오니 즉시 방면하시고, 저 간사한 송익필을 처단하소서!"

순식간에 대열이 붕괴했다. 방금 전까지 류성룡의 목을 베라던 서인 추종 세력들이, 자신들의 가문 재산이 날아가게 생기자 일제히 송익필을 배신하고 나선 것이다. 그들은 비출거리는 몸짓으로 송익필을 밀치며 이연의 발아래 엎드려 비굴하게 구걸했다.

"사직을 위한다던 대간들의 대의가, 고작 가문의 은 궤짝 몇 개와 땅덩어리 앞에서 이리도 쉽게 꺾이는구나."

이연은 그 추태를 싸늘하게 내려다보며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이것이 성리학적 사대부들의 본질이었다. 도덕과 명분을 숭상하는 척하지만, 결국 가문의 재산과 이권 앞에서는 상호 간의 목을 물어뜯는 하이에나 무리에 불과했다. 경국대전의 자구 하나를 뒤틀어 설계한 법리의 덫이, 정적들의 심장에 정확히 꽂히는 순간이었다.

"류 우상을 즉시 포박에서 풀고 복직시키라."

이연의 명령에 금부도사들이 서둘러 류성룡의 밧줄을 풀어냈다. 류성룡은 붉게 멍든 손목을 어루만지며 왕을 향해 깊이 고개를 숙였다. 영변의 군수 기지를 철저히 수호해 낸 주종의 완벽한 승리였다.

송익필은 넋이 나간 표정으로 대전 한가운데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를 지탱하던 서인 세력은 이미 그를 외면한 채 자신들의 영지를 지키기 위해 왕의 처분만을 기다리며 납작 엎드려 있었다. 왕권의 도덕성을 탄핵하려던 킹메이커는, 단 한순간에 전 재산을 몰수당하고 파멸해 가는 일개 범죄자로 전락했다.

"그리고 들으라."

이연이 용상에서 내려와 대신들 앞에 섰다. 그의 목소리에는 거역할 수 없는 지고의 권위가 서려 있었다.

"이번 사태로 사대부들이 사유 영지를 통해 무기 원자재를 밀매하고 군정을 어지럽히는 행태가 명백히 드러났다. 이에 과인은 조종조의 법도를 바로잡고 국경의 안위를 지키기 위해 새로운 국법을 공포하노라."

대신들이 숨을 죽였다.

"평안도 영변과 철산, 그리고 사철과 유황이 매장된 북방 일대의 산림을 사대부들의 손길이 닿지 않는 왕실 직할의 '어방(御房) 제철 영지'로 선포한다. 이 영지 내에서의 무기 제조, 야철, 광산 개발은 오직 군기시와 과인의 직속 허가를 받은 자만이 수행할 수 있으며, 사림의 그 어떤 간섭과 상소도 불허한다. 이를 어기는 자는 역모로 다스릴 것이다."

사대부들의 간섭을 원천 차단하고, 군기시의 화약 병기 양산 체제를 왕실 직속의 영구 독립 사단으로 구축하는 '어방 제철 영지법'의 탄생이었다. 이제 조정의 그 어떤 사대부도 영변과 철산의 군수 공장을 건드릴 수 없게 되었다.

"전하의 뜻을 받들겠나이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류성룡을 비롯한 동인 신료들과, 재산을 지키기 위해 영혼까지 판 서인 신료들의 창화가 정명전 뜰을 가득 채웠다.

이연은 어좌에 다시 앉아 깊은 숨을 내쉬었다. 가슴을 짓누르던 통제 집착증과 전쟁의 공포가 아주 조금은 가벼워지는 듯했다. 이제 조선의 공업력을 현대식 라인으로 끌어올릴 완벽한 정치적 방패막이가 완성되었다.

대제국 조선의 초석이 마침내 다져진 것이다.

그러나 그 승리의 여운은 채 반각도 가지 못했다.

"보, 패보옵니다!"

정명전의 굳게 닫힌 문이 거칠게 열리며, 피와 먼지로 범벅이 된 승정원 서리가 안마당으로 굴러 들어왔다. 그의 등에는 붉은 깃발이 꽂혀 있었고, 가죽 갑옷은 사정없이 찢어져 있었다.

"북방에서…… 북방 여진의 니탕개가 난을 일으켰나이다!"

서리의 비명 같은 목소리에 대전 안의 온기가 순식간에 증발했다.

"여진의 철기병 2만 대군이 강을 건너 요강 가도의 3진을 순식간에 유린하고 함락하였나이다! 경흥과 온성이 이미 불길에 휩싸였고, 북방의 방어선이 속수무책으로 무너지고 있나이다!"

비보를 들은 대신들이 비명을 지르며 우왕좌왕하기 시작했다. 2만의 중무장한 여진 기병. 조선의 빈약한 국경 수비대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괴물들이 국경을 파고든 것이다.

이연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차갑게 경직되었다. 그의 손가락이 다시 어좌의 용두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가슴 밑바닥에서 뜨거운 아드레날린과 함께 전생의 공학자로서의 투지가 끓어올랐다.

'올 것이 왔는가.'

이연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며, 저 멀리 평안도 철산에서 붉은 열기를 내뿜으며 대기하고 있을 수백 문의 개량 화포들과 표준 조총들을 떠올렸다.

조선의 화력이 세상에 그 본모습을 드러낼 시간이 마침내 도래했다.

***

**《선조실록(宣祖實록)》 임오(壬午)년 겨울 기록 요약**

서인 송익필이 류성룡을 모해하고자 가짜 장부와 조잡한 무기를 대전에 들이밀었으나, 전하께서 하사하신 '눈금 전 조각'의 규격에 맞지 아니하므로 그 위조됨이 만천하에 드러났도다.

우의정 류성룡이 이에 《경국대전》의 사치 몰수 법리를 들이대어 송익필 일파가 사유 영지에서 유황을 밀매한 죄를 역으로 고발하니, 왕께서 노하여 서인들의 영지를 전량 국고로 환수하시고 영변과 철산을 어방 직할 제철 영지로 선포하시어 군기시의 기틀을 철옹성같이 하셨도다.

그러나 정쟁이 가라앉기도 전에 북방에서 니탕개가 2만 대군을 이끌고 3진을 함락하였다는 패보가 이르니, 도성 안의 백성들이 공포에 떨고 조정이 크게 요동하더라. 왕께서 오히려 안색을 굳건히 하시고 친정을 준비하시니, 이는 장차 조선의 신식 화포가 천하를 진동할 서막이었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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